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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의 문화톡톡] 자기계발 담론과 골드미스로맨스
[이정옥의 문화톡톡] 자기계발 담론과 골드미스로맨스
  • 이정옥(문화평론가)
  • 승인 2020.01.2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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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미스가 로맨스에 미친 영향

한 시대 혹은 한 사회를 표상하는 유행어는 그 이전의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지시한다. 때문에 유행어는 기존의 정서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인식으로 유도하는 힘을 지닌다.

로맨스의 지형 변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유행어는 단연 골드미스(Gold Miss)’이다. 1990년대에 등장한 골드미스는 탄탄한 직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기계발에 투자하고 독신생활을 즐기는 30대 이상의 전문직 여성을 일컫는다.

이는 SWAN(Strong Women Achiever, No Spouse)을 한국식으로 번안한 것으로, 직역하면 백조처럼 우아하게 사는 성공한 독신녀. 그러나 골드미스는 최상의 신용카드 등급인 골드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 경제력을 앞세워 나이 들어 시집도 못가는 올드미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보상효과를 내포한다.

여성교육의 혜택과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골드미스는 할리퀸 로맨스의 여주인공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여성들이다. 할리퀸 로맨스의 여주인공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최상의 영웅으로 이상화한다거나, 독신주의를 외치면서도 운명적인 남자와의 결혼을 신봉하는 순진하고 순정적인 여성들이다.

반면, 골드미스들은 낭만적 사랑의 신화에 집착하지도 않을뿐더러 운명적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일을 쉽사리 버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커리어 우먼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시하며 경제적 독립과 성적 자유를 향유한다. 이런 점에서 골드미스는 그간 로맨스의 문법으로 굳건하게 유지됐던 단 한 명의 운명적인 남자와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는 낭만적 사랑의 신화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여성들이다.

자기계발 담론의 시대에 등장한 골드미스 로맨스’(1)는 남성과 여성 혹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 주체의 꿈과 욕망을 구현하고 소비하는 문화상품이다. 동시에 젠더와 인종,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정체성을 선택하고 수행하는 저항적 텍스트이다. 때문에 할리퀸 로맨스의 가치를 가부장적 결혼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보상심리나 저항심리로 파악했던 이분법적인 페미니즘으로는 골드미스 로맨스를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그 이전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로맨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골드미스는 어떻게 탄생했나

골드미스가 탄생한 1990년대는 자기계발의 광풍이 불던 시대였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모 재벌기업 회장의 선언은 당시 사회경제적인 위기를 자기계발의 담론으로 극복하려는 집단적 조급증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이런 현상은 그 이전부터 이미 세계적인 추세였다. 1980년대 초반부터 영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하게 혁신과 변화를 밀어붙였던 대처 수상의 개혁정책(대처리즘)이나 영화배우 출신 대통령답게 문화정치를 앞세워 미국의 경제 활성화를 도모했던 레이건의 경제정책(레이거노믹스)의 영향으로 정치와 경제, 문화가 결합된 자기계발 담론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던 것이다.

 

스티븐 코비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자기계발 담론은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개선하여 경쟁력 있는 노동주체, 기업가적 인간으로의 개조를 지향한다. 지식과 기술력 등의 외적인 역량뿐 아니라 신념과 가치관 등의 내면적인 역량을 겸비한 이 노동주체는 창출 가치가 존재 비용을 능가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이다. 문제는 기업가형 인간이 개인 차원의 노력으로는 쉽게 도달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은 개인의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경쟁력 있는 노동주체로 개조될 수 있다는 판타지를 안겨준 자기계발서의 고전이다. 이는 성공전략에 따라 목표와 계획을 설정한 다음 스스로 자기관리에 돌입하게 만드는 코칭프로그램형의 자기계발 모형이다.

1단계에서 참가자는 자기계발교에 입문한 신자처럼 그루인 스티븐 코비의 강연을 듣고 나태한 자신을 반성하고 성공 목표를 설정한 다음 성명서를 작성한다. 2단계에서는 7가지 성공전략에 따라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스스로 설계하고, 마지막 3단계에서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와 계획을 플래너에 기록하고 주기적으로 체크하며 자기계발의 의지를 강화한다. 이 자기계발 프로그램은 주로 기업체의 사원연수 필수코스로 채택됐지만, 점차 사회적 성공과 부를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중산층들도 합세했다.

자기계발 담론은 주로 중산층 남성을 겨냥했으나 이를 가장 열정적으로 소비한 주체는 여성들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마케팅, 판매, 상담, 패션, 문화산업 등 노동행위의 보상을 자기실적의 형태로 관리되는 직종에 종사했던 까닭이다.

 

오프라 윈프라

오프라 윈프리는 자기계발 담론의 성공신화를 일궈낸 대표적인 여성으로 손꼽힌다. 그녀는 가난하고 불행한 흑인 미혼모의 딸로 태어났음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방송인이자 세계 유일의 흑인 억만장자로 등극했다. 또한 여성과 소수민족, 방황하는 젊은 세대 등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기계발 담론을 확대시켰다.

독특하게도 자신의 TV프로그램을 두려움과 제약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원하는 목회활동으로 설정하고, 자기고백을 통해 화해와 평온을 찾게 만드는 멘토링 방식을 취했다. 흑인여성으로서 차별과 성폭력을 당한 자신의 아픈 과거를 서슴없이 공개하며 오랫동안 감정노동에 시달렸던 여성과 평범한 사람들의 슬픔을 치유하고 변화로 이끌어주는 멘토링 방식을 각자도생의 자기계발을 넘어선 친밀의 코드와 자립의 코드를 결합한 연대성의 자기계발 모형으로 발전시켰다.

1990년대 골드미스의 탄생은 여성교육과 페미니즘의 혜택, 자기계발 담론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골드미스는 여성교육과 페미니즘을 토대로 여성들의 평등권을 주장했던 페미니스트의 딸들이다. 이들은 엄마 세대들이 일궈낸 여성교육과 페미니즘의 혜택을 누리며 자랐지만, 가정과 일을 병행하며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엄마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를 보며 20대를 보낸 이들은 그녀를 가장 닮고 싶은 여성으로 손꼽으며 인생의 멘토로 삼았고, “여성이 의지할 것은 오직 건강하고 자립적인 자아라는 조언에 따라 자신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자립의 의지를 키워나간 자기계발 시대의 새로운 여성들이다.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이 와해되자 골드미스 판타지도 급속하게 사라졌다. 경제 질서의 개편을 통해 자유를 향한 소망이 실현될 것이라는 자기계발 담론은 실상 실업과, 불안정한 취업, 해고 위협의 공포로 내몰리는 신자유주의적 폭력구조의 합리화이며, 이 구조적 폭력이 자유로운 삶을 향한 개인의 의지를 크게 왜곡시켰다는 진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자기계발 담론의 시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급속하게 사라진 골드미스 로맨스는 여성들을 구속하는 억압구조가 가부장적 결혼제도가 아니라 경제 질서에 기초한 젠더무의식이라는 점, 가부장적 결혼제도는 젠더무의식 중 하나의 양상에 불과하다는 크나큰 교훈을 남겼다. 시대를 앞서 갔지만 화려하게 단명한 천재처럼, 골드미스 로맨스의 후광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골드미스의 로맨스, 낭만적 사랑의 균열과 자기고백적 성찰

<섹스 앤 더 시티>는 골드미스 로맨스의 원형이다. 사회적 성공과 경제력을 성취한 골드미스들은 자신의 자아와 행복을 추구하며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소비생활을 만끽한다. 따라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6년 동안 미국 HBO에서 방영된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는 화려한 볼거리와 과도한 섹슈얼리티를 결합하여 소비욕망과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문화상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여성들의 우정공동체를 중심으로 골드미스의 가치관과 생활 패턴, 즉 골드미스의 에토스와 아비투스를 성공적으로 포착한 대중문화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흥미롭게도 골드미스의 에토스와 아비투스가 수행되는 방식은 오프라 윈프리 토크쇼의 포맷과 유사하다. 패션잡지 기자이자 드라마 제목과 동일한 섹스 앤 더 시티란 칼럼을 연재하는 칼럼니스트 캐리는 뉴욕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결혼, 연애와 섹스 등에 관한 의견을 묻고 정리하는 화자이자 중심인물이다.

 

<섹스 앤 더 시티>

매회 에피소드는 캐리가 설정한 칼럼 주제를 중심으로 사랑과 결혼, 연애와 섹스에 대한 당대 여성들의 고민을 내레이션의 형식으로 풀어간다. 그 주제를 수행하는 주체는 캐리와 그 친구들인 여성공동체이지만 취재와 관찰의 형식을 통해 주제에 대한 관점이 다양하게 열려 있다. 또한 젠더와 인종, 섹슈얼리티 등 개인의 정체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섹스를 향유하며 개방성을 지향한다. 이와 더불어 드라마 밖에 위치한 시청자들을 향해 수시로 질문을 던지는 캐리의 대화방식은 시청자들을 적극적인 관찰자이자 참여자로 끌어들이는 열린 구조를 구성한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 그리고 섹슈얼리티는 섹스 앤 더 시티란 칼럼의 핵심 주제이자 네 명의 주인공들이 수행하는 골드미스의 에토스와 아비투스의 핵심 요소이다. 경제력 능력과 사회적 성공을 겸비한 이들은 사랑과 섹스에서 거침없고 당당하며, 백화점에서 쇼핑하듯 자신의 취향에 맞는 남자를 선택하고 소비한다. 그럼에도 확연하게 다른 개성을 통해 골드미스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샬롯은 낭만적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혀 결혼에 집착하며 섹슈얼리티에 다소 소극적인 보수주의자이다. 아만다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 여성의 삶을 망치는 주요인으로 간주하며 가부장적 결혼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레즈비언적인 성향과 흑인 남자와의 사랑을 즐기는 등 자기주장이 강한 페미니스트이다. 반면, 사만다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을 거부하고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이다. 스스로 섹스 칼럼니스트로 규정하는 캐리는 성적 욕망과 섹스에 개방적이라는 점에서 사만다와 유사하지만 운명적인 남자의 구원을 바라는 낭만주의자이다.

이처럼 여러 유형의 골드미스가 모인 우정공동체는 친밀성의 집단이다. 남자들과의 연애와 사랑보다 우정을 더 중시하는 이들은 정기적으로 최고급 식당과 클럽에서 브런치와 술자리를 즐기고, 남자들과의 데이트와 섹스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담소를 즐긴다. 또한 패션쇼와 미술관, 호텔 수영장과 야구장 등 화려하고 유행을 선도하는 문화공간을 누비며 우정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한다.

여성공동체의 유대를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담소는 신변잡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들의 대화방식은 친밀의 코드와 자립의 코드를 결합한 연대성의 자기계발을 추구한다. 때론 토론과 논쟁을 통해 사회비판적인 저항담론을 생산하고, 때론 각자 직면한 고민을 교환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극복해나가는 성장담론을 생산한다.

 

<섹스 앤 더 시티>

아이러니컬하게도 골드미스의 모순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사회적 성공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커리어 우먼이지만, 자신이 지향하는 상상의 나와 모순에 직면한 현실의 나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이중성에 직면한다.

연애보다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 사만다는 매력자본의 핵심인 젊고 아름다운 육체에 집착하며 나이 들어가는 올드미스로서의 자기 외모에 괴로워한다. 보수주의자 샬롯은 가정적이지 못한 남자와의 이혼, 이질적인 종교와 문화를 유지하는 유대인과의 재혼, 불임 등의 문제에 직면하며 완벽한 여성을 꿈꾸는 자신의 결벽증과 불안 심리를 자책한다.

페미니스트인 아만다는 사회적 성공과 결혼생활 사이에서 변호사로서의 커리어를 중시하지만, 여리고 섬세한 남편의 외도와 육아를 둘러싼 관습적인 성역할과 결혼제도에 부딪친다. 낭만주의자 캐리는 부자이자 남성성의 상징인 이라는 남자와의 운명적인 사랑과 결혼에 대한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수많은 남자들과 탐색적인 연애와 섹스를 즐기는 이중성을 괴로워하며, 신데렐라 컴플렉스의 상징인 구두페티시로 해소하는 자기모순을 성찰한다.

이처럼 골드미스 로맨스는 백조처럼 수면 위로는 우아한 자태를 취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쉬지 않고 발버둥 쳐야 하는 실존적 딜레마에 대한 자기 고백적이며 성찰적인 형식을 취한다. 골드미스의 로맨스가 티격태격 실랑이를 벌이는 두 남녀의 연애과정이 운명적 사랑으로 귀결되는 상큼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이다.

자기계발 담론의 시대에 등장한 골드미스 로맨스는 각 나라가 처한 정치와 경제, 문화적인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섹스 앤 더 시티>는 자기완성의 신화를 지향하는 미국적인 자기계발 담론의 문화상품이다. 이에 비해 대처리즘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정치에 대한 반발과 자기계발 담론에 대한 비판이 강했던 영국과, 자기계발 담론이 꽃피우기도 전에 IMF 경제위기가 불어 닥친 한국의 골드미스 로맨스는 또 어떻게 같고 다른지 상세한 비교가 필요하다.

 

(1) ‘골드미스 로맨스는 자기계발 담론의 시대에 경제력과 사회적인 성공을 실현한 골드미스의 사랑과 연애를 그린 새로운 지형의 로맨스를 지칭한다. 이는 1900년대에 등장한 대도시 직장 여성의 애환을 그린 칙릿(chic-lit)을 골드미스의 사랑과 연애에 초점 맞춰 로맨스 장르적 관점에서 포착한 용어이다.

 

사진 출처: 구글

 

참고문헌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최병두 옮김, 한울, 2007.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0.

앤 브룩스, 포스트페미니즘과 문화이론, 김명혜 옮김, 한나래, 2003.

에바 일루즈, 오프라 윈프리, 위대한 인생, 강주헌 옮김, Sb, 2006.

 

글: 이정옥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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