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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크리티크] 실화(true story)를 탈주시키는 방법 - 영화 <라라걸>-
[지승학의 시네마크리티크] 실화(true story)를 탈주시키는 방법 - 영화 <라라걸>-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0.04.2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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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배우 겸 감독인 레이첼 그리피스의 <라라걸>은 실존 인물인 미셀 페인(테레사 팔머)의 인간승리를 담고 있지만 오히려 이 영화에서 눈이 가는 부분은 영화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 그러니까 ‘영화적 서사’와 ‘실제의 사건’ 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절대경계를 탈주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실제 이야기를 다룰 때는 대개 당시 상황과 절대적으로 닮으려 노력하거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기 마련인데 <라라걸>은 이도저도 아닌, 어떤 제3의 방식에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라라걸>의 주인공 미셀 페인은 ‘멜버른 컵’이라고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승마경기에 과감히 도전하여 우승까지 거머쥔 기수이다. 거기에 더해 그녀는 여성으로서 금녀의 벽을 허문 이 시대가 원하는 전형적인 인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녀가 극복해야할 난관과 고난, 그리고 결코 지치는 법이 없는 ‘인내심’은 늘 그렇듯 신화적 이야기로 그려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 모두는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 안 봐도 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우리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컵의 위상과 기수들에게 적용되는 룰 더 나아가 오스트레일리아 가족환경과 그 문화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매우 불친절하기까지 하다. 결과를 빤히 아는 인간승리의 이야기임에도 세부 사항이 너무 낯선 탓에 그 쉽다는 공감대 형성 마저 수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영화 속 미셀 페인의 오빠인 스티브 페인(스티브 페인)의 존재와 그를 활용하는 지점은 사뭇 흥미롭다. 극중 스티브 역은 실제 미셀 페인의 오빠인 스티브 페인 자신이 직접 맡아 열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비슷한 시도가 영화계에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동시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미셀 페인을 근간에 다룬 다는 점때문에 여기에는 조금 더 의미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극중 스티브 페인 역의 스티브 페인

사실 이 영화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실제 멜버른 컵 관련 TV 화면(경주로 선택 장면과 실제 우승하는 TV 속 화면)과 영화속 스티브의 모습이 중첩될 때라고 할 수 있다. 그 순간이 극적인 이유는 미셀페인의 성공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는 의미때문이라기 보다 미셀페인의 실제 이야기가 즉각적으로 영화밖으로 뛰쳐 나올 수 있게 된다는 점때문에 그렇다.

스티브로 인해 마련된 이 극적인 순간은 영화 서사와 실제 사건을 구별지을 수 없는 어리둥절한 영역, 소위 ‘결정불가능성’의 영역을 만들어 냄으로써 실화를 다른 차원에서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존에도, 예컨대 영화<더퀸>(2006)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식, 이를테면 실제 TV화면과 영화 속 장면을 연결하여 현실과 가상의 애매한 영역을 차용하는 영화는 많이 있었다. 이런 방법이 종종 사용되는 이유는, 사실로 여기기 힘든 순간을 사실로서 직시할 수 있게 한다는 점때문이다. 그렇다면 <라라걸>은 그런 결정불가능의 애매한 방식을 스티브라는 인물에 적용하여 서사 속에 감춰진 진실한 이야기를 직시하도록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적 서사’와 ‘실제의 사건’ 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절대경계를 탈주하는 흥미로운 방식이다. <라라걸>의 이 흥미로운 방식은 한 마디로 '스티브의 결정불가능성'을 기폭제로 삼아 서사라는 벽을 폭파시켜 인간승리의 실화(true story)를 탈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때 사실을 확인하는 이치와도 맞닿는다. 그러고보니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상황들이 꼭 이렇지 않은가. 너무도 많은 '실화'(true story)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휘몰아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걱정할 건 없다. 실화는 곧 탈주하기 마련이니까. 

 

#세계의리더 #압도적승리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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