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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병국의 문화톡톡]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0.06.15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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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하루하루 늘어가는 확진자의 수를 바라보며 약간의 불안을 느끼기는 하지만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자주 닦는 것과 비대면 수업을 통해 강의를 하는 것 이외에는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 씨가 강남역사거리 CCTV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을 때, 마음으로는 응원을 보냈지만 문제의 본질을 알지도 못한 채 그가 355일 만에 농성을 접었다는 말을 듣고 그저 잘 해결됐겠거니 생각할 따름이었다. 광주의 한 재활용업체에서 홀로 일하다 파쇄기에 끼여 숨진 김재순 씨나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김용균 씨에 대해서도 뉴스를 통해 접할 때만 잠깐 분노와 애도를 표하면서도 그 일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질 못했다.

시를 쓴다면서, 타인의 곁을 함께 지키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에 쓴 문화톡톡(방에 관한 단상)에서 보듯 나는 나를 원룸의 작은 공간에 두고 그 세계만을 영위하며 안일하게 살고 있는 셈이다. 장소를 잃은 존재들의 삶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면서 나만의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만이 세계의 전부인 듯 스스로의 초췌함을 들춰낼 따름이었다. 그것도 그것 나름으로 중요한 지점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동의합니다’를 입력하는 것 이외의 다른 행동들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면 앞으로는 달라질 것입니다, 같은 말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사적인 변명을 해본다.) 이는 홍은전 작가이자 인권기록활동가의 한겨레 6월 8일자 ‘[세상읽기] 차별이 저항이 되기까지’1)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부조리에 저항하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세계가 강제하는 불합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저항함으로써 보다 나은 쪽으로, ‘다르게’ 만들기 위해 저항하는 이들은 숭고하다. 그러나 숭고라는 측면에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과 나를 다른 층위의 존재로 놓게 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계를 바꾸는 일에 동참하기보다는 그들이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은연중에 깔려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물론 이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궤변일 수도 있다. 그들은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그저 세계의 문제를 나와 우리의 영역에서 실감하고 사유하며 행동하고자 하는 이들일 것이다. 진정한 ‘깨시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의 함의는 그 앞에 오는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에 걸려 있다. 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계에 저항하는 이유는 그로 인해 더는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획득한 민주주의와 2016년 겨울과 2017년 봄의 촛불항쟁을 통해 회복한 우리 일상의 안온함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비록 그것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요원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김소형 시인의 시를 경유해 보자.

 

사진출처_아침달 블로그
사진출처_아침달 블로그

 

그런 날이 있지. 하루 종일 하나의 빵만 떠올리는.

 

먹을 거 있어?

이거라도 괜찮다면.

 

가방 속에 넣어둔 포근하고 아름다운

빵.

 

출근길에 샀다가 종일 뒹굴고 퇴근길에 잊고 있던

버터 밀크바를 떠올리는 순간.

 

그에게는 오늘이 어떤 날이었을까. 짐승들은 좋았던 음식을 생각하며 하루를 살기도 한다는데. 손을 내밀고 온순한 눈망울을 그리다가

 

이게 뭐야?

다시 묻는 날.

 

너의 빵은 오늘 먼 우주를 돌아다녔나 보다. 고대의 화덕과 마음 구석에, 조상들의 버터 밀크바가 수없이 붙어 있을 거야. 뭉개진 행성 같은, 납작한 우리의 식사를 위해

 

기도하는 날.

 

여전히 달콤하고 빵이라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음식을 씹으며

 

내일 나도 이 모습일까?

너는 물었고

 

오전에 담은 빵 하나가 산산이 조각나고 그걸 꺼내 먹으면서 내일의 나는

 

삼키고 있겠지. 여전히 아름다운 풍미와 살을. 우리는 달라졌다는 걸 뚜렷하게 알면서.

- 김소형, 「버터 밀크바」(『좋은 곳에 갈 거예요』, 아침달, 2020.) 전문

 

아침 출근길에 산 빵을 퇴근하고서야 떠올린다. “포근하고 아름다운” 빵은 가방 속에서 “납작”해졌다. 그저 빵일 뿐인데, “하루 종일 하나의 빵만 떠올리는” 건 그 빵에 담긴 시간 때문일 것이다. 빵에 담긴 오늘 하루라는 시간에 대해 그는 “너의 빵은 오늘 먼 우주를 돌아다녔다 보다”라고 한다. 하루가 우주로 확장되고 다시 “납작한 우리의 식사”가 된다. 사실 별 것 아닌데, 이미 빵의 외형을 잃은 것인데 그럼에도 빵은 빵으로써 ‘우리의 식사’가 되어 “여전히 아름다운 풍미와 살을” 감각하게 한다.

일상을 지켜내는 일은 어렵다. 세계는 자신의 논리의 방식으로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권력과 폭력을 행사하여 우리를 억압한다. 그런 이유로 “산산이 조각”난 빵처럼 “내일 나도 이 모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의 또 다른 모습이어서 “아름다운 풍미와 살을” 지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루를 보내는 일은 먼 우주를 돌아다닌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그 시간의 층위가 우리를 납작하게 만들지라도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삼키며 또 하루의 층을, 또 하나의 우주를 “고대의 화덕과 마음 구석에” 놓을 것이다.

그렇게 쌓이는 하루하루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은 과거의 일이지만 가끔은 지붕을 무너뜨려요”(「좋은 곳에 갈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알게 모르게 쌓인 우리의 일상이 단단하게 고착된 세계에 역설적으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우리는 “좋은 곳에 대해 오래 이야기 나누고”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정말이지/ 이 시대는/ 나한테 할 말 없니?”(「미안하지도 않나」)라는 질문을 이끌고 그 대답을 듣도록 우리를 추동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가려고 하는 ‘좋은 곳’을 가능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을 단순히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만들고 있는 ‘좋은 곳’을 향한 노정에 무임승차하려는 (나와 같은) 이들의 기만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든다. 저 김용희 씨나 온갖 참사와 사회적 문제를 기억하고 이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하는 이들 주변에서 그들이 힘겹게 얻어낸 열매를 탈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기우일 뿐일까. 구현우의 시 한 편이 걱정을 덜어내 주진 못하더라도 나름의 대답을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새벽 다섯 시 수십 페이지를 대충 넘기는 것처럼 하늘은 검정에서 연보라가 되어간다. 너의 눈빛은 유순한 혐오와 지난한 감동으로 얼룩져 있다. 헤어진 우리가 무슨 면목으로 다음날을 기다리는 걸까.

 

너는 참 좋은 사람이야

 

플라타너스 아래서 버드나무 옆에서 기울어가는 새벽 다섯 시 오 분. 연보라는 파랑을 지나 붉은 파랑으로 물들고 있다.

 

앞으로 쭉 건강하면 좋겠어 / 최소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음날이 오면 아픈 그대로 늙어가겠지. 오늘의 에피소드는 밤의 한 페이지에 적히겠지만 다시 펼쳐볼 수는 없겠지.

 

새벽 여섯 시 많은 버스가 지나간다. 추워서 몸을 떠는 네게 따뜻한 말은 해주지 않는다. 이런 계절에도 매미가 운다. 그런 사정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문득 너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 좋다고 한다.

 

네가 그런 말을 할수록 나는 네가 싫어

 

벤치 위에서의 침묵은 해롭다, 고 마음에 적는다. 작고 큰 벌레들이 피부에 앉았다 달아난다.

 

마주보지 않는 새벽 오늘날의 명백한 아침을 인정하지 않는다. 같은 버스가 연달아 온다. 나는 네 못난 꼴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아마도 내가 말한다.

 

그러니까 너는 좋은 사람이란 거야

 

어쩌면 네가 대답한다. 괜찮을 리 없는 나의 그늘이 괜찮다고 믿어 완치가 불가능한 너의 그림자를 뜯어먹고 있다. 사이프러스 뒤에서 너는 겨울을 나는 그전 해의 겨울을 지나고 있다.

- 구현우, 「그러니까 좋은 사람」(『나의 9월은 너의 3월』, 문학동네, 2020.) 전문

사진출처_문학동네 홈페이지
사진출처_문학동네 홈페이지

‘좋은 곳’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방향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계를 향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 세계 속에서 일상을 지켜내고 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 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너는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며 “앞으로 쭉 건강하면 좋겠어 / 최소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듣는 (나와 같은) 이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네가 그런 말을 할수록 나는 네가 싫어”라며 그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거나 타자화한다. 그러나, “헤어진 우리”는 어쩌면 헤어질 수 없는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밤을 함께 보내고 아침을 맞는 ‘우리’. 비록 “추워서 몸을 떠는 네게 따뜻한 말은 해주지 않는” 나일지언정 정말 “네 못난 꼴을 보고 싶”기 때문에 밤을 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명백한 아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실로 ‘좋은 사람’이 만든 ‘좋은 곳’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채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일 테다. ‘너’를 의식하면서도 부지중에 외면하려는 ‘나’ 역시 “괜찮을 리 없는 나의 그늘이 괜찮다고 믿”고 싶은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이겠다.

‘좋은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그러니까 너는 좋은 사람이란 거야”. 이 말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이 당위적 언술은 ‘좋은 사람’이란 말에 책임과 의무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너를 절대적으로 환대하는 ‘우리’를 이끄는 말일 것이다.

중언부언하면서 이어온 이 글이 개인적 반성의 차원에서 구성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어떤 간절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을 나누든// 실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이 세계에서// 멀거나 가깝거나 같은 상처를 받는”(「진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너의 다정함이 나를 위험하게 만”들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역설적으로 “이곳에서만 가능한 회복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다정함과 위험을 모두 나누는 것, 그럼으로써 상처를 입고 회복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우리가 ‘좋은 곳’에 닿을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1) 홍은전, [세상읽기] 차별이 저항이 되기까지, <한겨레> 2020. 6. 8.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8414.html

 

 

 

글: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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