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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문화톡톡]기록되고 기억 되어진 감정의 진폭-<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김희경의 문화톡톡]기록되고 기억 되어진 감정의 진폭-<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김희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0.03.2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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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진폭은 온전히 기록될 수 있을까.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에서 두 여인의 삼켜진 감정의 덩어리는 어느새 봉긋이 모습을 드러내고, 때론 작은 떨림으로 때론 뜨거운 갈망으로 서로에게 기록된다. 그리고 나아가 감정은 기록을 넘어선 기억이란 종착점에 도달한다. 영화는 감정의 어느 한 페이지마저 누락하지 않으려는 듯 증폭과 각인의 과정을 더듬어 간다.

 

 

희열과 고뇌로 드러나는 삼켜진 감정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2015)을 연상시킨다. 퀴어 영화라는 점에서 유사할 뿐 아니라 영화가 두 여인이 상대를 응시하고 서로의 심연에 닿기까지의 감정의 층위는 비슷한 형태를 띤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영화적 장치도 닮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선 그림, <캐롤>에선 사진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원치 않는 결혼을 위해 보내질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를 몰래 그리기 시작한다. <캐롤>에선 테레즈(루니 마라)가 캐롤(케이트 블란쳇)을 틈틈이 찍는 쇼트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두 영화에서 그림과 사진으로 궁극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대상의 이미지화가 아니다. 먼저 그림과 사진의 대상을 포착하는 순간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희열과 치열한 고민으로 침전되어 있던 감정의 선이 드러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선 카메라가 철저히 마리안느의 시선에서 엘로이즈를 비추며 마리안느의 희열과 고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함께 처음 산책길에 오르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엘로이즈의 얼굴을 곧장 보여주지 않는다. 긴 망토를 입고 있는 뒷모습으로부터 시작해 그 망토의 모자가 벗겨져 노오란 머리카락을 비출 뿐이다.

마침내 엘로이즈의 정면 얼굴이 나오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다. 마리안느는 또 다시 엘로이즈의 빠른 걸음을 뒤쫓아 가며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이때 마리안느의 얼굴은 그녀의 얼굴을 담으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카메라는 또 엘로이즈의 얼굴 전체를 관객들에게 노출시키지 않는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쇼트에서 마치 카메라는 마리안느가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마리안느의 옆모습을 비춘다. 그러다 마리안느가 몰래 엘로이즈를 바라보면 마리안느 얼굴에 가려져 있던 엘로이즈의 얼굴이 살짝 드러난다. 이 조차 참시,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쳐다보면 마리안느는 그녀가 눈치 챌까봐 곧장 고개를 돌린다. 그리하여 영화 밖 관객은 영화 시작부터 엘로이즈를 갈망하는 마리안느의 시선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의 그림은 <캐롤>에서의 사진과 다소 차이가 있다. <캐롤>에서 테레즈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캐롤을 사진을 자주 찍긴 하지만 그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지진 않는다. 대신 테레즈에 비해 화려해 보이는 캐롤에게서 보이지 않는 고독, 그럼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인정하려는 강인함이 사진으로 단숨에 부각시키는 방법을 취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그림은 대상을 제대로 응시하고 표면을 넘어선 내면의 감정까지 기록하는 법을 보여주는 장치로도 활용된다. 영화에서 마리안느가 몰래 엘로이즈를 관찰하며 가까스로 완성된 그림은 마리안느의 손에 의해 폐기된다. 그것은 엘로이즈가 자신과 초상화가 닮지 않았다며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생긴 일이다. 그 첫 번째 그림은 엘로이즈 어머니의 초상화처럼 지극히 타인에게 거부되지 않기 위한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리안느의 시선은 엘로이즈를 갈망하지만, 그 갈망은 마리안느 자신에게 고스란히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엘로이즈의 얼굴을 훔쳐보는 것에 급급할 뿐이다. 그림 역시 기존의 관습을 답습한, 엘로이즈만이 가진 생명력과 그 안에 깃든 고독을 그려내지 못한 채 완성된다. 하지만 엘로이즈의 도발적인 지적에 마리안느는 진정으로 대상을 응시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두 번째 그림은 마리안느의 일방적 시선이 아닌 두 여인의 시선 교환으로 탄생한다. 마리안느는 자신이 엘로이즈를 전부 간파했다는 듯이 엘로이즈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얘기한다. 그러나 영화는 마리안느를 엘로이즈의 자리에 서게 하는 장면으로 이전의 일방적 시선 자체를 한번에 전복시킨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자신의 위치에 오게 한 후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말하며 그림이 두 여인의 감정과 시선이 뒤섞여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영화 밖 관객 역시 카메라를 통해 엘로이즈를 바라보기만 한다고 여겼지만, 실은 엘로이즈 역시 하나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상호 작용을 하고 있었음을 인지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불안, 불안을 넘어선 강인함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캐롤>의 여인들 사이엔 하나의 긴장감이 지속적으로 맴돈다. 상대의 죽음에 대한 공포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처음 만난 날, 엘로이즈는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절벽을 향해 질주한다. 엘로이즈의 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하녀로부터 전해들은 마리안느는 엘로이즈 역시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내심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엘로이즈를 막기 위해 마리안느도 힘껏 뛰어간다. 멈춰선 엘로이즈가 이 순간을 꿈꿔왔다고 하자 죽음이요?”라고 묻는 것은 처음부터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 대해 일종의 불안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달리기요라고 말하는데, 이를 통해 영화는 한번 관객들의 긴장을 풀어주면서도 죽음에 대한 불안을 끝까지 기저에 끌고 간다. <캐롤>에선 테레즈가 캐롤과 여행을 떠나고 우연히 캐롤의 가방에서 총을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테레즈는 총을 발견한 후 불안을 느껴 같이 방을 쓰겠다고 한다. 영화는 이를 여행 초기에 배치하여 두 여인의 여행이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영화 속 이 죽음에 대한 불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이들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시선을 표상하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는 엘로이즈, 남편으로부터 정체성을 공격당하며 양육권까지 박탈 당할 위기에 처한 캐롤. 두 여인이 스스로 온전히 자신일 수 없게 만드는 사회와 주변 환경은 계속해서 죽음의 가능성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두 영화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드러내더라도, 죽음 자체로 끝맺음을 하지 않는다. 각 인물들의 강인함은 타인의 시선을 뛰어넘는다. 서로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발견과 감정을 직시하는 법을 배워가며 스스로를 지켜 간다.

 

연대하여 기억된 감정

두 작품에서 모두 감정을 온전히 기록하고 나아가 기억하는 것엔 연대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하녀가 함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일을 돕는다. 낙태를 하려는 하녀에게 어떤 추궁도 하지 않고 돕는 과정에서 이들은 하나의 공조를 이룬다. 하녀 역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웃는 표정을 포착하지 못할 때, 엘로이즈를 웃게 해야 한다는 조언으로 서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캐롤>에선 캐롤의 전 여인이 이들의 여행과 연결을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클로징은 시대적 제약에도 그들의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응집하여 기억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엘로이즈가 비발디의 사계여름을 들으며 서서히 눈물 짓더니 격정적인 울음을 터뜨리는데, 이는 마리안느와의 감정이 완벽하게 기억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얼굴엔 울음만이 아닌 미소가 옅게 깔려 있으니 말이다.

 

*사진출처:네이버영화



글:김희경(문화평론가)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정책 및 기획 박사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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