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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비판 인문학 100년사 -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문주의란
[서평] 비판 인문학 100년사 -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문주의란
  • 김유라 기자
  • 승인 2020.11.05 1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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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회가 종교와 전통에 매몰되었던 역사는 유구하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어왔던 수많은 억압. 인간은 그 시기를 암흑의 시대로 규정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고대 아테네 시절부터 그네들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인간, 인간으로의 회귀였다.

인문주의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담은 예술 종교 철학 과학 윤리학 등을 존중하며, 인간을 짓밟는 모든 압력을 떨쳐내려는 노력을 일컫는다. 그러한 의미를 갖는 인문학은 유명작가들의 문학작품이나 철학가의 사상으로 축소되곤 한다. 이에 『비판 인문학 100년사』는 인문학이 가진 보다 큰 가치로서 인문주의를 얘기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지난 100년간의 노력을 10년 단위로 나누어 전하고 있다.

인문주의의 태동

초기 인문주의자들의 등장은 가히 혁명이었다. 지금껏 그 누가 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인간 해방을 부르짖었는가. 부패한 기독교가 천국을 미끼로 대중을 착취할 때 인문주의자들은 과감히 종교 전통에 반발했다. 대신 인간의 본성과 인류애적 사랑을 찾고자 했다.

인문주의는 수세기에 걸쳐 유럽 사회에 스며들었다. 12세기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부터 19세기의 톨스토이까지. 수많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가치를 다루었다.

19세기까지의 인문주의는 르네상스의 연장선에 가까웠다. 신과 인간의 대립구도에서 인간이 권력을 가져오고자 했던 일련의 시도였다. 신 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의 균형을 이루고자, 인간의 쟁반에 작은 무게추를 올려온 것이다. 경외하던 신의 무게가 인간과 비슷해졌을 즈음 20세기가 시작된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변화하자 인문주의도 다양한 양상으로 뻗어나간다. 『비판 인문학 100년사』는 바로 이 시기부터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토록 잔혹했던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20세기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죽음, 그리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발표와 함께 시작됐다. 저자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신의 죽음’과 ‘인간의 해방’이 본격화했다고 평가했다.

산업혁명 이후, 20세기 인간에 대한 탐구는 보다 심도 깊어졌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집필하며 인간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꿈과 최면을 통한 무의식의 탐구는 인간을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로 규정하고 은밀한 욕망까지도 긍정한다. 이외에도 개인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사회학이 등장하는 등, 생리적인 욕구마저 부정당하던 과거에 비하면 눈부신 발전이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존중이 사회적인 분위기로 번진 가운데, 인간의 오만에 대한 경고도 시작됐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그렇기에 ‘특별’하다는 인식이 해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인간존재에 대한 회의는 파시즘의 팽배와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심화됐다. 일부 국가에 만연한 인종주의는 학문과 법체계에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집행자만 바뀌었을 뿐, 인간에 대한 억압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쩌면 인간은 신과 함께, 신이 마땅히 추구했어야 할 가치까지도 죽여버린듯 했다.

자본주의 vs 사회주의 그리고 실존주의

1차 대전 이후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을 발표하며 전쟁의 원인으로 자본주의를 지목했다.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자본주의 진영의 무분별한 공격 역시 계속됐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지식인들은 인간이 이룩한 시스템이 되리어 인간을 억압하는 상황에 관심을 기울였다. 2차 세계대전 중 출간 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거대한 전환』에선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권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이 잘 드러나 있다. 

곧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공통적인 한계를 발견한다. 바로 인간의 ‘물신화’. ‘실존주의’의 등장은 물신화를 극복하고 자유로운 주체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인간에겐 현재 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함께 살아간다는 초월성이 있으며, 여타 다른 존재와는 구분되는 특별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시스템마저 뛰어넘은 해방을 추구해왔다.

질서와 무질서라는 두 가지 위험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등장 이래 세계경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상으로 꼽힌다. 경제생활에서 국가를 몰아내고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신자유주의는 민영화와 조세감소, 복지국가 해체, 규제 완화 등의 정책으로 가시화했다. 같은 시기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부상한다. 신매체·신기술의 발명은 원거리간 소통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속도도 향상시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했다. 이때 커뮤니케이션이 획득한 ‘사회적 중재자’의 기능은 아직까지 굳건하다.

신자유주의와 커뮤니케이션의 결합은 세상을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개인은 더 이상 국가나 특정 집단의 보호망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무한정의 주체들이 상호작용하는 넓은 세상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때문에, 현대사회의 개인은 고독하다. ‘시스템’ 곧 ‘질서’가 주는 억압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질서’라는 새로운 억압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저자는 ‘뤼시엥 스페즈’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시 한 번 인문주의의 실현을 이야기한다. 현대인은 때때로 기술의 진보가 모든 사회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하곤 한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결코 도덕적 진보가 아니다. 따라서 생산의 분배와 투명성 재고, 사회 통합의 방안 등,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 해방의 방법은 사회 구성원이 모색해야하는 숙제이다.

21세기, 20세기가 외면한 문제에 직면하다

"나만 불편한가?“

한때 일상생활과 커뮤니티를 도배했던 질문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여성인권과 아동인권, 동물권까지... 소수자(혹은 동물) 권리가 화두로 떠오르며 기존에 합의되었던 사회적 약속은 이제 청산해야 할 적폐가 되었다. 누군가는 이 사회에 ‘예민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며 불평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단순히 예민함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20세기 서구사회의 군림은 제3세계의 고혈로 가능했다. 비약적인 산업의 발달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식량문제 해결은 동물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어쩌면, 21세기는 20세기가 외면했던 다양한 문제들을 뒤늦게 다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을 죽이고 선 인간의 오만은 어느 순간 도를 넘었다. 환경오염과 그로 말미암은 기후위기, 지구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모두 인간사회에 울리는 빨간불이다. 『비판 인문학 100년사』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 될 현대 사회에서 새로운 인문주의를 말하고 있다.

 

글·김유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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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라 기자
김유라 기자 yulara1996@ilemonde.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