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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의 문화톡톡] 문인들의 환절기, 신춘문예
[류수연의 문화톡톡] 문인들의 환절기, 신춘문예
  • 류수연(문화평론가)
  • 승인 2020.01.22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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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에 대한 단상

사시사철 계절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한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유독 문인들에겐 하나의 계절이 더 있는 것 같다. 굳이 지칭하자면 다섯 번째의 계절1)이랄까? 신춘문예가 바로 그것이다. 등단한 지 수년이 지났건만 신춘문예를 맞이하는 기분은 늘 새롭다. 이 신춘문예를 관통해야만, 비로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신년을 맞이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무래도 고질병이 된 듯싶다.

이것은 문인이라면 누구나 느낄 공감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공감은 꽤나 역사가 깊다. 현상공모를 통해 신진 문인을 맞이하는 전통은 근대문학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춘문예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현상문예는 1910년대 잡지 청춘에서 시작되었다. 이 땅에 등장한 첫 번째 현상문예는 최남선과 이광수라는 걸출한 두 작가의 명성에 힘입어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형식을 갖춘 신춘문예의 보다 직접적인 모델은 1920매일신보신년문예모집이다. 여기에 더해 동아일보조선일보가 각각 1924년과 1927년 신년 문예공모를 제도화하면서,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는 것이 문인이 되는 보편적인 절차로서 인식되기 시작된 것이다. 이후 신춘문예는 1930년대부터는 신문의 대표적인 연간 문화행사로 완전히 자리 잡았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다.2)

모든 글쟁이의 통과의례인 만큼 매년 12월에서 1월 초는 글을 쓰는 모든 이에게는 가장 큰 축제이자 힘든 고뇌의 시간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이든 지인이든, 가까운 누군가의 등단을 안타깝게 기대하는 시간이며 또한 누군가의 당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만큼 그늘도 크다.

중앙지와 지방지를 포함해 20여 개의 신문사가 신춘문예를 주관하는 만큼, 매년 11일이면 많은 수의 신진작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압도적인 숫자의 문청들이 낙선의 슬픔을 맞이하는 시기 역시 바로 이 때라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가장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선물하는 신춘문예의 계절이야말로 문인들이 느끼는 또 다른 환절기가 아닐까 싶다.

20201월 신춘문예에서도 각자의 문체와 문학적 지향을 지닌 여러 신인작가들이 등장하였다. 본래 신인작가에게 거는 기대란 장밋빛 미래가 아닌 불확실한 가능성에 대한 미사여구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작가들의 등단작을 읽는 묘미는 상당하다. 평론가로서의 소임보다는 문청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돌아가, 이번 환절기에 나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준 두 편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료1. 전미경의 「균열 아카이브즈」 일러스트. 출처: 「서울신문」
자료1. 전미경의 「균열 아카이브즈」 일러스트. 출처: 「서울신문」

살라는 잠시 관객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버튼을 눌렀다. 살라가 버튼을 누름으로써 그녀의 월급에 작은 수당이 더해질 수 있다. 그것은 휴대폰 벨소리를 재생하는 역할이었다.

 

관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지춤을 뒤졌다. 휴대폰을 보관하고 온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을 소지하고 온 관객들은 황급히 휴대폰을 끄거나, 정말로 꺼졌는지를 확인했다. 초대석에 앉은 어떤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살라는 그 남성관객의 옆모습을 얼핏 목격할 수 있었다. 찡그린 것 같았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았고, 남자가 다시 앉기도 전에 홀 내부의 조명들이 어두워졌다. 이윽고 카라얀이 입장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박수소리를 들으며 살라는 파이프를 떠올렸다. 집의 수도관들은 지금쯤 단단히 얼었을까? 균열처럼 연속되는 성에들이 물을 막고 있을까? 카라얀은 박수를 갈무리하고 뒤돌았다. 그리고 지휘봉을 치켜들었다.

- 전미경의 균열 아카이브즈

 

전미경의 균열 아카이브즈는 공연장에서 어셔(안내원)로 일하는 살라를 주인공으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그로 인한 균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살라는 어셔로서 상당한 경력을 지녔고, 그에 따라 공연장의 질서를 유지하는 여러 가지 관행을 충실하게 따르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데 최상의 공연을 위한 그 관행적인 질서가 가진 폭력성은 뜻밖에 저항 앞에서 폭로된다. 그것은 곧 그녀의 삶 전체를 흔든다.

시작은 평범했다. 마에스트로인 카라얀의 마지막 지휘를 보러온 수많은 관객들을 입장시키고, 최상의 공연을 위한 마지막 점검으로써 공연 직전 휴대폰 벨소리를 임의로 내는 일련의 과정을 수행했던 수인. 그것은 초대석에 앉은 한 남자의 분노와 항의를 유발한다.

클래식뿐만 아니라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공연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공연 시작 전에 울리는 벨소리와 휴대폰을 점검할 것을 요구하는 어셔들의 안내, 그리고 자신의 휴대폰을 점검하는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 이 작품은 이처럼 일종의 관행처럼 익숙한 과정들이 가진 의외의 폭력성을 문제 삼는다.

하지만 더 큰 폭력은 그 이후에 발생한다. 관행은 시스템이 만들었지만, 그 관행에 따른 책임은 오롯이 한 개인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관객과의 마찰은 시스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저 살라 단 한 사람만을 자신의 업무로부터 배제되게 만든다.

 

공연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살라는 알 수 있었다. 어떤 일은 관성처럼 작용했다. 관객들의 발소리나 웅성거림 외에도 그녀가 공연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치릴 방법은 많았다. 겉옷과 소지품을 맡긴 관객들이 오케스트라 홀로, 독주회 홀로 입장했고 잠시 후 단발성적인 소란이 홀을 뒤덮었다. 어셔 중 하나가 벨소리를 재생했으리라.

- 전미경의 균열 아카이브즈

 

살라가 없이도 공연장은 여전히 정해진 관행대로 이어진다. 주어진 업무로서의 관행에 따랐다는 이유로 살라는 무조건적인 사과와 책임을 요구받지만, 공연장은 여전히 또 다른 살라들에 의해 관행을 유지한다. 균열의 아카이브는 그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그 폭력성을 감춘 채 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마찰이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관행은 지속되고, 거기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는 가장 약한 자에게 전가될 뿐이다.

그리하여 소설가 전미경은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고집스럽게 일상이라는 이름의 관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자료2. 김수영의 「종이집」 일러스트. 출처: 『조선일보』
자료2. 김수영의 「종이집」 일러스트. 출처: 『조선일보』

시스템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신춘문예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어쩌면 그것은 필연적인 문제의식일지도 모른다. 등단을 준비하면서 문청들이 겪는 실질적인 현실의 문제들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62세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젊은 감각을 선보인 김수영의 종이집, 전미경의 균열 아카이브즈와는 다른 각도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타자로서의 청년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이라고? 수인은 본 적도, 살아 본 적도, 가져 본 적도 없는 집이었다. 이런 집을 접을 수 있을까. 브이로그 종이집을 오픈하고 육 개월 만의 마수걸이인 데다 무려 다섯 채였다. 두 달치 월세와 맞먹는 이십만 원을 마다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루에 종이집을 한 채씩 납품하는 조건이었다.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수인은 앞뒤 재지 말고 덤벼보기로 했다. 선금을 넣으라는 조항을 넣어 주문확인 댓글을 달았고, 별도의 문자메시지도 보냈다.

-김수영의 종이집

 

종이집의 주인공 수인의 삶은 모순적이다. ‘자리가 붙은 집들이 즐비하게 매물로 나와 있는 승리부동산에서 일하지만, 2.5평짜리 쪽방만이 유일한 거처인 삶이다. 수인에게 종이집은 가져보지 못한 동경을 실현하는 유일한 위안이다.

브이로그를 연재하고, 익명의 친구 마리를 만나면서 수인의 삶 역시 좀 더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순간부터 말을 하지 못하며 의도하지 않은 침묵으로 살아가는 수인에게 접기 마니아들의 아지트인 집사모는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이라는 주문은 오히려 그 작은 위안이 얼마나 찰나적인 것이었는지 폭로한다. 단 한 번도 온전한 제 집을 갖지 못한 수인에게 집은 상상으로도 가져보지 못한 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져본 유일한 집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컨테이너였고, 그곳 역시 지금의 집처럼 단 한순간도 힐링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수걸이 주문마저 다른 회원에게 빼앗긴 수인에게 남은 것은, 여전히 작은 위안으로서의 종이집뿐이다. 그러나 파국은 예상보다 빠르게 드러난다. 종이집에 매달릴수록 수인의 삶은 현실의 집에서, 그리고 동경하던 힐링으로부터 더 빠르게 뒤로 물러나버리기 때문이다.

 

컨테이너가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수인도 나자빠졌다. 바닥에 쌓여 있던 종이집이 무너져 내렸다. 쪽방 문이 위에서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깔린 쪽창도 찢기고 떨어졌다. 수인은 움츠린 자세 그대로 한참을 꼼짝도 못 했다.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을 가슴에 안았다. 고개를 앞으로 접었다. 허리를 접고, 무릎을 접었다. 천천히 종이집 속으로 들어갔다.

-김수영의 종이집

 

 

오늘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일상이란 무엇인가? 마음 편히 두 다리를 뻗을 집은 고사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일조차 요원한 오늘날, 소외는 그들이 마주치는 일상 그 자체가 된 지 오래다. 지독한 외로움과 고립이라는 말은 우리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매일 마주치는 현실이 되었다. 고독은 더 이상 고도의 사색이 필요치 않은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 그것을 비트는 데서 문학의 새로움은 시작된다. 그리고 신춘문예 등단작들은 그 첨병에 선 작품들인 경우가 많다. 등단제도를 둘러싼 여러 가지 비판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가 여전히 문학적 긴장을 새롭게 야기하는 통로로 인식되게 만드는 힘 역시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것이야말로 여전히 많은 이들이 신춘문예라는 환절기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참고문헌-

1) 만화가 한승원의 다섯 번째의 계절에서 차용함.

2) 이에 대해서는 정영진의 등단제도의 정착 과정과 근대문단의 형성 연구(인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를 참조하였음.

 

: 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문학/문화평론가. 인천문화재단 이사. 계간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고, 현재는 문학연구를 토대로 문화연구와 비평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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