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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의 문화톡톡] 보잘 것 없는 ‘우리’가 만든 가장 특별한 이야기
[류수연의 문화톡톡] 보잘 것 없는 ‘우리’가 만든 가장 특별한 이야기
  • 류수연(문화평론가)
  • 승인 2019.12.16 10: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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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에 대한 리뷰

보잘 것 없음의 자각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코키토는 철학적 사유의 근원을 신으로부터 인간의 몫으로 돌린 하나의 사건이었다. 인간을 신의 부속물이 아닌 오롯한 존재로서 사유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각성(覺醒)’이다. 그것은 단지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이성을 가능하게 만든다.

 

사진1.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 포스터. 출처: MBC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 포스터. 출처: MBC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주인공 은단오(김혜윤 분) 역시 어느 날 '각성'한다. 하지만 그 각성은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틀어버린다. 은단오의 각성은 그녀가 만화 속 캐릭터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화 속 주인공이라니……. 사실 이것은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던 이야기가 아닌가?

단오는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디선가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리면 자신이 자꾸 맘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맙소사. 그녀가 있는 곳은 만화 속, 무려 첫사랑의 상큼함이 물씬 날 것만 같은 학원물이었다.

하지만 꿈을 이룬(?) 단오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각성이라는 철학적 난제를 깨우친 만큼 멋지고 근사하고 깊은 사색의 순간으로 빠져들어야 마땅하겠건만, 그녀 앞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경악의 순간뿐이다. 그 이유는 딱 하나. 우리의 주인공 은단오는 자신이 속한 만화라는 세계의 주인공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처음에 단오는 자신이 이 만화의 주인공일 거라고 생각한다. 부잣집 외동딸, 어릴 적부터 앓아온 심장병, 차갑지만 근사한 약혼자까지. 전형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주인공을 빛나게 해주는 조연, 그것도 심장병으로 인해 곧 죽을 엑스트라에 가까운 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단오의 각성은 아이러니컬해진다. 그 이유는 그녀의 각성이 일깨워준 현실이 지나칠 정도로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운명을 벗어날 수도 개척할 수도 없는, 게다가 사고할 수는 있지만 실체는 없는 만화 속 캐릭터라니. 이미 존재의 각성을 둘러싼 철학적 의미와 가치는 이 만화적 설정과 함께 뒤엉켜버린다.

 

대 놓고 유치하기? 하지만……

물론 이 역설 자체는 어떤 지점에서는 대단히 상투적인 것이다. 주인공이 책 속의 세상으로 빙의되는 서사는 웹 콘텐츠에서는 흔한 코드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주인공이 차원이 다른 세계로 가서 활약하게 되는 이세계물의 하위 장르로 인식된다. 게다가 만화 속 세상을 현실과 공존하는 이세계로 그려내는 방식은 이미 2016년에 방영된 드라마 <W>를 통해 익숙해진 것이기도 하다.

 

사진2. 드라마 [W] 포스터. 출처:MBC
드라마 [W] 포스터. 출처:MBC

일반적으로 책 빙의물의 주인공은 압도적인 역량을 가진 먼치킨형 인물로 그려진다. 웹툰이나 웹소설에서는 그러한 점이 극도로 부각된다. 그 이유는 책 빙의물 주인공들의 대부분이 현실에서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는 은어)’에 가까웠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빙의된 세계는 단지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모든 것을 이루는 인생역전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이다.

하지만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이러한 코드를 비껴나간다. 이 만화 속의 조연이자 엑스트라인 단오에게는 이 만화 속 세상 자체가 이생망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10년 짝사랑에 시한부 인생이라는 악조건은 다 달고 있지만, 엑스트라에 가까운 조연이라는 그녀의 설정값은 도무지 극복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진짜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만화적인 설정과 코믹한 전개로 이어지지만, 단오의 각성이 던져주는 의문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이 거대한 세계의 주인이 아닌 거기에 속박된 가장 작은 톱니임을, 따라서 자신의 현실이 고작에 불과함을 빠르게 자각하고 인정한다. 그러나 단오는 절망하지 않는다. 운명에 순응하기보다는 저항한다. 그녀는 만화라는 스테이지 속에서 주어진 자신의 역할이 아닌, 그 스테이지의 뒤에 존재하는 쉐도우 속에서 자신의 진짜 삶을 찾아나가고자 한다.

 

우리라는 가치

그런데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원작은 그 설정값과 마찬가지로 본래 웹툰이라는 점이다.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이 바로 그것이다. 발랄한 학원물의 풋풋함을 유지했던 드라마와 달리, 웹툰은 중반 이후부터 비극적 결말이 전면화 되면서 좀 더 어둡고 묵직한 질문들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별도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진3.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 출처: Daum 만화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 출처: Daum 만화

 

보잘 것 없는 나와

나보다 더 보잘 것 없는 너

그래서

더욱 보잘 것 없었던

우리의 첫사랑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에서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의 프롤로그는 이 웹툰이 단지 첫사랑이라는 꽁냥꽁냥한 학원물만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물론 이 서사의 외연은 첫사랑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더 주목되는 것은 그들의 첫사랑을 둘러싼 냉혹한 진실이다. 그것은 바로 이들 인물들이 보여주는 보잘 것 없음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 은단오는 만화가에 의해 부여된 첫사랑을 거부하고, 자신의 진짜 첫사랑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그 첫사랑은 이름조차 없는 엑스트라 하루(로운 분). 각자에게 주어진 설정값 안에서는 만나는 것조차 어려운 그들이지만,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서로를 찾는다. 그 결과 서로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다. ‘보잘 것 없는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더 보잘 것 없던 너와 만나 우리가 됨으로써 그들의 서사 역시 특별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가능한 판타지, ‘우리

이들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 사회의 10대를 떠올려 보자. 어느 순간부터인지 교실 안에서 평범보잘 것 없음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입시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보다 등수나 등급으로 인식된다. 비단 교실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교실 바깥의 세상은 더 정글 같다. 전기세 내주려고 학원을 다닌다는 청소년들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버린 지도 오래다.

지독한 입시경쟁 속에 내몰린 10대는 자기 세계의 주인이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그나마 입시경쟁 안에 들어가 있는 경우는 오히려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바깥에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길을 정해놓고 그 길만을 강요한다. 어른들이 만든 가치를 위해 어른들이 만든 제도 위에서 숫자로 기록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그러나 단오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만화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만의 하루를 발견했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자신을 가둔 만화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그 세계의 한계 속에서도 충분히 자기 삶을 살았고 그로 인해 행복했다. 만화가가 통제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만화적이었던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설정은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을 자각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있는 무엇인가를 떠오르게 만든다. 우리 눈앞의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 삶의 주인공이며,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나 자주 잊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글: 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문학/문화평론가. 인천문화재단 이사. 계간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고, 현재는 문학연구를 토대로 문화연구와 비평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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