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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알모도바르 감독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어머니 - <페인 앤 글로리>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알모도바르 감독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어머니 - <페인 앤 글로리>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0.01.28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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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페인 앤 글로리>(Dolor y gloria, Pain and Glory)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로 쓴 자서전’이다. 알모도바르는 자전적인 이야기인 이 영화를 “70년을 살아온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감독의 생애와 예술관이 압축돼 있는 작품인 것이다. 알모도바르는 <귀향>,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와 같은 작품을 통해 욕망, 광기, 집착 등 인간의 본능을 강렬한 담아왔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는 다소 관조적인 시선으로 삶과 영화, 예술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 등을 탐구한다.

<페인 앤 글로리>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생애를 사실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영화에서 살바도르 말로의 집은 알모도바르 감독이 실제 거주하는 아파트이며, 스튜디오 촬영 때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아파트에서 그림과 소품을 가져가 꾸미기도 했다.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은발 헤어스타일을 표현하는 것은 물론 감독의 옷과 신발들을 직접 착용해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했다고 전해진다.

<페인 앤 글로리>는 제목 그대로 고통과 영광의 기록이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영광은 고통의 결과물이다. 영광 없는 고통은 있을 수 있지만, 고통 없는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영화가 도입부에 살바도르의 질병을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배경이다. 살바도르기 지니고 잇는 허리, 어깨, 위장과 같은 육체의 병부터 정신적인 질병인 우울증까지 자세하게 알려준다. 살바도르가 누리는 감독으로서의 영광은 이러한 고통과 함께한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상식적인 교훈을 전하고자 했다면 굳이 이 영화를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페인 앤 글로리>의 주제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개인이나, 시대, 사건의 비밀을 파헤쳐 충격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페인 앤 글로리>는 적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거장의 손길이 느껴지는 정교하고 자연스러운 연출, 치밀한 시나리오, 무엇보다 진솔한 자기고백 때문일 것이다. 살바도르는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우울증, 배우와의 갈등, 강렬하지만 숨겨야 했던 첫사랑, 헤로인 복용과 같은 파란만장한 삶의 행로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러고 나서 최초의 순간, 최초의 인물에게로 돌아간다.

<페인 앤 글로리>는 시간과 기억에 관한 영화이다. 폐허의 삶을 살던 살바도르는 32년 만에 자신의 영화를 보고, 당시 출연배우와 함께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기로 한다. 이 이벤트는 무산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살바도르는 자신의 삶과 옛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살바도르는 세월의 축적과 고통의 응축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마침내 어린 시절 그리고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흥미로운 점은, <페인 앤 글로리>가 현재와 과거, 현실과 영화를 조립하는 방식이다. 주로 어린 시절을 담아낸 영화가 현실처럼 느껴지고, 그로 인해 현실과 예술은 하나가 된다. 고통과 영광의 관계가 그러하듯, 현실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다. 과거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살바도르가 어린 시절 동굴 집에서 자신의 책 읽는 모습을 그린 석공의 그림을 찾아 나선 행동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페인 앤 글로리>는 정교하게 조직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론 혹은 예술론이기도 한 셈이다.

<페인 앤 글로리>는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살바도르와 가난한 어머니는 여러 차례 갈등을 겪는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수도원에 보내려고 하고, 아들은 신부가 되기 싫다며 거부한다. 아들은 대합실 의자에 누워서 도시에 가면 극장이 있느냐고 묻고, 어머니는 집을 이야기한다. 또한 어머니는 영화감독인 아들이 고향 사람들 이야기를 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아들은 기어이 나고 자란 고향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나 살바도르에게 어머니는 결국 영화(예술)의 기원이다. 병실 장면을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고 자세하게 묘사한 이유일 것이다.

 

<페인 앤 글로리>의 서사는 세 개의 층위로 구성돼 있다. 영화로 표현된 과거, 어머니와의 에피소드, 현재의 육체적‧정신적 고통과 갈등의 해소이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복잡한 스토리를 석공, 배우, 첫사랑을 등장시켜 현재와 과거, 현실과 영화를 넘나들며 직조해낸다. <페인 앤 글로리>에는 알모도바르 영화임을 직감할 수 있는 특유의 강렬한 색채미가 여전히 배어있다. 인물의 의상이나 그림, 소품을 통해 표현되는 감각적인 색채감과 기하학적인 구도는 <페인 앤 글로리>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페인 앤 글로리>는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으며, 살바도르 몰리를 연기한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제92회 아카데미영화상 남우주연상,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페인 앤 글로리>는 거장 감독의 능수능란한 솜씨를 통해 그의 삶과 예술관을 다시 음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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