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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의 문화톡톡] 개인화 사회의 액체사랑
[이정옥의 문화톡톡] 개인화 사회의 액체사랑
  • 이정옥(문화평론가)
  • 승인 2020.08.24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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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문화 톡톡 | 이정옥(문화평론가)

 

낭만적 사랑과 액체사랑

 

로맨스는 낭만적 사랑을 기본값(정상성)으로 삼아온 사랑의 서사다. 낭만적 사랑은 첫눈에 불꽃과 같은 매혹에 사로잡힌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하여 평생토록 함께 하는 운명적 공동체를 추구한다. 따라서 낭만적 사랑의 서사는 사랑과 결혼을 결합한 연애결혼을 각본화 한다.

그간 연애결혼의 문화각본은 지루한 결혼의 일상을 소거한 채 가슴 설레는 연애감정만 부각시켜 왔다. 이로 인해 운명적인 만남에서 출발하여 우여곡절의 연애과정을 거쳐 혼인서약으로 끝나는 로맨스의 서사문법이 고착됐다. 로맨스의 서사와 소비문화를 결합시킨 각종 프러포즈 이벤트와 데이트 코스는 낭만적 사랑을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도록 기여해온 문화상품이다.

낭만적 사랑의 핵심은 단연 순결성이다. 사랑의 대상은 운명적인 그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에 매혹된 여성의 결여를 메꿔줄 수 있는 존재로 이상화된다. 그러기에 운명적인 그 남자에게 육체적 순결과 감정적 충만, 도덕적 미덕을 헌신함으로써 비로소 사랑에 빠진 여성 자신을 인정하는 역설을 통해 낭만적 사랑의 신화가 완성된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개인화된 세계로 접어든 지금, 낭만적 사랑의 서사는 유행이 한참 지난 올드패션이 됐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 이상 평생 함께 할 운명적 만남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랑과 열정은 은밀하게 즐겨야 한다는 도덕적 금기도 사라져, 순결성에 묶여 있던 섹슈얼리티는 연애감정과 무관하게 언제든 소비할 정도로 자유분방해졌다. 무엇보다 각자도생의 척박한 경쟁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절박한 생존전략은 연애나 결혼이 아니라 자아실현에 필요한 유형무형의 자산이다.

이런저런 연유로 로맨스의 바이블과 같은 낭만적 사랑의 위상이 흔들리니, 다채로운 사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능동적이고 우발적이지만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합류적 사랑, 사랑의 친밀성과 열정은 추구하되 현실적 거리를 유지하는 실용적 사랑, 감정적인 결속은 지키되 지리상 멀리 거주하거나 서로 다른 문화권자들이 함께 거주하는 장거리 사랑 등등. 구보다 가깝지만 연인은 아닌 모호한 관계의 썸은 이제 막 상장된 다채로운 사랑의 한 종목에 해당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낭만적 사랑을 대체하는 개인화 사회의 사랑을 통틀어 액체사랑(liquid love)이라 명명했다. 평생 한 사람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친족구성이 결락된 사랑은 물과 같이 견고하지 못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의 신화가 여성을 결혼과 가정에 구속시킨 남성 중심적인 사랑의 문화각본이었다는 점을 환기하면, 액체사랑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개인화 사회, 연애나 결혼보다 자아실현이 우선

 

바우만에 따르면, 개인화 사회는 개인에게 한없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실패의 책임은 온전히 개인에게 부과하는 사회다. 사회적 안정장치가 사라진 채 모든 것이 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들은 물 위를 떠다니는 부초처럼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각자 존재하고 홀로 소멸해 간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고체현대(solid modernity)와 액체현대(liquid modernity)의 이분법적 도식으로 개인화 사회를 설명한다. 전자가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안정적이라면, 후자는 모든 것이 우연적이고 예측이 불가능한 유동적인 사회다

그는 고체현대가 빠르게 액화된 원인을 1980년대에 등장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서 찾고 있다. 대량실업과 양극화로 인한 삶의 불안정성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소비주의가 극대화됨에 따라 전통과 공동체적 유대감, 생산자 중심의 생활방식 등이 무력화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화 사회는 상품을 소비하듯 무한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소비사회인 동시에, 금세 통장이 바닥난 파산자처럼 무한 책임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공포사회다.

이처럼 고체/액체라는 이분법적 도식은 1997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동을 간명하게 설명해준다. 서구와 달리 외환위기를 계기로 사회와 문화, 경제 등 모든 국면이 빠르게 신자유주의와 소비주의 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개인들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현재의 한국사회는 액체현대의 속성이 그대로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바우만은 고체/액체의 도식을 개인화 사회의 사랑 풍속도에 대한 분석 도구로 활용하여, 고체현대의 낭만적 사랑에 대비되는 액체현대의 사랑을 액체사랑으로 통칭한다. 낭만적 사랑의 핵심인 운명적 만남과 결혼, 다시 말해 여성의 헌신과 번식이 소거된 액체사랑은 오직 섹스욕구와 연애감정 충족에만 몰두하는 인스턴트 사랑이라는 주장이다.

견고하고 안정적인 노동의 생산성이 액화되어 소비사회로 진입했다고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여성에게 번식과 헌신이 기본값인 낭만적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우만은 이를 기준으로 욕망과 사랑을 도식적으로 이분화 한다. 욕망이 소비에 목적을 두는 일회적인 접속이라 한없이 가볍고 소비적이라면, 사랑은 대상을 보살피는 헌신과 유대감을 통해 영속성을 유지하며 무겁고 생산적이다.

그러나 욕망/사랑이라는 단순 이분화는 무한경쟁의 치열한 정글에서 연애와 결혼뿐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생존에 매달려야 하는 현대인, 특히 여성의 실존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불안정한 노동시장에서 무엇보다 생존이 최우선 과제인 여성들은 더 이상 타자를 보살피거나 헌신에 매진할 수 없을뿐더러 스스로를 돌보기도 벅찬 실정이다.

더욱이 여성들의 인식은 빠르게 취업은 필수, 연애와 결혼은 선택으로 바뀌었다. 개인의 자아실현과 자기 정체성을 우선시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남성에 대한 심리적·경제적 의존도도 낮아졌다. 또한 평생 한 사람과 살아야 한다는 관념도 사라져 독신이나 이혼, 동거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화 사회는 위험과 동시에 해방을 안겨준다. 특히 가족주의와 집단주의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의 타자를 위한 삶에서 자신을 위한 삶을 향한 전환과정은 그리 녹록치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그 이전부터 여성운동과 자기계발 담론을 적극 수용했던 여성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해방의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액체사랑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

 

대중문화는 대중들이 몸담고 있는 현실세계와 그들이 원망(願望)하는 세계를 양손에 들고 흥행성을 저울질한다. 특히 로맨스 수용자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에서, 대중문화는 여성에게 위험과 동시에 해방을 안겨주는 개인화 사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낭만적 사랑에서 액체사랑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각본화하기 시작했다.

<내 남자의 로맨스>(2004)<아내가 결혼했다>(2008)는 개인화 사회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안겨준 상반된 두 개의 거울과 같은 영화다. 전자가 낭만적 사랑을 이상화한 거울이라면, 후자는 낭만적 사랑을 반사한 거울이다.

 

《내 남자의 로맨스》(2004)
《내 남자의 로맨스》 (2004)

 

<내 남자의 로맨스>에서 현주는 갑자기 죽은 아버지가 보낸 듯 한없이 미더운 소훈과 결혼을 꿈꾸며 7년째 연애 중이다. 사랑은 번식을 위한 생물학적 본능이라고 여기는 생물학도 출신의 해충연구원인 소훈은 현주와의 결혼 역시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인다.

남자는 사랑을 사랑하고, 여자는 그 남자를 사랑하는 전형적인 낭만적 사랑의 서사다. 이 지루한 연애는, 7주년 기념일 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갔다 톱스타 은다영과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건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소훈은 CF 계약을 빌미로 다가오는 은다영의 적극적인 프러포즈에 흔들리고, 소훈을 붙잡으려는 현주의 요란스러운 소동이 부각된다. 한 남자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두 여자의 치열한 결전이 클로즈업되지만, 그 진정성 여부와 별개로 남자에게 결정권을 맡긴다는 설정으로 더욱 진부해진다.

무엇보다 문제의 핵심은, 개인화 시대에 걸맞지 않게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주체적인 의식도 직업에 대한 사명감도 철저히 결여된 현주에게 있다. 해바라기처럼 소훈만 바라보며 버림받을까 전전긍긍하다 직장에서 해고되는가 하면, ‘너 자신을 찾으라는 소훈의 따끔한 충고에 잠시 재취직을 하지만 자아실현의 욕구는 애초부터 없는 상태다. 운명적인 남자와의 결혼만이 자신의 미래이자 꿈인 구시대의 순정녀를 연기하는 연극배우처럼 개인화 시대와 불일치하는 여성인 것이다.

예상대로 은다영과 예의 바르게 이별하고 사랑의 신의를 지킨 소훈의 진중함, 비를 흠뻑 맞으며 소훈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현주의 일편단심과 외도한 남자를 알뜰하게 챙기는 돌봄, 결혼 이후 아이들이 늘어나는 행복한 결말은 낭만적 사랑을 이상화한다. 그러나 개인화 사회로 접어든 지금,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이상화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며 묻고 또 묻는 늙은 왕비의 물음에 자기 최면적인 답을 건네는 환상의 거울과 같다.

 

- 《아내가 결혼했다》 (2008)
《아내가 결혼했다》 (2008)

 

이와 달리 <아내가 결혼했다>는 젠더 불균형적인 낭만적 사랑의 모순을 비추는 거울이다. 낭만적 사랑은 표면적으로 일부일처제의 공동운명체를 추구해왔지만, 실상 남성들의 혼외정사에 대해 한없이 관대한 반면 여성들에게는 정숙한 섹슈얼리티를 엄격하게 요구해왔다.

이런 모순은 낭만적 사랑이 발생한 19세기 자본주의 사회, 즉 여성의 생애주기에서 학업이나 취직이 배제되어 있어 사랑과 결혼만이 불가피한 미래였고 여성의 노동력을 육아와 가사 등 가정 내 돌봄노동에 국한시켰던 사회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화는 전도적 상상력을 통해 일부일처제의 낭만적 사랑의 모순을 두 남자와 결혼하고 두 집 살림을 차린 여자의 일처이부(一妻二夫)적 이중생활을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비춘다. 이 비현실적이고 전도적인 상상력에 서사적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된 장치는 두 집 살림을 허용해왔던 일부일처제의 제도적 모순을 반사하는 거울효과와 축구경기와 연애를 결합한 새로운 사랑의 방정식이다.

낭만적 사랑의 로맨스에서 영웅은 남자 주인공이지만, 이 전도적인 로맨스의 영웅은 단연 여자 주인공이다. 주인아(주인아씨라는 의미)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는 확신을 지닌 자기주도적인 영웅이라면, 큰 남편 덕훈과 작은 남편 재경은 이런 인아가 설계하는 일처이부제를 순순히 수용하는 남자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사랑법이 두 남자가 한 여자의 사랑을 나눠 갖는 나누기 셈법이 아니라 사랑과 삶을 즐길 줄 아는 인아의 넉넉한 사랑을 함께 공유하는 더하기 셈법이라는 데 있다. 재경을 밀어내는 덕훈을 향해 한국축구의 문제점은 골 결정력 부족이 아니라 모두가 골을 행해 달려가는 집단적 황홀감을 함께 즐기지 못하는 데 있다는 재경의 주장은 나누기식 낭만적 사랑법에 익숙한 자들을 향한 일침이다. 덕훈이 이혼하지 않은 배경에는 외도를 한 남편 때문에 평생 속을 끓이며 살았던 엄마의 누구 좋으라고 헤어지냐?"는 생활철학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일처이부제라는 생소한 사랑법에 초점을 둔 영화의 특성상, 일부일처제의 가족주의와 집단주의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이 전도적인 공동운명체가 처한 위험성과 위태로움에 대한 조명은 미미하다. 그럼에도 가족들에게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두 집안의 며느리 노릇에 충실할 뿐 아니라,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로서의 권한을 큰 남편 덕훈에게 안겨주기 위한 세심한 배려 등은 개인화 사회에서 해방을 추구한 여성들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성을 시사한다. 더욱이 큰 남편과 작은 남편의 집을 오가는 돌봄노동의 부담은 두 배로 커진다는 점도 문제적이다.

이런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대안은, 그들이 좋아하는 바르셀로나 축구팀의 본고장 스페인으로 가서 한 지붕 아래 한 여자와 두 남자, 그리고 아이와 함께 풍요로운 사랑의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영화는 스페인에서 네 사람의 행복한 웃음의 의미를 배경음악 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으로 대신한다. 고체현대의 사랑법에 붙들려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분법적인 도식에서 벗어나, 사랑은 단지 소통매체일 뿐이니 이 새로운 사랑의 방식도 옳을 수 있다는 제안을 지지하는 메시지다.

다른 한편, <나의 PS 파트너>(2012)<가장 보통의 연애>(2019)는 액체사랑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전자가 언제든 접속하고 끊을 수 있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휘발성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면, 후자는 사랑에 대한 에피소드가 늘어갈수록 사랑에 대한 지식은 늘어나지만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환멸을 다룬다. 바우만의 비유대로 자기가 꺼낼 필요가 있을 때 언제든 꺼내 쓰다 필요 없을 때 윗주머니 속에 넣어두는 윗주머니 연애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편리성만을 추구하는 윗주머니 연애라 하더라도 이들의 만남을 깃털처럼 가볍거나 한 번 쓰고 버리는 인스턴트 관계라 비난할 수 없다. 오히려 낭만적 사랑이 실현되기 어려워진 개인화 사회에서 섹스파트너나 일회성의 연애파트너를 찾는 것이 더 쉬워진 사회구조의 변화가 사랑의 소통 불가능성을 심화시킨 진짜 원인이기 때문이다.

 

《나의  PS 파트너》 (2012)
《나의 PS 파트너》 (2012)

 

<나의 PS 파트너>에서 잘못 걸린 한 통의 전화로 연결된 현승과 윤정은 폰섹스로 만남을 시작한다. 폰섹스는 5년간 만난 남자와 결혼을 꿈꾸는 윤정이 미래의 남편이 될 경준에게 헌신하는 섹스노동이다. 그러나 우연한 통화를 계기로, 폰섹스는 7년 연애 끝에 이별하고 자기비하와 연애에 대한 환멸로 고통스러워하는 현승과 연애의 버거움을 털어놓는 소통매체로 전환된다.

싱어송라이터와 란제리 디자이너를 꿈꾸지만 현실은 백수인 현승과 윤정은 세상과 연인을 향한 울분과 불만이 가슴에 가득 차 있어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터져버릴 풍선처럼 위태롭다. 꿈도 이루지 못한 채 도태될 것이 두려운 두 사람의 통화는 서로를 향한 위로와 격려로 이어지고, 점차 연애와 인생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소통의 통로로 바뀌며 자연스럽게 오프라인의 만남으로 전환된다.

자기가 꺼내고 싶을 때 언제든 꺼내 쓰다 필요 없을 때 윗주머니 속에 넣어두는 가볍고 충동적인 폰팅이 오히려 5년 동안 연애하고 결혼을 앞둔 경준과의 소통보다 더 투명하고 진솔하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세계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반전을 이룬다.

경준과 윤정의 결혼식에 예정에 없이 찾아와 축가를 부른 현승의 저돌적인 프러포즈로 결혼식장이 대혼란에 빠진 것이다. 경준의 이중성과 사랑 없는 허위에 찬 결혼이 폭로되며 결혼식은 파탄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현승은 당시 축가를 부른 가수 신해철과 인연이 되어 싱어송라이터로 성공하고, 윤정은 란제리 디자이너로 독립한다.

 

《가장 보통의 연애》 (2019)
《가장 보통의 연애》 (2019)

 

몇 년 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현승과 윤정이 애청자로 다시 만나면서 사랑에 대한 환상을 남겨둔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환멸을 다룬 <가장 보통의 연애>에서 선영과 재훈에게 그런 환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오늘날 연애와 사랑이 왜 이렇게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했는지에 대해 직설법으로 말하는 선영과 재훈은, 연애도 사랑도 해 볼 만큼 해본 나이에다 사랑에 대한 지식도 어지간히 쌓여 더 이상 호기심도 기대도 없는 염세주의자들이다.

거침없고 솔직한 선영의 지독한 염세주의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연애를 해도 언제나 여자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운다거나, ‘섹스를 하지 않은 첫사랑만 빼고 모든 여자를 걸레로 보는 남자들의 성차별적인 연애관에 숱하게 상처를 받아왔던 환멸에서 비롯됐다. 이별 통보를 받은 전 남친의 오피스텔에 입주한 날부터 지금까지 날짜 수만큼의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을 거라는 억지 주장에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반격을 날릴 정도로 단련이 된 것이다.

그런 반면,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 배신을 당한 재훈은 술만 먹으면 밤새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하며 그 상처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 지하철 입구의 노점상 할머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 먹지도 않는 채소와 옥수수를 사다 냉장고에 가득 채운다거나 집에 들어온 고양이나 비둘기도 내쫓지 못할 정도로, 한없이 여린 재훈은 마음이 황폐화된 채 하루하루 술로 연명하며 살아갈 뿐이다.

이런 연애를 자기가 꺼내고 싶을 때 언제든 꺼내 쓰다 필요 없을 때 윗주머니 속에 넣어두는 윗주머니 연애라 하지만, 윗주머니에 넣어둘 연애조차 키우고 싶지 않은 염세주의자들인 선영과 재훈은 그래서 서로 통한다. 하지만 선영과 재훈이 사랑에 빠질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연애가 끝나는 자리에 기다리고 있을 환멸이 너무나 크고 압도적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연애의 이력》 (2015)
《우리 연애의 이력》 (2015)

 

반면, <우리 연애의 이력>(2015)은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는 낭만적 사랑을 정상성의 기준으로 삼고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리타분한 물음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썸 타는 이혼을 유지하는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 유동적인 사회에서 사랑의 소통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배우와 조감독의 관계로 함께 영화작업을 하다 연인으로 발전한 연이와 선재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고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결혼했다. 엄마의 자살로 물에 대한 공포가 깊은 연이와 오랜 시간 지병을 앓았던 엄마를 간호해온 선재의 관계는 평등한 합류적인 사랑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버거워 합의이혼을 감행하고, 이혼은 했으나 이별은 하지 않는 애매한 관계로 한 집에서 시나리오 공동 작업에 돌입한다. 영화배우와 조감독이 자신들의 연애를 시나리오화하는 작업은 삶의 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변화무쌍한 영화시장에서 오직 작품으로 승부해야 하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중첩되어 있다.

때문에 지독하게 싸우고 격렬하게 화해하는 투명한 소통을 반복하며 두 사람의 관계성에 대한 숙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동시에 영화를 찍다 도망치듯 도피한 두 사람의 과거 행적으로 인해 따라다니는 영화를 엎어지게 만든 배우와 조감독이라는 평판을 말끔하게 딛고 일어서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따로 또 함께 숙고와 고통의 시간을 견딘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속이며, ‘사랑은 상대방을 구속하고 소유하는 자신을 사랑한 자기만족이었다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나아가 이별은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자기 한계를 감당하지 못해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이므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두려움과 이별하고 더 충분히 상대방을 사랑하지 못해 미안해야 한다는 성숙한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다. 궁극적으로 자기의 발견을 통해 성숙한 사랑을 품을 수 있으니, ‘죽을 때까지 연애하고 그 고행길에서 영화를 해야 한다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이혼은 했지만 이별은 안 한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는 낭만적 사랑의 기본값으로 보면 유동적이고 불안한 액체사랑에 해당한다. 그러나 소통의 투명성을 통해 도달한 성숙한 사랑의 가치는, 낭만적 사랑의 허상에 붙들려 있는 옆집의 쇼윈도부부와의 대비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바우만은 낭만적 사랑을 명품으로 이상화하고, 그 외의 모든 사랑을 짝퉁으로 보고 있다. 아무리 정교하게 모방을 하더라도 진품의 아우라는 모방할 수 없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수많은 사랑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명품 하나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가치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물론 각자 존재하고 홀로 소멸해가는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라는 비유는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안과 공포를 날카롭게 포착한 최고의 수사로 손꼽히고 있다. 그렇더라도 구시대적인 낭만적 사랑을 기준으로 지금-여기의 수많은 사람들이 펼치는 다채로운 사랑을 통틀어 가볍고 일시적인 액체사랑이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삶이 펼쳐지듯이 시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사랑을 모색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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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구글

 

참고문헌

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 권태우·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홍찬숙, 개인화,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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