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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주의 문화 톡톡] 자기효능감과 연대의 관점에서 본,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송연주의 문화 톡톡] 자기효능감과 연대의 관점에서 본,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 송연주(문화평론가)
  • 승인 2020.11.16 0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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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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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일을 현재에 영화로 담아낼 때,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할 지점이 ‘그 이야기를 지금의 우리가 왜 보아야 하는가’이다. 미처 현재의 관객이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려 하거나, 현재 시대 상황이 과거의 어느 지점과 닿아있거나, 현재에 재조명되고 부각되어야 할 인물이 있거나, 그리고 현재에 꼭 해야 할 이야기이지만 현재를 배경으로 하였을 때보다 과거의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하였을 때 더 효과가 있을 때 등 ‘왜?’에 대한 답은 다양하고, 이것이 곧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로 이어진다. 그 메시지에 울림이 있을 때 관객은 극장을 찾는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마지막 이유가 되지 않을까. 2020년의 어느 기업 비정규직 여성들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영화는 1995년으로 거슬러 가 가볍고 유쾌한 톤을 선택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사랑스러운 주인공과 신스팝의 음악, 토익반 전체가 연대하는 과정까지 유쾌하다. 영화 미술은 1995년을 섬세하게 디자인하며 레트로 감성을 충족시켜주고, 인물은 25년 전 사람들이지만 옛날 사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MZ세대로 일컬어지는 지금의 청춘들까지도 공감할만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연대의 과정을 만들어 간다.

1995년, 커리어 우먼이 되기를 꿈꾸는, 자영, 유나, 보람 세 여성은 상고 출신 고졸 사원이다. 그들은 고졸 스펙 때문에 승진의 기회 없이 8년 동안이나 역량보다 저평가된 채 낙인처럼 유니폼을 입고 삼진전자에서 작은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영어토익반을 수강하기 전부터 차별받고 있다는 감정을 공유한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 중, 남성은 없다. 상사 중에서 여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들은 대졸자다. 유니폼 입은 고졸 여성들이 사복 입은 대졸 남성과 여성들보다 실무능력은 더 뛰어나지만, 그녀들에게 기회란 없었다. 억울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회사를 사랑하며 자신의 업무에 충실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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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들에게 회사는 꿈같은 공약을 한다. 바로 토익 600점을 넘으면, 영어 능력을 인정하여 대리로 승진 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회사가 열어준 새벽 토익반. 유니폼을 입은 여성들로 가득 찬 그곳에서 주인공 자영, 유나, 보람도 영어 공부에 매진하며, 대리가 되어 회사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될 자신의 미래를 떠올린다.

더 나은 미래,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기 계발, 자기 테크놀로지, 업글인간(업그레이드 인간의 줄임말)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요즘 세대들의 키워드이다. 영화에서 토익반을 수강하는 여성들의 연대는 토익 600점을 넘겨 대리가 되겠다는 욕망을 공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영화가 영리하게 인물을 배치한 전략이 보인다. 바로 토익점수를 서열화하여 상위 몇 명까지만 승진 대상에 넣겠다는 것이 아니라, 600점이라는 ‘절대 점수’를 기준으로 내세운 것이다. 상대평가로 줄 세우기를 했다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연대가 아닌 경쟁의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레벨에서 600점이라는 절대 점수로 도달해야 하는 목표 지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경쟁과 질투의 감정으로 빠져버릴 여지를 애초에 배제했기에, 함께 영어단어를 외우고, 대리가 될 미래의 모습을 대화로 공유하며 서로를 응원할 수 있게 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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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에 투자하고, 서로의 취미를 공유하는 것은 MZ세대들에게 핫한 일이다. 온라인으로 어학이나 직무 관련 강의, 취미 관련 강의를 듣고, 각자의 재능과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절친과만 교류하는 것에서 벗어나 필요할 때 온라인상에서 휘발되어버릴 관계도 흔쾌히 맺는다. 일회적으로 교류하고 금방 헤어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의 여파가 오래 남지 않기 때문에 덜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어학 공부나 취미생활을 하는 이유나 목표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성장’의 기준을 타인과 비교해서 내 위치가 어디인지를 자기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내가 기준이고, 어제의 나에 비해 오늘의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생각한다.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졌다는 성취감으로 자신을 칭찬하며, 앞으로도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기 효능감을 키운다. 반복적으로 자기성취가 가능한 것을 찾고, 자기 효능감을 키울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투자한다.

자기효능감은 사회가 평가하는 가시적인 성취나 상대적인 성과를 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내적 만족도를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감정이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이어진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연애할 때, 친구를 사귈 때, 회사에서도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나려 노력한다. 인간관계가 휘발되더라도 남아있는 자신이 결과적으로 성장했다면 만족한다. 반면에 자신을 낮은 기대치로 바라보거나 자존감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사람은 인간관계 손절의 대상이 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연대로 나아가는 또 다른 동력은 인물들에게 공공의 문제가 주어지는 데에 있다. 토익 600점을 넘겨 대리가 되는 것은 개인의 성취이다. 그조차도 상대적인 줄 세우기를 하지 않았는데, 삼진전자가 불법적으로 저지른 ‘페놀’ 방류 사태를 바로 잡는 일을 영어토익반이 하는 것이다. 오지랖 넓은 주인공 자영이 양심의 문제로 회사에 도전하고, 유나와 보람이 재치 있게 자영을 도와주며 하나가 된다. 그리고 ‘페놀’ 방류를 은폐하는 삼진전자의 만행 뒤에 더 큰 무언가를 밝혀내는 과정에는 토익반 전체가 ‘참여’해서 문제를 풀어간다.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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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영, 유나, 보람이 주도하지만, 그들은 영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토익반과 토익반 선생님의 참여가 있어야 가능하다. 자영, 유나, 보람을 신화적으로 그리지 않기에, 인물의 등장부터 각자의 서사를 구구절절 펼치지 않고, 영화는 시작부터 인물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규정한다. 둘러가지 않아 속도감 있고, 인물에 대한 이해도 쉽다. 이런 톤은 토익반 전체의 참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도 유지된다. 설득의 노력이 필요하거나 구구절절 신파가 들어가지 않고, 문제 상황을 심각하게 끌어가지도 않는다. 영화가 보여줄 것에만 집중한다. 우리는 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요즘의 MZ세대들은 선한 것을 좋아하고 실천과 참여를 중요하게 여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좋은 일에 기여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고 그런 의식을 집단으로 공유하기를 원한다. 이들의 집단적인 실천이 불매운동이나 정치참여로 이어지는 사례는 많았다.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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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요즘 세대들의 감성에 맞는 상황과 인물을 배치했다. 그리고 그때 당시 2030세대들에게도 요즘과 통하는 감성과 열정이 있었고, 현재도 있다. 자기효능감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것이고, 공정하게 노력해서 결과를 얻고, 옳은 일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은 보편의 감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여러 세대의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1995년을 배경으로 현재에도 통하는 감성을 다뤄, '아이 캔 두 잇'으로 시작해, '유 캔 두 잇'으로 확장하고, '위 캔 두 잇'을 이뤄내는 영화였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 : 송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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