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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URC 레코드와 일본 포크의 상업화
[이혜진의 문화톡톡] URC 레코드와 일본 포크의 상업화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0.10.05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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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의 다카이시 도모야(출처: 西日本新聞)
1972년의 다카이시 도모야(출처: 西日本新聞)

 

고도경제성장기의 일본 포크 뮤직

1960년대의 오버그라운드를 비틀즈가 장악하고 있었다면, 언더그라운드는 단연 밥 딜런과 존 바에즈로 대표되는 프로테스트 포크가 선도하고 있었다. 험난하고 처참했던 전후를 극복하고 고도경제 성장기에 접어든 이 시기 일본의 청년문화는 미국 프로테스트 포크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명분이 희박한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와 함께 피차별 부락민의 타자화된 삶, 그리고 전국의 대학에서 불고 있었던 학원투쟁 등 일본의 청년들은 고도경제 성장을 주도해가고 있었던 일본 정부의 파행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한국의 포크가 점차 설자리를 잃고 서정적인 가사로 일관해가고 있었던 것에 비해 일본의 포크는 그야말로 미국의 저항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일본 포크가 탄생한 이래 현재까지 음악 활동을 왕성하게 이어오고 있는 포크 가수 다카이시 도모야(高石友也, 1941- 현재, 본명은 시리이시 도모야, 尻石友也)도 그 중의 하나다. 홋카이도 출신인 다카이시가 처음 포크음악과 조우하게 된 것은 1960년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학(立敎大學) 국문과에 진학한 이후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오사카 등지에서 토목공사 현장과 라면 포장마차, 스키장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던 가운데 일본의 학원투쟁과 반전운동의 기운에 휩싸이게 되면서부터다.

1966년 10월 10일 하타 마사아키(泰正明)의 음반회사 ‘아트 프로모션’이 주최한 ‘제2회 포크 포크 포크’ 콘서트에서 객석에 앉아 있던 다카이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갑자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본 하타가 다카이시와의 인연을 만들었는데, 당시 ‘간사이 포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하타와 다카이시의 이 날의 인연은 일본 포크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계기를 형성했다. 훗날 잘 나가는 ‘간사이 포크’ 가수들을 한 데 모아 다양한 이벤트들을 기획하면서 일본 포크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하타는 당시 마땅한 거처가 없었던 다카이시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다카이시 사무소’(1967.9)라는 회사를 만들고 그의 매니저를 자처하면서까지 다카이시를 ‘간사이 포크’의 상징으로 만든 장본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카이시는 1966년 11월부터 ‘시라이시 도모야(尻石友也)’라는 본명을 버리고 ‘다카이시 도모야’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포크 가수로서의 활동을 개시했다.

URC(Underground Record Club, 출처-sool4jo-티스토리)
URC(Underground Record Club, 출처-sool4jo-티스토리)

간사이 포크’와 URC 레코드

‘간사이 포크’의 초석을 마련한 가수 다카이시 도모야를 거론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항이 바로 URC(Underground Record Club)이다. 노동운동과 반전운동 등 포크음악의 레퍼토리를 점차 확대해가면서 ‘다카이시 사무소’의 감성에 공감한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다섯 개의 빨간 풍선(五つの赤い風船), 니시오카 다카시, 다카다 와타루, 포크 쿠르세다스 등 당대의 대표적인 포크 가수들이 ‘다카이시 사무소’에 일거에 모여들 정도로 하타는 일본 포크 세력의 중심을 구축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다카이시 사무소’는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포크 페스티발이나 콘서트와 같은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하고 대중적인 인기 몰이에 성공한 가수들의 음반을 제작하는 등 반체제운동과 상업주의를 미묘하게 결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 이런 분위기는 일본 포크사에서나 다카이시의 인생에서도 커다란 전환점을 형성했다.

당시 일본 포크음악의 체제 저항적인 특징으로 말미암아 많은 곡들이 방송 금지 처분을 받거나 정규 음반회사의 심의규정을 통과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더해가고 있었다. 그러자 하타는 ‘다카이시 사무소’ 소속 포크 가수들의 음반을 독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해갔는데, URC는 회원제로 음반을 배포하는 방식을 표방하면서 정규 레코딩의 검열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마련했다. Underground Record Club이라는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처음에는 일종의 동호회 형식의 ‘클럽’으로 출발했지만 예상 외로 회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URC 레코드’라는 기업 형태로 발전하게 되면서 그야말로 URC는 ‘간사이 포크 붐’의 중추 역할을 함과 동시에 포크의 기업화라는 이변을 초래했다.

1969년 2월에 발족한 일본 최초의 독립 레이블 URC는 회원을 모집하여 자체 발매한 음반을 회원들에게만 배포하고 또 일정한 회비를 받고 콘서트 참가에 우선권을 주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판매망을 구축해갔다. 당시 회원들은 표현의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이러한 URC의 방식을 지지했고, 또 URC는 전국 레코드 협회에 가입하지 않고서도 자유롭게 음반을 판매할 수 있는 활로를 개척했다. ‘URC 레코드’가 발매한 최초의 앨범은 1968년 8월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わたしを斷罪せよ(나를 단죄하라), 다섯 개의 빨간 풍선의 おとぎばなし(옛날 이야기), 그리고 다카다 와타루의 커플링 앨범 高田渡/五つの赤い風船인데, 이 앨범들은 현재까지도 일본 포크계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이후 하타 마사아키는 잭스(ジャックス)와 해피앤드(はっぴいえんど)와 같은 포크록 밴드들을 영입하고 음악출판사를 설립하면서 URC 소속 포크 가수들의 스케줄과 저작권을 관리하는 등 명실공이 기업적인 상업주의를 지향해갔다. 그러던 중 1969년 12월 콘서트를 끝으로 다카이시 도모야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하타와의 인연에 종지부를 찍었고, ‘다카이시 사무소’는 ‘음악사(音樂舍)’로 개명하여 운영되었다. 그 후 1978년 하타가 ‘음악사’를 그만 두면서 ‘간사이 포크’의 생명력도 다해가는 듯했다. 때는 바야흐로 베트남 전쟁과 학원투쟁이 종식되면서 포크 씬의 열기도 함께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포크 페스티벌(출처: LINE BLOG)
일본 포크 페스티벌(출처: LINE BLOG)

다카이시 도모야와 ‘수험생 블루스’

포크음악 활동 초기의 다카이시는 미국 프로테스트 포크의 대부로 불리는 피트 시거(Pete Seeger)와 밥 딜런의 노래에 일본어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부조리와 위선의 세계에서 사랑 타령이나 해대던 천편일률적인 대중음악에서 인간 삶의 원초적인 애환과 기쁨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1960년대 미국 포크는 통기타 하나에 벤조나 하모니카의 단순한 선율만으로도 사회 변혁의 수단이 될 만큼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사람들은 용기와 희망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포크란 일반적으로 보통의 사람들이 발 딛고 서있는 현실에 대한 가감 없는 내용을 음악으로 만드는 만큼 쉬운 멜로디에 녹록치 않은 내용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즉 그저 듣기 좋은 노래에 불과했던 대중음악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려준 것이 바로 포크음악인 것이다. 따라서 시대의 중압과 억압된 사회에서 무언가 올바르고 보다 직접적인 변혁을 갈망했던 1960년대의 청년들에게 포크는 대중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고, 또 그 만큼 어떤 슬로건의 힘보다도 강한 공감과 유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미국 포크의 감수성에 영향을 받았던 다카이시는 귀국 후에도 미국 남부의 컨트리 뮤직 특유의 소박한 포크 뮤직을 차용하여 일본어 가사를 붙여 노래하다 나중에는 벤조와 만돌린을 사용하여 민중의 감정을 소박하고 단순하게 표현하는 등 점차 일본 포크의 감각을 재현해내는 데 주력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음악적 실천이 다카이시 도모야 특유의 포크 감수성을 형성했고, 또 일본 포크사에서 그가 자리 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1968년 다카이시의 이름을 일본 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곡은 바로 <수험생 블루스(受驗生ブルース)>였다. 경쾌한 멜로디로 금욕적인 수험생들의 처지를 자학적으로 부른 이 곡은 당시 심야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시험공부를 하던 수험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곡으로 남아있다.

'수험생 블루스' 앨범자켓(출처: TAP the POP)
'수험생 블루스' 앨범자켓(출처: TAP the POP)

 

수험생 블루스

 

여러분,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저는 불쌍한 수험생

모래를 씹은 것 마냥 기분이 껄끄럽네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아침에 졸려 죽겠는데 억지로 일어나

아침밥도 못 먹고 학교로 가요

첫 교시가 끝나면 아무 생각 없이 도시락을 까먹지요

, 여러분, 들어주세요

나는 불쌍한 수험생

모래를 씹은 것 마냥 기분이 껄끄럽네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낮에 쓸쓸히 공원으로 가보니 남녀 커플이 한가득

사랑을 하면 안 되는 수험생은 자포자기하면서 돌팔매질만 하지요

2 1.41421356, 후지산 기슭에 옴(ohm)은 없는데

사인, 코사인이 다 뭐람, 우리에게는 우리의 꿈이 있는데

밤에는 슬픈 수험생, 가끔은 텔레비전도 보고 싶은데

심야 영화를 참아내고는 라디오 강좌를 듣지요

 

- 오늘 밤은 영문법 교과서 58쪽을 펴주세요

- 그럼 코가라슈 우지로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시험이 끝나면 친구에게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대답하고

상대가 우월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서 나중에 쇼크를 줘야지

엄마도 나를 격려하면서 일류 대학에 못 들어가면

지인들을 볼 면목이 없지 않겠니

 

- 애드립을 한 마디

 

마작에 미친 대학생, 도둑질 하는 대학생

8년이나 학교에 다니는 대학생, 뭐가 좋다는 건지, 대학생이

소중한 청춘을 낭비하고, 종이쪽지 한 장에 몸을 맡겨

마치 강둑의 마른 억새풀처럼, 이런 수험생에게 누가 그랬던가

 

- 부록도 붙어 있습니다

 

공부는 전혀 안 하고, 이런 노래만 부르고 있으니

내년에도 꼭 노래를 하고 있겠지, 예비학교 블루스를

 

 

 

* 이 글은 20164<문화웹진 ’>에 게재했던 글을 수정한 것이다.

 

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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