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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기억이다 - 연극 ‘공원벤치가 견뎌야하는 상실의 무게’
장소는 기억이다 - 연극 ‘공원벤치가 견뎌야하는 상실의 무게’
  • 배인철 문화평론가
  • 승인 2020.11.04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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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것, 또는 확정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면 애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 자크 데리다

지인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상처로 남는다. 인류가 고안해낸 제의(祭儀)의 장구한 역사는 곧 살아남은 자의 고통의 역사이기도 하다. 세상을 떠난 자를 철저히 타자화(他者化)하기란 불가능하다. 철학자 데리다는 죽은 자가 기억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자아 깊숙이 들어와 정체성을 굳건히 유지한다는 점에서 ‘애도(哀悼)’의 불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망자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태도는 일면 긍정적일 수 있지만, 망각은 본디 불완전한 것이므로 차라리 부재한 자의 공백을 인정하고 애도에 충실한 태도가 오히려 더 인간적일 수 있다. “애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패해야 하고, 그것도 잘 실패해야 한다”는 역설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데리다, 『애도 작업(travail de deuil)』. 때로는 애도 대상의 확정이 적극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비석이나 묘지는 소쉬르적 의미에서 볼 때, 여느 죽음을 나타내는 기표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애도 작업’에 필요한 기의일 수 있다.  

벗과 어머니를 추념하는 남녀가 만나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2인극 <공원벤치가 견뎌야하는 상실의 무게>는 최근 극단 ‘공상모임 作心365’가 지난 2월 대학로에서 초연한 화제작 <WANTED 우춘근>에 이어 공연한 두 번째 작품이다. 친구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남자 원일과 돌아가신 엄마를 추억하는 여자 지영이 공원에서 마주친다. 그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두 사람에게 그곳은 공동의 애도 장소이다. 원일과 지영이 나란히 앉게 되면서 무대의 공기는 바뀐다. 관객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망자에 대한 후회와 미안한 감정이 옅어짐을 감지한다. 위로의 시간이 찾아온다. 

원일의 친구가 죽기 전 3년 동안 머물렀던 벤치는 병마에 시달리던 지영의 어머니도 즐겨 찾던 장소다. 그들이 그곳에 남긴 흔적은 산 자의 기억 속으로 현전(現前)한다. 원일의 일기장 낭독과 지영의 뜨개질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애도 작업이다. 그렇지만 장소를 공유한다고 해서 마음속 응어리가 해소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마치 우주에 흩어진 원자와 같아서 저마다의 궤적이 있고 상실의 농도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다. 원일과 지영은 사연을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매일의 만남에서 기대하는 바가 달랐다. ‘슬픔’은 객관적이고 ‘슬퍼해야’ 할 대상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차이를 확인하고 좌절한다. 이윽고 벤치만이 홀로 남아 이별의 아픔을 증언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본질적이다. 원일에게 친구가 남긴 일기장과 지영의 존재는 별개의 것이다. 일기장을 읽는 행위는 미안한 감정을 희석시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애도다. 원일은 지영과의 만남을 계기로 고통스런 의식에서 벗어나려 한다. 아픈 기억과 단절하고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원일의 기도는 리비도의 회수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적이다. 지영은 다르다. 원일에게 슬픔의 장소인 공원벤치가 그녀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환대의 공간이며, 원일은 위로의 의식을 함께하는 동지적 존재이다. 결코 완성될 수 없지만 슬픔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도 않는 지영의 애도는 데리다의 것에 가깝다. 그녀가 원일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와의 관계 – 육체적 관계는 부차적이다 –를 통해 미완의 애도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 깔리며 연극은 막바지로 치닫는다. 

결말은 공연장에서 확인하시기 바란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지는 장면에 대한 단상을 적으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원일의 친구가 죽기 전에 보낸 한 통의 편지에 의해 갈등은 해소된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가 떠올랐다. 주인공 히로코가 연인 이츠키의 진면목을 재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편지였듯이, 미처 몰랐던 고인들의 인연을 알게 된 원일과 지영은 위로를 얻는다. 그들이 외롭지 않았던 이유는 절망 속에서도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과거와 시간이 현재와 합류하는 순간 공원벤치는 새로운 의미로 – 애도의 장소에서 치유의 장소로 – 재발견된다. 때마침 장소란 곧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기억임을 상기시키는 글이 떠오른다.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일부를 옮겨본다. 

“비옥한 땅에서건 척박한 땅에서건 사람들이 살고, 꿈꾸고, 고뇌하는 가운데 조금 특별한 일을 실천하려 했던 기억이 한 땅을 다른 땅과 다르게 하고, 내 몸을 나도 모르게 움직이게 한다. 땅이 그 기억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사람이 이 땅에서 반만년을 살았다 한들, 한 사람이 이 땅에서 백년을 산다 한들, 단 한순간도 살지 않은 것이나 같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80쪽)        

‘공원벤치가 견뎌야하는 상실의 무게’는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대상을 애도할 장소에 결박한 후, 기억의 주체가 서서히 깨달음을 얻어가는 시간의 흐름을 전시한다. 이러한 서사는 인류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주지만, 팽목항이 단순한 기표에 그치지 않고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에 가슴에 더욱 생생한 의미로 각인되는 특수한 상황마저 끌어안는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아픔이 작금에 이르러 더욱 선명해지는 이유는 비극적인 사건이 치유되지 않고 있는 시대적 징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억될 순간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던 과거가 깨어날 때마다 현재도 함께 깨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연극은 대량의 인명 상실에 자칫 무감각해질 수 있는 팬데믹 시대의 경종이자,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선물과도 같다. 

글· 배인철
문화평론가

※ 공연정보 

연극 <공원벤치가 견뎌야하는 상실의 무게> 
작  신성우∣연출  이지수∣조연출  신소현∣무대디자인 및 제작  배일환, 디자인 트루퍼스∣음향디자인  이정현∣프로듀서  이혜정∣기획  김규리∣진행  최선옥∣배우  권재환, 정소영∣사진제공  공상모임 作心365
- 2020.10.31.(토) ~ 11.01(일), 방송통신대 열린관소극장 
- 2020.11.14.(토), 대구 한울림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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