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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분명한 시작을 알리는 영화 <82년생 김지영>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분명한 시작을 알리는 영화 <82년생 김지영>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19.11.18 09: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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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것처럼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소설 속 결말보다 모두가 바랄만한 결말을 택했다. 지영의 내외는 특별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지영을 상담하던 의사는 이제 미혼 간호사를 뽑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끝나던 소설과 다르게 영화는 지영이 주변의 지지와 응원으로 자신의 일을 찾는 것을 행복을 선사한 것이다. 바로 이 결론처럼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전반적으로 현실보다, 그리고 소설보다 유한 설정들을 택했고, 영화가 시작도 되기 전 일어났던 별점 테러와 같이 우려했던 상황들은 특별히 발생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는 지영의 무기력이 너무도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사회적 착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그리고 그것을 굳이 찾아가야 하는 극장에서의 영화가 아닌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기 위한 방편이었을지 모른다. 김지영‘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오랫동안 폭넓게 다룰 주제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82년생 김지영>은 한국영화라는 좌표 위에 점을 찍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바로 이 안전한 공감의 실체, 그러니까 최대한 조심스럽고 행복한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그 지점에 대해서는 질문이 필요하다. 이는 작품에 대해서라기보다 이 작품이나 혹은 유사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작품들을 둘러싼 담론들이 영화에, 아니 이 주제에 얼마나 큰 부담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를 보고 든 두 가지 생각은 소설의 출간까지를 포함하여 이 정도의 이야기가 과연 논란을 불러일으킬만한 것인가에 대한 의아함과 이처럼 착한 결말로 귀결되어야 거부감과 멀어지면서 누군가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씁쓸함이었다. 그러니까 <82년생 김지영>의 착하고 착한 인물들과 결말,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바로 그 세상은 사실상 또 하나의 강요를 품고 그려진 세계일지 모른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나왔을 때 따라붙었던 말들은 우리 어머니 세대인 60년대 생들의 고생은 이해할 수 있지만, 80년대 생들이 어떠한 차별을 당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여기에 꼬리를 물었던 것이 극소수의 여성들이 겪은 일로 한 세대를 일반화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억지는 사실 『58년생 최숙자』라는 제목의 소설이 나온대도 동일하게 나올 비판이었을 것이다. 즉, 자신의 어머니 세대인 40년대 생들의 고생은 이해할 수 있지만, 60년대를 살아갔을 이들이 도대체 어떤 차별을 겪었느냐는 말로 회귀할 논리였다. 여기에는 나와 동시대를 지나온 여성들은 차별을 당했을 리 없으며 이렇게까지 힘들었을 리 없다는, 나 이상으로 힘들 리 없다는 전제가 포함되는 것일 터였다. 그래서 아량을 베풀 듯 내세운 전제가 ‘극소수’라는 것이었고, 몇몇은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 라는 인정으로 다수의 고통을 잠재우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시도들은 대체로 아프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남들도 다 그렇게 잘 살아간다, 왜 너만 유난이냐는 식의 한정적인 틀을 마련한다. 또 왜 스스로를 피해자로 칭하지 못해 안달이 났느냐며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오히려 이상한 이들로 취급해 버린다. 사실 수많은 김지영‘들’의 사례를 피해로 인정도 할 생각도 없으면서 개인의 예민함으로 치부하기 위해 던져대는 이 낮은 수는 논리가 없기에 논리로 대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해하려하지 않는 이들과의 대면은 사실상 싸움이 된다기보다 무시로 이어지는 것이 쉬웠고, 그만큼 이러한 문제를 낳는 주제들은 멀리 떨어지는 것이 속편한 일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은 답이 없을 논쟁들과 굳이 맞닥뜨리지 않으면서도 아들 생각만 하며 한약을 지어온 남편 손에서 약을 빼앗아 집어던지는 아내를, 맘충이라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호통치는 아기 엄마를, 고모들 앞에서 정신 차리라며 주방으로 남동생을 끌고 들어가는 누나를, 내가 낳은 내 새끼를 똑같이 대하지 않는 엄마의 울분을 모두 그려냈다. 우리가 오랫동안 보아온 영화 혹은 TV드라마 속에서 이 순간들은 아들을 얼러대는 어른들 뒤로 어리둥절하거나 울분에 찬 딸이나 엄마의 얼굴로 표현될 뿐이었지만 <82년생 김지영>은 그 얼굴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또렷한 목소리로 터트린 셈이었다. 안정된 <82년생 김지영>의 세계는 그렇게 시작을 알렸고, 이제 더 크고 깊은 목소리가 따라 붙을 수 있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이 34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본 영화가 되고, 2019년 손익분기점을 넘은 몇 안 되는 영화에 포함되었다는 것, 기쁜 일이다. 어디 한번 보자라며 벼르던 이들이었든 꼭 보고 싶다고 기다리던 이들이었든, 김지영‘들’이 이야기가 현재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는 점은 이 수치가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여성서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시기는 이미 지나버린 듯하다. 그것이 논쟁이든 옹호이든, 무시든 지지이든 간에 이미 이에 대한 관심은 떠올랐고, 이젠 신나게 그 방식을 고민해야 할 때다. <82년생 김지영>은 편안한 방식으로 메인 스트림에서의 시작을 알렸다. 이 분명한 성과와 성공에 대해서 먼저 기뻐한 후 그 이후의 축제를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82년생 김지영>(2019)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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