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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현실을 고발하는 임권택식 인본주의 시선과 그 모순, <티켓>
[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현실을 고발하는 임권택식 인본주의 시선과 그 모순, <티켓>
  • 성진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0.05.0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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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티스 영화’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영화에 존재했던 유행 사이클 중 하나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러한 영화는 한 여성이 여러 사정으로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착취당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다방에서 이루어지던 성매매 행위를 말하는 용어를 제목으로 삼은 영화 <티켓>(임권택, 1986)도 호스티스 영화와 궤를 같이 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배우 김지미가 설립한 ‘지미필름’의 첫 작품이기도 한데, 김지미는 속초에 머물면서 우연히 목격한 여성들의 현실에 충격을 받아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해보고자 하는 목표에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힌바 있다. 다방연합회는 이 영화가 다방 주인들을 포주로, 종업원들을 창녀로 오해하도록 만든다는 이유로 고발하였는데, 이러한 고발이 무색하게 이 영화는 티켓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집한 실제 이야기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강원도 속초의 티켓 다방인 ‘조향다방’이다. 영화는 ‘원주 직업소개소’ 에 민지숙(김지미)이 들어서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화투를 치며 모여 있던 여성들을 유심히 보던 지숙은 그들 사이에서 미스 양(안소영), 미스 홍(이혜영), 세영(전세영)을 불러내고, 세 여성이 기쁜 듯이 짐을 들고 지숙을 따른다. 조향다방에는 미스 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향다방의 사장인 지숙과 미스 주, 미스 양, 미스 홍, 그리고 세영, 이 다섯 여성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다섯 인물의 삶과 경험을 두루 보여주는 이 영화는 르포르타주적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의 중심이 되는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섯 여자 중 가장 어린 세영의 이야기가 그것인데, 가난한 가족을 위한 티켓 다방에서 일을 하는 세영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아직 그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채 괴로워하다가 점점 적응해가는 변화를 보인다. 세영의 변화는 이미 다른 네 여자들이 겪었을 법한 경험을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그녀들의 거울 이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말미에 세영을 떠나려는 남자친구를 설득하고, 분노하는 지숙의 행위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만하다.

 

지숙은 “손바닥만 한 이곳에 다방이 70개”라면서 열심히 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티켓 다방 사업은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 시장인 셈이다. 영화가 시작과 함께 보여주었던 직업소개소에 모인 많은 여자들의 모습은 그 사실에 대한 시각적 증거이기도 하다. 직업소개소에 들어선 지숙은 마치 상점의 물건을 고르듯 여자들을 고르고, 직업소개소에 모인 여자들은 그녀에게 선택을 받기위해 기대에 찬 눈빛을 지숙에게 보낸다. 그리고 남은 여자들은 미스 양, 미스 홍, 세영, 세 여자가 떠나는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한다. 티켓 다방, 즉 매춘을 하는 직업을 갖게 된 여자들을 부러워해야 하는 것이 그녀들이 놓은 삶인 것이다. 여성의 성을 사고 파는 매매춘의 한 형태인 티켓 다방 사업이 이처럼 성황이라는 사실은, 여성을 착취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의 인권이 나락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락에 있는 삶이 과연 존중을 받을 수 있을까? “현실보다는 많이 순화된 내용으로 엮여져”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임권택 감독의 절제된 연출로 인해 그녀들이 겪는 폭행과 성착취가 선정적이고 노골적으로 묘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인물이 겪는 온갖 상황은 그녀들의 처지를 이해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잠든 사이 여관비까지 떠넘기고 도망친 손님, 영화에 출연시켜주겠다며 거짓으로 속인 유명 배우, 단골 선장의 배가 폭풍에 난파되었다는 이유로 재수가 없다고 손님이 끊기는 상황, 성병을 옮겼다며 무턱대고 폭행하는 남자, 속옷 한 장을 사려고 잠깐 자리를 비우거나 배달 시간에 20분만 늦어도 그 시간에 대해 돈을 물어내야 하는 노예와 같은 계약 관계 등, 그녀들은 어떤 보호 장치도 없이 사회의 모든 폭력과 착취를 맨 몸으로 견뎌내야 한다. 그녀들이 견뎌야 하는 건 낯선 손님뿐만이 아니다. 그녀들을 그 곳으로 내몬 가족과 애인은 떼어낼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더 큰 족쇄다. 가족들에게 서울에서 큰 회사를 다닌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세영은 가족의 생활비는 물론 아버지의 환갑잔치 비용에 장애를 가진 오빠의 결혼 자금을 책임져야 한다. 미스 홍을 찾아 갑작스레 조향 다방에 나타난 노모는 어차피 살 가망은 없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한약이라도 해 줘서 원 없이 보내겠다며 돈을 달라고 한다. 그 가족들에게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가난하고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딸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일 것이다. 영화 <티켓>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에서 이와 같은 착취를 견뎌내야 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고발하고자 하는데, 이 영화가 그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을, 심지어는 다섯 명의 여자를 사실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영화 속 남자들조차 악의의 시선으로 그리지 않는다. 영화가 견지하는 이와 같은 재현의 시선은 선악의 이분법으로 상황을 단순화시키는 위험을 피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상황이 마치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것인 냥 보이게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나쁜 남자는 세영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면서도 세영의 타락을 욕하는 남자친구인 민수와 자신의 옥바라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티켓 다방 일에 뛰어들고 결국은 스스로 남편에게 되돌아가기를 포기한 지숙에게 추문과 비행을 언급하며 자신을 찾지 말라고 통보하는 지숙의 전 남편이다. 이 둘은 각각 대학생과 시인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지식인들이다. 영화는 이 두 인물을 통해 현실의 진짜 문제를 직시하지 않은 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위선 속에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엘리트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 두 인물은 지숙과 세영이라는 두 주인공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직접적인 상처를 남김으로써, 다섯 주인공들에게 감정 이입된 관객이 공분을 쏟아낼 수 있는 대상의 역할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들이 조향 다방이 있는 속초라는 영화적 배경의 바깥세상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영화의 현실 고발이라는 목적을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더불어 제유적으로 선택되었을 법한 속초라는 지방의 항구 도시와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비추는 카메라 시선은 종종 그 현실의 폭력성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피로를 푸는 뱃사람들과 티켓 다방 여자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는 선술집을 비추는 따뜻한 조명과 부드러운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가끔씩 삽입되는 잔잔한 바다나 흔들리는 배의 모습, 미스 홍의 돈을 떼먹고 도망갔다가 미스 홍에게 잡혀 머리에 하이힐을 맞고 경찰에 신고한 어수룩한 남자, 막내 세영과 선장의 관계 등은 분명히 그녀들을 착취하고 있는 일상의 폭력성을 순간순간 무효화시켜 버린다. 이 영화가 티켓 다방의 존재를 드러내고 거기서 일하는 여성들이 처한 처지와 그들이 겪는 폭력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 흔들림 없이 여자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이 영화의 가치다. 또한 영화가 사회 고발을 위해 모든 폭력적인 상황을 ‘날 것 그대로’라는 변명 하에 선정적인 방식으로 전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영화 <티켓>의 절제된 연출은 이 영화의 분명한 미덕이다. 그러나 관객의 눈앞에 모든 폭력을 전시하지 않고도 인물의 고통과 그 원인이 되는 사회적 문제나 착취의 구조를 관객들에게 날카롭게 전해줄 수 있는 시청각적이고 서사적인 영화적 수단은 무궁무진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티켓>은 소위 말하는 임권택식 인본주의적 시선, 모든 사람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낭만주의적 사회고발의 카메라 시선에 존재하는 모순을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성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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