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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친구 삼은 자들의 기쁨과 고통
개를 친구 삼은 자들의 기쁨과 고통
  • 김수정
  • 승인 2020.01.18 09: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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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날렵하고 거대한 덩치는 뭐지?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뿐 아니라 난생 처음 맡아보는 냄새를 풍기며 달아나는 저것은 나를 미치도록 달리게 만든다. 달리고 달릴수록 더 빨리 움직이는 저것을 쫓기 위해 난 온갖 험난한 가시덤불을 온 몸으로 통과해야 하고 코 끝을 간질이며 달려드는 온갖 사랑스런 향기들을 미련없이 지나쳐야 한다. 요사이 나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일어날 때마다 내 몸의 변화-잠들기 전보다 더 높이 그리고 멀리 점프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있음-를 느끼고 있었는데 비로소 오늘 내 힘의 최대치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때마침 내 영역 안에 침범해 한가로이 놀고있는 저놈을 발견한 것이다. 사사로운 냄새들의 유혹은 접어두고 저 자를 끝까지 뒤좇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함께 이전에 못 느껴봤던 감정으로 심장이 뛴다. 이런 감정을 두고 생의 환희라 하는 게 아닐까. 얼마나 달려왔을까… 어느새 미지의 탐험지로 접어들어 숲 속의 온갖 소리와 냄새로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저놈은 흐르는 냇물을 유유히 건너간다. 뒤쫓던 나는 그만 미끄러운 바위에서 발을 헛딛어 물에 빠지고 만다. 예상치 못한 난관 속에서도 목표의식을 놓치지 않은 나는 목숨을 걸고 물살을 가르며 건너편 육지로 넘어가는데… 이런! 죽을 힘을 다해 뒤쫓던 그놈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나를 홀린 그놈의 냄새는 숲 속의 온갖 냄새에 파묻혀버렸고 내 코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기쁨이 컸던 만큼, 상실의 괴로움도 큰 것일까? 나는 나홀로 남겨진 듯 갑자기 적막해진 숲 속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한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벅찬 기분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힌 채 그놈이 어디선가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다른 존재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나는 뒤돌아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러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숲을 울리는 그 목소리로 인해 기쁨 뒤 불현듯 밀려왔던 두려움이 저만치 사라진다. 내 다리는 목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더욱 힘을 내어 내달린다.

여기까지는, 어느 이른 아침에 늠름이라 불리는 개가 경험한 사건에 관한 진술로 인간인 내가 스스로 개가 되어 그의 눈을 통해 읽어낸 감정을 바탕으로 복기해본 일기이다. 인간의 일기쓰기는 게을리하는 내가 개가 되어가면서까지 동물일기를 쓰게 된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늠름이는 경기도 퇴촌의 부모님댁에서 살고 있는 개이다. 그와 나는 숲을 좋아하는 공통의 취향으로 인해 내가 그곳에 들를 때면 숲 산책을 즐긴다. 그날 아침, 소문으로만 듣던 멧돼지가 자신의 야행 습성을 잊은 것인지 숲 초입에 나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쏜살같이 내달리는 멧돼지 꽁무니를 겁도 없이 쫓아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산 속으로 사라져가던 생후 5개월, 4킬로그램 남짓의 하룻강아지를 망연자실 바라보다 풀숲에 주저앉았다. ‘저 모습이 내 눈에 담는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 되겠구나…’ 생각하며 처량 맞게 울고불고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그가 다시 살아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했을 때 느꼈던 비애와 상실감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내 전생애의 모든 고통을 쓸어담아도 이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싶을 만큼 거대했다.

그날의 사건은 고통이라고 호소하기에는 민망하리만치 짧은 20여분의 시간이 지난 후 물에 몽땅 젖어 더욱 작아진 초라한 개가 다시 나타나 영문도 모른 채 볼기짝을 얻어맞고 집으로 질질 끌려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사건의 종결과 더불어 내 머릿속 한켠을 차지하게 된 질문은, 어느 날 우연히 삶에 들어와 구석자리를 차지하게 된 한 마리 동물에게 사로잡힌 인간에 대한 것이자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내가 경험하는 절체절명 고통의 순간이 다른 존재에겐 더 없는 기쁨이 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와 역설에 관해 더 이해하려드는 유별난 마음과 태도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언어도 감각도 다른, 부담스러우리만치 의존적인 이 동물을 통하여 인간의 우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특별한 정서적 교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에서일까? 그 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결국 내가 개의 일기를 쓴 이유와 다르지 않으리라. 소설가 로제 그르니에는 자신의 개 율리시즈를 추억하며 기술한 책 <율리시즈의 눈물>에서 서로 다른 종인 인간과 개 사이의 소통을 일컬어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더 큰 기적이라 일컬으며 개를 사랑했던 여러 문호들의 입을 통해서 그들의 개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저자를 비롯하여 책 속에 등장하는 개의 인간친구들에게 강한 유대감과 동류의식을 갖게 되는 것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내 삶에 있어서도 개라는 종족이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는 세상 너머 어딘가에 경이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내 생애 이토록 각별한 우리집 개는 정작 어떠한가? 해질녘 석양에 물든 숲과 하늘이 숨이 멎도록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할 때, 그런 순간은 좋아하는 존재와 공유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보편적인 심리인지라 나는 그럴 때 옆에 있는 개에게 “늠름아! 저것 좀 봐봐!”하고 외치게 된다. 세상 행복한 늠름이의 표정(나는 어느덧 개의 세밀한 감정조차도 문화재 감정하듯 읽어낸다고 믿고 있다)을 기대하며 살필라치면 그때마다 늠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으로 호응하는 대신 으레 파헤쳐진 땅바닥에 코를 쳐박고 냄새 수집에 심취해 있거나 메뚜기를 잡겠다고 방정맞게 날뛰고 있곤 한다. 하필 개로 태어난 늠름이는, 앞서 언급한 책 속에 등장하는 앙리 미쇼의 표현을 빌자면, 은은한 향기는 무심히 지나치거나 싫어하면서 하필이면 더러운 오물 냄새만 골라서 맡으면서 미칠 듯이 좋아하는, ‘악취의 대가’ 집단의 일원인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이르길, 셰익스피어라도 개가 지각한 무수한 냄새들을 묘사하지는 못할 것이고 그 냄새들이 그 개한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다채로운 냄새의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종족.

그러나 좁힐 수 없는 태생적 간극으로 인해 머나먼 다른 감각의 세계 속에서 각자 살아갈지라도 아마도 이들의 인간친구들은, 로제 그르니에가 율리시즈를 통해 경험하였듯이, 머리 속으로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악취의 지도를 그리면서 냄새 맡기에 몰두하다가 돌연 순진한 낯짝에 행복이 넘치는 눈빛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정답게 곁으로 되돌아오는 개를 볼 때마다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애틋하고 정다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리라. 그저 어느 한 가지 냄새를 통해 그의 머리 속에 수백만 가지의 추억들이 떠오를 때 그 중 나와의 작은 기억의 한 순간을 떠올려 줄 수만 있다면 인간친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원인불명의 애착 관계에 기반하여 개와 인간이라는 두 종족은 각자의 상상력을 최대치로 발휘하여 대화를 주고받기에 이른다. 개에게 발언권을 주어 공동생활의 어려움과 자유를 명상하며 진실을 모색하고 의혹을 갖는 철학자 개를 등장시켰던 카프카의 유별남에는 못 미치더라도 개의 몸짓과 끙끙대는 신음소리로부터 그 감정과 반응을 읽어내고 그의 심중에 파고들어 원하는 바를 찾아내곤 하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서 로제 그르니에는 그의 분신과 같았던 율리시즈가 죽은 후, 그가 꿈 속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못 알아보는 체 행동하여 절망했던 일, 다시 꿈 속에서 개를 잃고 울었던 일을 털어놓는다. 저 친숙한 짐승들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들의 삶의 고통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며… 나에게도 꿈 속에서 늠름이를 잃고 울며 헤매이는 날들이 오게 될까? 세상 험한 줄 모르고 철 없던 늠름이가 이제는 인간의 말만 할 줄 모를 뿐 다양한 경험과 눈치가 쌓여가며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터득해가고 있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생의 기쁨, 그리고 종과 언어를 초월한 우정을 알아가게 해준 늠름이의 성장 과정은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내게 능동적인 학습자로서의 태도를 배양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인간은 때로 절제라는 이름의 억누름, 배려라는 명목의 위선으로 정작 필요한 경우에도 정직과 순수의 미덕을 내다버리기 일쑤인지라 생에 대한 소망, 기대와 환희, 고통과 절망 등 인간 종족이 느끼는 온갖 감정들까지 있는 그대로 여과없이 보여주는 솔직하고 충실한 존재로 살아가는 그는 인간으로서의 내 모습을 성찰하게 하는 매개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작은 동물은 그 덧없이 짧은 일생을 통해서 나 또한 이제 머지않아 세상을 떠나게 될 유한한 존재임에 대해서 말없이 차분한 가르침을 건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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