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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의 문화톡톡] '아름다움'을 향한 반역
[류수연의 문화톡톡] '아름다움'을 향한 반역
  • 류수연(문화평론가)
  • 승인 2019.11.18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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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이한의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을 읽다

코르셋과 억압의 역사

 

사진1.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처: 네이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처: 네이버

“20인치나 되잖아. 18인치로 줄여줘.”

1939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여주인공 스칼렛(비비안 리 분)은 코르셋을 입은 채 기둥을 잡고 유모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미 날씬하다 못해 마른 몸매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칼렛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날씬한 허리를 만들기 위해 코르셋을 세게 조일 것을 요청한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그것은 물론 아름다움을 위해서였다. 짝사랑하는 애슐리(레슬리 하워드 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스칼렛은 자신의 허리를 더욱 잘록하게 만들고자 했다. 여기서 여주인공의 신체는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유혹의 무기로서 이용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무기는 엄청난 신체적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아름다움을 이유로 여성의 신체에 가해졌던 억압은 비단 코르셋만은 아니다. 서구사회에 코르셋이 있었다면, 아시아에는 그와는 다른 형태로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도구나 제도들이 존재했다. 3-4세 무렵부터 여자아이의 발을 묶어 발의 성장을 저지시켰던 중국의 전족이 대표적이다.

 

사진2. 18세기 중국 신발 출처: 다음백과
18세기 중국 신발 출처: 다음백과

모두 잘 알고 있는 대로 코르셋이란 몸매를 날씬하게 만들기 위해 신체를 강제로 조여서 고정하는 속옷이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미용을 위한 보조도구일 뿐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여성들의 신체를 왜곡시키고 치명적인 고통에 빠뜨린 원흉이기도 했다. 날씬한 허리를 위해 입은 코르셋은 갈비뼈를 변형시켜 폐를 압박했고, 실제로 일부 여성들은 그로 인해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전족이 미의 기준이 된 시대에 태어난 소녀들은 폴더처럼 접혀 자란 기형적인 발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 불구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여전히 미용을 위한 보조도구로서 수많은 코르셋들이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의 코르셋이 사라져도 또 다른 코르셋이 나타나 그 자리를 대체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는 것은 비단 고전적인 의미의 코르셋하나가 아니다. 브래지어부터 하이힐, 헤어스타일, 화장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신체와 일상을 억누르는 코르셋은 오늘날에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코르셋은 어느덧 그 자체로 상징이 되었다. 스칼렛의 코르셋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허리와 골반은 1960년대 이후 더 이상 보편적인 미적 기준이 되진 않았지만, 여전히 미디어는 비현실적인 개미허리를 예찬하고 웰빙의 이름으로 다이어트를 강요하고 있다.

 

젠더불공평 위에서 축적된 서양 미술사

 

조이한의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한겨레출판, 2019)이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계이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눈앞에 보이는 코르셋보다 여성의 삶을 옭아매는 사회적 코르셋의 전통이 훨씬 견고하고 유구한 것임을 밝혀낸다. 서양미술사라는 고고한 흐름을 되짚으며, 이 책은 서양미술사가 여성의 미와 가치를 억압하고 왜곡하는 기반 위에서 형성되고 축적되어왔음을 규명하고 있다. 미술도 페미니즘도 ··(잘 알지 못함)’인 사람조차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친절한 설명과 정연한 논증은 이 책이 주는 덤이다.

 

사진3. 조이한의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출처: 교보문고
조이한의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출처: 교보문고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이라니. 이 말은 당신은 아름답다.”는 말보다 더 거짓말 같다. 그것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직시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미추(美醜)’라는 기준 앞에서 스스로를 ()’에 놓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사회적 애티튜드라고 학습해왔다. 그러나 조이한은 말한다. 지금까지 당신은 속고 있었다고. 당신은 처음부터 이미 아름다웠다고.

이 책이 보여주는 서양미술사는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당위에 속아왔는가를 보여준다. 신화를 담아낸 그림 속에서 여성의 신체는 언제나 관음의 대상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단죄의 대상이 된다. 그 어디에도 관음의 주체에 대한 처벌은 부재한다. 조이한이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시선들이다. 실질적인 폭력의 주체이자 근원 말이다.

그들은 악을 자행하지만, 그 악의 근원을 항상 희생자에게 돌린다. 그들은 희생자의 육체를 타락하고 더러운 욕망의 근원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육체야말로 자신들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그 신체가 바로 악이고 추()이며 원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단죄의 근거가 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신화를 통해 배워온 수많은 악녀의 이미지가 탄생한다.

실제로 메두사는 포세이돈에게 강간당한 피해자였지만, 아테나의 신전을 더럽힌 죄로 괴물이 된다. 판도라에게 온갖 재앙이 든 상자를 선물한 것은 제우스이다. 그러나 악의 근원이라는 비난은 오직 판도라만이 감수한다. , 맙소사. 정말이지 적반하장이 아닌가?

 

신의 금기를 어긴 행동도 프로메테우스가 하면 영웅적 행위이자 주체적 자존감의 표출이 되지만, 판도라와 이브가 하면 파라다이스를 잃게 만든 어리석고 멍청한 행동이 된다. 의지도 없이 자의식도 없이,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했거나 사탄의 꾐에 빠져 어쩌다 신을 거스른 바보들. 애초에 신은 그들을 복수의 미끼, 또는 남자의 외로움을 덜어줄 배필로 삼기 위해 만들었다. 그들의 호기심이나 지적 모험심은 인류에게 죽음과 재앙을 불러올 뿐인 것이다. - 123.

 

신화 속에서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오직 남성들만의 몫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역사 역시 그들만을 위한 것으로 귀결되었다. 추하고 타락하고 더러운 여성의 육체는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고 단죄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 육체는 속박되고 가다듬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육체로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되, 스스로 욕망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순결해야 하되, 결코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잣대인가? 하지만 고대로부터 근대, 다시 현대로 이어진 남성들의 유대는 이 모든 왜곡을 오히려 진리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쯤 되면 미의 기준 따위는 엿이나 바꿔 먹어라.’라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나로서 충분히 아름답다

 

그들이 속인 것은 어쩌면 단 하나. 당신이 이미 처음부터 아름다웠다는 그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랜 시간 왜곡된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거울 속의 자신을 미워함으로써 위장함으로써 더 아름다운 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그만 인정하자고 말한다. 우리는 이미 우리로서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사진4. 임신한 앨리슨 래퍼(마크 퀸) 출처: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사진4. 임신한 앨리슨 래퍼(마크 퀸) 출처: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조각에서는 목과 팔다리가 없는 조각을 토르소(torso)라고 한다. 우연히 고대의 조각이 팔이나 다리가 부서진 채 발견된 데서 시작되었지만, 신체 일부만 가지고도 특별한 긴장을 자아내면서 그 자체로 조형적인 미와 완벽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알아차린 예술가들이 있다. (중략) 그렇다면 살아 있는 토르소인 앨리슨 래퍼의 육체를 아름답게 보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 43-44.

 

사람들은 팔다리가 없는 토르소를 아름답다고 예찬한다. 그러나 현실의 토르소인 장애인 여성에게는 비정상이라는 편견을 부여한다. 하지만 앨리슨 래퍼는 세상의 편견 속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현대의 비너스라 칭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예술가로서의 앨리슨 래퍼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마크 퀸의 모델로서 그는, 젠더를 넘어 정상/비정상이라는 이분법의 모순을 비판하는 새로운 미의 기준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앨리슨 래퍼의 몸은 그 누구의 평가 없이도 이미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아는 당신 역시 이미 아름답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그리하여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그 모든 말들은 그저 거짓말일 뿐임을.

그리하여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지금 당신은 어떤 코르셋 속에 갇혀 있는가? 혹시 그 코르셋이 요구하는 왜곡된 기준에 맞추느라 자신의 현재와 열정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코르셋을 벗어던져라.” 그것이 당신이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직시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 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문학/문화평론가. 인천문화재단 이사. 계간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고, 현재는 문학연구를 토대로 문화연구와 비평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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