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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의 문화톡톡] 유사품의 효과에 대하여
[이은지의 문화톡톡] 유사품의 효과에 대하여
  • 이은지(문화평론가)
  • 승인 2020.12.07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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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찾으면 보통 2, 3일치의 약을 처방해주곤 한다. 처방받은 약을 다 먹고 증세가 어느 정도 호전된 상태에서 그 약을 타기 위해 거듭 병원을 찾아가기란 귀찮은 일이다. 그럴 때 나는 처방전 따위를 아무 약국에나 들고 가서 “이것들과 비슷한 성분이 들어 있는 조제약을 달라”고 하곤 한다. 약사가 건네준 조제약의 성분표를 살펴보면 분명 병원에서 처방해준 그 약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증세가 나아지는데 효과가 있다.

 

Photo by Olga DeLawrence on Unsplash
Photo by Olga DeLawrence on Unsplash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 2019)에서 말하는 오늘날의 사랑은 내가 차선책으로 약국에서 사다 먹은 조제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의사가 처방한 약과 똑같은 성분은 아니지만 거의 같은 효력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은 아니나(프롬은 이를 ‘사이비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사랑 비슷한 효력을 발휘한다. 사람들은 그 유사 효과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유사 효과로서의 사랑이 횡행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량생산체제가 요청하는 삶의 규율에 맞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요된 맞춤으로, 즉 규격화된 것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개념은 개인 간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인간으로서 모두 신성하다는 종교적 차원의 ‘일체성’이 아니라, 규격화된 것들을 똑같이 향유하는 비개성적인 ‘동일성’의 개념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평등의 개념 아래 규격화/표준화된 인간은 필연적으로 비어 있게 마련인 부분을 보충하려 알코올, 마약, 성애, 오락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도취적이고 일시적인 일치의 감정을 갈망한다.

사회적으로 표준화/유형화된 사이비 사랑의 사례로 프롬은 프로이트의 성적 만족으로서의 사랑과, 설리반의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로서의 사랑을 들고 있다. 성적 본능의 충족으로서의 사랑은 급속히 팽창하는 시장 경제의 소비 풍토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소비와 섹스 모두 욕망의 충족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추구한다. 설리반의 사랑은 비대화된 사회의 고독한 군중 속에서 둘만의 내적인 유대를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는 팀워크로서의 사랑이다. 오늘날 대다수 청춘남녀의 사랑은 이 두 유형에 속할 것이다.

그것이 사이비 사랑일지언정 이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라면 도리가 없다. 우리는 사회 생산구조가 의식구조를 결정하는 유물론의 사슬에 묶여 있을 따름이다. 급격한 사회 대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사슬은 서서히 악화되거나 서서히 나아질 것이다.

게다가 유사 감정으로 전락한 것은 비단 사랑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표현하고 학습하는 모든 감정들―기쁨, 슬픔, 분노, 우울 등―은 이미 그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된 감정의 양태는 변화된 현재의 생활양식과 항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예컨대 소규모 공동체 사회였던 원시 시대에 설리반의 팀워크로서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무척 기이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프롬이 당시(1956년) 사이비 사랑으로 규정했던 형태의 사랑은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가장 정상적인 사랑의 방식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출처 : 네이버 책.
출처 : 네이버 책.

프롬에 따르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행하기 위해서는 규격화와 표준화, 몰개성적 동일성의 생활양식에 익숙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선은 끊임없이 부산하게 소비하는 습관을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익숙해져야 한다. 사회적 흐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데는 인고의 노력이 필요하므로 훈련이 신속하고 효율적이지 않아도 ‘인내’하고, 타인과 자신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읽다보면 언뜻 동양적 명상 수련에 가깝게 들린다. 그러나 사랑을 능동적이고 고양된 활동의 상태로 역설한다는 점, 사랑의 실천을 개인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영역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결론 맺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실천하는 ‘기술’에 대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인이 스스로 겪어가며 습득할 수밖에 없음을 프롬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오늘날의 사랑이 설령 사이비 사랑일지언정,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도모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결론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처방전과 조금 다른 성분의 조제약을 먹어도 효력이 있었던 것처럼, 유사 사랑/사이비 사랑의 실천도 오늘날은 차라리 장려될 만한 것이다. 프롬은 사이비 사랑을 병리적 사랑, 붕괴된 사랑이라고 호들갑 떨고 있지만 그마저도 사멸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시대에 봉착하지 않았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아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우리 시대다. 그러니까 우리는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기에 때 이른 단계로 퇴행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 : 이은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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