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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함정의 역설 - <남산의 부장들>의 방어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함정의 역설 - <남산의 부장들>의 방어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0.01.20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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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해석의 문제다. 이미 알려진 사건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러니까 수많은 장면의 파편들까지 공개되었고 그에 대한 양극단에 놓인 의견들이 난무하는 사안을 다시금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에 무게를 둘 것인지에 대한 해석의 선언이다. 게다가 실제의 사건 자체가 창작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인물과 국내·국외 정세 사이의 역학 관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드라마틱한 이 사건을 다시 스크린에 옮길 때 그것은 그만큼 대한 명분이 필요하다. 도대체 왜 이 이야기를 지금 다시 해야 하는가. 이를 통해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

<남산의 부장들>이 관객 앞에 설 때 준비해야 할 대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떨쳐 낼 수 없을 한국현대사의 인물과 그에 대한 비화를 다시 소환하는 이유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무시해선 안 된다.’). 물론 이에 대한 가장 나이브 하면서도 위험한 대답은 한국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역사적 상황의 전달로 수렴하는 것이다. 최근 ‘본 작품은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라는 점을 분명히 명시 했음에도 ‘영화를 통해 특정 사건을 알 수 있어 좋았다’는 평이 따라붙는 것은 역사를 그리고 있는 영화들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적확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감독이 설명하는 ‘기억해야 하는’, ‘가슴 아픈’ 과거라는 언술까지 따라붙는다면 영화는 그 자체로 특정 관점까지를 포함한 역사가 되어 버린다. 영화가 역사 교과서가 될 리 만무하지만 어찌됐든 이 나라에서 가장 정치적이고도 영향력 있는 매체를 통해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그리는 것은 그런 일이 되어 버렸다.

 

바로 이 시기에 <남산의 부장들>은 개봉한다. 중앙정보부의 기록을 담은 논픽션 『남산의 부장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영화는 10.26을 중심에 둔다. 바로 이 지점부터 이미 영화의 선택은 시작된 것이었다. 원작 『남산의 부장들』이 담고 있는, 그러니까 5.16과 JP, 중앙정보부의 창설부터 시작하고 있는 1000페이지에 가까운 기록들 사이에서 1960년대를 뛰어넘고 JP나 이후락은 정리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김영삼에 대한 탄압, 민청학련, 그 외 궁정동과 관련됐던 수많은 비화를 지나쳐 10.26을 선택한 것이다. 즉 영화는 『남산의 부장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그리고 가장 극적인 사건, 그래서 ‘남산’의 ‘부장’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사건으로 10.26이라는 『남산의 부장들』의 끝자락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과연 이 선택의 이유를, 2020년에 다시금 10.26을 상기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는가.

2005년, 공교롭게도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모두 10.26에 대해 설명했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영화의 반을 넘어가는 즈음에 대통령의 사망을 배치하고 김부장(백윤식)의 이후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1970년대의 정치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추함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면서 사건의 정확함보다는 인물들의 감정과 혼란에 집중했다. 소위 요정정치라는 판을 깔아 놓고 정치와 멀어진 듯한 포즈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역사의 한 자락을 그리고 있었다. 궁정동에 드나들며 각하께서 ‘품어주신’ 여성의 어머니(윤여정)의 내레이션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 이 작품은 사실의 전달에는 그리 관심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반면 <제5공화국>은 철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를 표방하면서 10.26을 다루었고 특별한 가치판단을 내리지는 않으려 애쓰면서 당시 누군가의 어떠한 행동, 혹은 발언이 어떤 의도로 읽힐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에 주력했다. <제5공화국>은 제목에서 언급한 시기 자체가 10.26의 발생과 12.12로 시작되는 때이다 보니 10.26을 그 시작점에서 상세히 다루었고 내레이션을 활용하면서 본격 정치드라마, 즉 사실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논픽션을 하는 <남산의 부장들>은 <그때 그 사람들>보다는 <제5공화국>의 노선과 흡사했고, 그로부터 15년 이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어차피 알고 있는 이야기이니 완벽한 영화적 미장센의 성취로 나아가거나 다른 하나는 새로운 역사적 해석 혹은 조명되지 않았던 인물의 시선으로 역사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설명하거나. 그러나 <남산의 부장들>은 이 두 개의 선택지 사이를 어설프게 오가며 15년 만에 이를 다시 보아야 하는 것에 대한 특별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영화는 느와르의 문법 안에서 영화를 배치한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이나 이 시기의 미국과 파리 등을 재현하면서 어두운 분위기와 절제를 통해 이국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 쓸쓸해 보이는 풍경들은 몇몇 해외 로케이션 장면에 국한된 것일 뿐, 사실상 인물 간의 관계가 중요한 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 사이의 대화 혹은 마주치는 신들은 인물 사이의 바스트 샷의 교차와 인물을 잡는 풀 샷의 진행으로 단순화 되어 버린다. 인물의 고뇌 역시 상당수의 얼굴 클로즈업이 대신하면서 그 이상의 잔여에 대해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 같은 단순하고도 평이한 진행은 음악에서도 확인되는 바,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스타일을 깊이 논할 필요가 없이 만든다.

 

남은 것은 역사에 대한 해석일 테지만 <남산의 부장들>은 이에 대한 해석에 게으르다. 당연히 이는 특별한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결론 내리기 힘들다는 점에서 영화의 영역을 벗어난 것일 수 있지만, 극이 인물의 성격을 통해 갈등을 빚어낼 상황을 만든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남산의 부장들> 속 인물들의 성격 부여는 평면에 가깝다. 단적으로 김규평(이병헌)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특별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박통(이성민)과 곽상천(이희준)은 김규평에게 적대자일 뿐 적절한 긴장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며(계속해서 빈정거리며 화를 내는 것과 긴장을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다.), 박용각(곽도원)과 데보라 심(김소진)은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다 흐지부지 사라진다. 이 같은 인물의 구성은 영화 전체에 있어 김규평을 돋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영화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가령 박용각의 탈출과 추격에 대한 긴 할애가 갑작스럽고 적절치 않은 것처럼.

특히 이렇게 해석이 부제한 상황은 마지막까지 남은 김규평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김규평은 박통을 살해하고 육군참모총장과 차를 타고 이동한다. 김규평을 거사를 치르기 전부터 마치 다짐하듯 모든 일이 끝나면 남산으로 갈 것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 그러나 차에 탄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김규평은 중정으로 갈 것이냐, 육본으로 갈 것이냐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영화는 김규평의 얼굴을 긴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이후 부감 샷이 잡은 유턴을 통해 김규평이 육본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이 선택이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면 길었던 김규평의 얼굴 샷은 무의미하다. 김규평의 이 선택은 역사 속에서 김재규의 오판, 혹은 미국의 개입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겠지만, 영화에서 이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김규평이 왜 고민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불균형 그리고 판단의 유보와 같은, 그러니까 누군지 뻔히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의 가명을 썼으면서도 영화의 말미 당시 전두한의 재판 결과 발표와 김재규의 최후 항변을 배치하는 것과 같은 애매모호한 상황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사실적인 전달을 중심에 두었던 ‘본격’ 정치드라마인 <제5공화국>에는 주목할 만한 장면이 나온다. 이 작품이 10.26을 약 4부에 걸쳐 할애하는 동안 딱 한 번 정치적 인물들과 청와대나 중정, 육본 등의 공간을 벗어나 시민들이 오가는 식당을 보여주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박통의 사망 기사가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는 시민들의 반응을 극화하여 당시 10.26이 어떠한 이분법적 사고 안에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즉 경제적 성과를 이룩한 대통령이자 ‘국가의 아버지’를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없어도 이 정도는 살 수 있었을 것이며 많은 이를 희생시키고 할 말 못하게 만들었으니 응분의 대가라는 분노는 정확히 10.26이 어떻게 평가되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지를 보여주었다. 전자의 관점이라면 대통령을 쏜 이는 반역자일 것이며 후자의 관점이라면 혁명가일 터 10.26에 대한 해석은, 그리고 10.26을 다시금 바라봐야 하는 이들도 결국 이 질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이 상반된 두 가치만으로, 혹은 두 가지 가치 중 하나를 <남산의 부장들>이 택했어야 했다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다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김규평의 표정, 분노의 순간, 선택과 그것의 표현의 방식은 김재규에 대한 평가로 정리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 나라에서 역사를 그려온 영화들이 거칠 수밖에 없던 매우 흔한 옹호 혹은 비판이 이미 <남산의 부장들>에 내재 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를 너무나 의식한 이 영화가 제 노선을 잡지 못한 결과에 있다. 영화 역시 모를 리 없는 이 사실은 영화를 매우 방어적으로 만들면서 인물의 성격도, 갖가지 사건들도 적절한 균형을 맞추지 못한 어설픈 결과로 나아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영화는 ‘왜’, 혹은 ‘어떻게’라는 질문과 함께 나아가는 듯 보인다. 이는 영화의 힘이 아닌 사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흥미로움 때문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빠졌던 함정의 역설일 것이다. 즉, 『남산의 부장들』을 추려서 남긴 10.26이 영화의 가장 영리한 선택일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2019)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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