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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 칼럼] 저마다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서포터즈 칼럼] 저마다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 배수민(르디플러)
  • 승인 2020.08.1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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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디플러 1기=배수민] “그냥 올해는 없는 걸로 하고 내년에 다시 2020년 1월 1일부터 하는 건 어때?” 지난 1월, 우리나라에 코로나19 바이러스 첫 환자가 발생했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고자 개학과 개강이 연기되고, 사회를 움직이게 하던 많은 부분들이 멈추고,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혼란스러운 상황에 우스갯소리로 2020년 ‘리셋’을 주장해보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이 거짓말 같은 2020년은 어느새 절반을 지나쳐 7월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다.
 
시간이라는 것은 참 우습다. 사람들은 매일 똑같이 쉼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규정하고 구획하여 그것에 맞추어 살아간다. 여느 때와 같은 내일을 살아가지만 매년 달력에 적힌 연도는 바뀌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 한 순간일 뿐이지만 한 해가 다시 새롭게 설정되는 것으로 인간이 ‘정한’ 1월 1일을 마치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단체로 건망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1년이 지날 때마다 축하하고 또 축하한다.
 
시간은 절대적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24시간은 동일하고,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개인에게 달렸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불문율과 같은 명제 속에 갇혀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어왔고, 중고등학교 때는 단 1분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지하철과 버스에서 영어 단어를 외워야 했으며,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어정쩡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만들지 않기 위해 공강을 없애려고 온갖 경우의 수를 고려해 수업 시간표를 짰다.
 
그 결과, 우리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성실한 인간’의 틀에 점점 더 맞춰져 갔다. 이제 바쁜 일상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모두가 치열하게 달려가는 상황 속에서 나 혼자만 분주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의 무게는 더욱 더 무겁게 스스로를 짓눌렀다. 해야 하는 것들은 끝없이 존재하고 더 적은 시간 안에, 더 빠르게, 더 어린 나이에 그것들을 해냈다는 소식들은 계속해서 들려온다. 편히 숨쉴 틈조차 없이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나서도 성취감은 그때 뿐, 한숨 돌리고 나면 왜 더 잘 해내지 못했을까, 왜 이것밖에 못했을까, 왜 더 빨리 하지 못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간다. ‘무엇을’, ‘어떻게’, ‘왜’가 아닌 ‘얼마나’를 끊임없이 외치는 분위기 속에서 여유는 사치가 된다. 몇 년 전부터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으로, 크고 이루기 어려운 목표보다는 일상 속에서 작지만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일상과 그로부터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 말이 어쩐지 씁쓸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소확행을 원하게 된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것, 둘째, 당연히 누려야 할 행복을 이름까지 붙여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에 크기를 부여하는 것부터가 이치에 맞지는 않지만, 왜 우리는 스스로 작다고 여기는 행복을 추구하게 된 것일까. 과연 이게 정말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를 위한 어쩌면 그리 실용적이거나 합리적이지는 않을지도 모를 작은 소비를 하고, 한적한 카페에 앉아 노래를 듣거나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을 하는 일이 신조어까지 만들어가며 추구해야 할 일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Walden>, 1854

 

시간은 상대적이다. 시계 속의, 달력 속의 시간은 절대적일지 몰라도,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저마다 다르다. 흔히 ‘우물 속 개구리’라는 말을 한다. 좁은 우물 속에 갇혀 그 우물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시계 속 개구리’일지도 모른다. 작은 시계 속에 갇혀 그 시계의 시간만이 전부라는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고통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남들보다 몇 배 더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던, 다른 이들에 비해 늦게 시작했던, 일반적이지 않은 순서로 삶을 살아가던 전혀 중요치 않다. 누구나 각자에게 맞는 속도와 시간, 순서가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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