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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권의 문화톡톡]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들의 ‘페르소나’를 벗기다
[성일권의 문화톡톡]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들의 ‘페르소나’를 벗기다
  • 성일권(문화평론가)
  • 승인 2020.02.09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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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개의 머리를 가진 자화상, 1988-베르너 버트너

 

성일권 | 문화평론가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을 꿈꾸는 것일까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해 우리 삶이 순식간에 비상사태에 접어들자, 대다수는 공동체 수호를 위해 고통을 감수하며 나눔의 미덕을 실천하고 있지만, 한켠에서는 이 순간을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배덕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시민들은 이제나 저제나 조속한 신약개발을 고대하며 마스크 하나로 일상의 위태로움을 견디고 있는 마당에, ‘배덕의 정치세력은 마스크에 자신들의 실체를 가린 채 히죽거린다.

바이러스 감염증의 진원지인 중국 우한에 체류중인 교민의 송환을 위해 전세기를 보낼 때 중국에 지원할 마스크를 탑재한 것을 두고, 극우성향의 한 정당 지도자들은 지금 국내외 마스크가 동이 나고 가격이 치솟아 국민은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는데 중국에 마스크 300만장을 보내는 것이 합당하고 다급한 일인지 의문이며, “이는 중국에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심지어, 그들은 뼛속 깊이 박힌 중화사대주의를 벗어나기 바란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금세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미 앞서 130, 외교부는 마스크 지원에 대해 중국유학총교우회 및 중국우한대총문회 측에서 물품을 제공하는 것이며, “중국 우한으로 가는 교통편이 차단됐기 때문에 물품을 수송해주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라고 설명했음에도, 그들은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그들이 국내에 마스크가 동이 난 것처럼 말한 부분도 거짓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마스크 재고가 약 3천만개 있으며 하루 1천만 개 이상의 마스크를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이 역시 무시되었다. 정부는 병명에 대해 지리적 위치, 사람이름, 동물 또는 음식의 종, 문화, 인구, 산업 또는 직업 등을 피하라고 주문한 세계보건기구(WHO)의 지침에 따라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자한당은 우한 폐렴이라는 명칭을 의도적으로 쓰면서 중국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자한당은 2019년 예산에서 앞장서 저소득층을 위한 마스크 보급예산등 정부의 방역 및 검역 예산을 대폭 삭감해놓고서도 오히려 정부의 검역 관련 예산부족을 질타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배덕의 정치세력이 한마디 할 때 마다, 보수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하고, 태극기 부대는 광화문 거리에서 목청을 높인다. 보수 언론은 이미 공론장의 역할을 내팽기고 정치세력화한 지 오래고, 태극기 부대는 극우 종교 세력과 친일·숭미 독재 세력이 숙주역할을 해온 유사 정치집단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삶이 연극무대라면, 자신의 사익(私益)이나 자신들의 집단적 공익(共益)을 위해 코로나 바이러스를 반기는 이들의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신들이 주인공으로 득세한 연극이 실패로 끝났는데도 새로운 연극에서도 무작정 주인공을 맡아야겠다고 관객을 무시하며 대본을 제멋대로 뜯어고치려는 이들에게서 배덕자들의 악다구니를 보게 된다. 시민들은 얄팍한 마스크에 겨우 얼굴을 가린 채 바이러스 감염을 무릅쓰며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 시달리고, 값싼 식당,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고 있으나, ‘배덕의 세력은 공기청정기가 장착된 안락한 승용차에 앉아 그들만의 맛집을 다니며 반전의 기회를 도모한다. 이들은 방역예산을 사정없이 삭감한 게 선거를 앞두고 마음에 걸리는지 마스크 착용하는 를 벌인다. 시민들이야 학생 때는 민주화와 독재타도를 부르짖고, 노동현장에선 민주화를 주창하며 시위를 벌였던 전력 덕택에 훈련조교처럼 마스크를 맵시 있게 착용하지만, 마스크만 보면 테러리스트나 용공세력을 연상했던 그들의 마스크 차림은 어색하고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오죽하면 거꾸로 착용된 마스크가 인터넷에 웃음거리로 올라왔을까?

 

위선은 악덕과 부패의 시작

 

우리는 위선을 그다지 크게 위험하지 않은 악덕 중 하나라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지만, 위선은 그 어떤 악덕보다도 더 증오되어야 한다. 경험적으로 볼 때 위선은 악덕이며, 부패는 악덕을 통해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떠난 지 4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남긴 페르소나라는 화두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아렌트가 살았던 권위주의적 냉전 시대에선 국가 이데올로기의 폭력이 페르소나를 훼손하고 굴절시켰다면, 권력과 자본이 은밀하게 야합한 지금의 시대에는 소수 권력 간의 야합과 독점, 부패가 대다수 사람들에게 배제와 순종의 페르소나를 강요당하고 있다.(1)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한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의 무리와 재벌이 휘두른 폭력에 맞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 즉 페르소나를 지키기 위해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쓴 채 시위를 벌였다.

페르소나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배우가 연극 무대에서 얼굴을 가리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은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민으로서 갖는 페르소나는 은유적으로 시민으로서의 법적 인격을 의미한다. 그런데 독재정권이나 권위주의시대에는 우리의 시민적 페르소나가 망가짐으로써 법적 인격이 박탈되었고 그 주체마저 위협받았다.

시위자들은 시민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스스로 진실 가면을 쓴 채, 배덕자들의 페르소나, 위선 가면을 벗기려 했다. 여기에는 아렌트가 비판했던 아이히만식 사유의 불능을 거부한 채, 자발적 참여를 통해 공동의 선을 추구하려는 시민정신이 자리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이를 수호해야 할 사람들이 탈법과 불법을 자행하고서도 부끄러움을 전혀 모른다면, 그건 그들의 페르소나가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배덕자들의 가면을 벗기고 민낯을 드러내기 위해 시위에 나선 시민들 자신이 가면을 써야 하는 현실이었다. 권력과 자본은 자신들의 위선에 가려진 민낯을 지켜내기 위해 시위대의 민낯을 카메라로 체증하고 분석하고 가려냈다. 급기야 시위대의 시위와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을 문제 삼아, 경찰의 얼굴체증이 쉽지 않은 복면시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상정하기에 이른다. 화질 좋은 카메라의 줌업으로 시위대의 민낯을 제대로 체증하겠다는 의도였다. 시민들의 민낯은 권력의 민낯처럼 두텁지도, 뻔뻔스럽지도 않으며 양처럼 순하고 선하다.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로마 시민이라면 페르소나, 즉 법적 인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법이 그에게 공공 무대에서 그가 맡을 것으로 기대되는 역할을 부여하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 페르소나를 착용하지 않을 경우 권리와 의무를 갖지 않은, 예컨대 위선자나 노예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연극배우가 무대에서 사회영역의 모순을 대변하고자 배역에 맞는 페르소나를 착용하고 연기하듯, 시민들도 자신의 페르소나를 지키고 제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선 가면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이 시민들의 페르소나를 벗기려는 유혹에 사로잡혀 종종 법적 인격의 제약이나 폭력의 사용을 불사하지만, 그럴 때마다 시민들은 마스크를 끼고 저항하는 것이다.

현실 속의 배덕자들은 사회 공동체를 위해 좀처럼 희생을 자처하지 않는다.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진실성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배덕자들은 우리 사회의 행동규범이나 역할을 무너뜨리고, 우리 모두를 이성과 판단력이 마비된 심적 노예의 상태로 내몰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그들의 세치 혀 놀림에 우리가 잠시 혼미해진 사이에, 배덕자들은 기고만장하여 또 다른 악덕을 지속하며 우리 공동체의 파멸을 기다린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를 부추기는 그들의 거짓말이 행여 우리가 착용한 마스크의 틈새를 뚫고 전염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다. 우리의 마스크는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거쳐, 이젠 지구촌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를 극복하는 나눔의 가면이어야 한다. 과거 폭압적 권력을 움켜진 그들에 의해 잠시 잃어버린 우리의 페르소나를 찾는 길이다.

 

 

 

(1) 한나 아렌트, <혁명론>(홍원표 옮김,1962:2004, 한길사) p.148.

 

 

 

글: 성일권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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