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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의 문화톡톡] 한 죽음을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이유
[류수연의 문화톡톡] 한 죽음을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이유
  • 류수연(문화평론가)
  • 승인 2020.12.14 09: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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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나온 말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아마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6:12)라는 성경의 구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말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말은 굉장히 모순적이기도 하다. 죄를 미워하는데 어떻게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때때로 많은 범죄가 인간의 나약함 그 자체에서 발생된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 말의 본의 역시 미움에 사로잡혀 그 죄를 넘어서는 처벌은 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더 나아가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이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말은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용서의 사전적인 정의는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복수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하는 말의 어감이 부정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대상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용서의 당위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지면서, 피해자의 자발성을 휘발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다. 우리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전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형벌의 존재이다. 모든 형벌은 형법에 근거한다. 그것은 어떠한 행위가 범죄로 명명되는지를 밝히고, 그에 따른 처벌과 그 정도를 규정하는 법규이다. 이렇게 형법은 피해자를 대신하여 사회가 가해자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형벌의 효과는 단지 범죄자가 저지른 죄에 대해 처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사회적 수단이며 더 나아가서는 피해자가 사적인 복수를 선택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제어장치이다. 피해자가 사회적 안녕과 질서 안에서 보호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것이다만약 우리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우리 사회가 가해자에게 그 범죄에 합당한 죗값을 부여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야기하는 범죄가 발생될 때마다 우리는 국민의 법 감정에 너무나 못 미치는 형벌제도로 인해 더 큰 분노를 느끼고는 한다. 성폭력과 관련된 사건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조두순 사건이 그러했고, 버닝썬 사건이 그러했고, N번방 사건이 그러했다. 법이 제대로 죄를 처벌하지 않았기에 사람을 더욱 더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발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한 죽음이 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사(修辭)는 꽤나 화려하다. 세계 3대 영화제를 휩쓴, 가학적인 방식으로 성과 폭력을 다루었지만 그것을 독특한 미학으로 성취했다는 평가를 받은 천재 감독. 바로 고 김기덕 감독이다.

한 사람의 뛰어난 재능은 때로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그것이 예술가라면 더욱 그러하다. 찬란하게 빛나는 작품이라는 업적이 남보다 예민하고 치열한 한 인간의 고뇌 위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술가의 인간성이란 언제나 번외의 문제이거나 예술적 행보에 따른 필요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진1. MBC [PD수첩] 화면 캡처, 출처: MBC 홈페이지
사진1. MBC [PD수첩] 화면 캡처, 출처: MBC 홈페이지

하지만 2018<PD수첩>을 통해 보도된 거장의 민낯은 너무나도 추악했다. 그의 촬영장은 폭력으로 얼룩진 공포의 장소였다. 우리를 더욱 경악하게 만든 건, 어쩌면 그의 영화야말로 그 폭력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도구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었다. 그의 필름에 담긴 배우의 눈빛이 연기가 아닌 성폭력으로 얼룩진 촬영장에서 겪어야 했던 공포와 절망이었다면, 그것이 스너프 필름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예술적 행위로 포장되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그는 자유롭게 한국을 떠났으며, 또 다른 장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었고, 새로운 국적을 얻어 자기 삶을 되찾고자 하였다. 피해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훼손되고 자신이 사랑했던 일도 잃어버렸으며, 피해를 보상받기는커녕 2차 가해에 내던져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누군가의 삶을 나락으로 처박은 결과 위에서 꽃피운 예술적 경지라면, 나는 그것을 차라리 폐기하는 편이 낫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어떤 예술도 한 사람의 삶보다 더 나은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 무엇도 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 애초에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다시 돌아와 보자. 여기, 한 죽음이 있다. 그 어떤 죽음도 함부로 조롱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이 한 죽음을 미화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죽음이 한 인간의 추악함을 가려주거나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두렵다. 이 죽음이 그대로 범죄에 대한 침묵으로 이어지고, 그리하여 그의 영화를 호명했던 수많은 영화제와 트로피만이 그 이름 앞에 붙는 상황이 말이다. 그러므로 잊지 않을 것이다. 김기덕이라는 이름 뒤에 붙을 평가에 망각이라는 면죄부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자 하는 또 다른, 그리고 유일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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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문학/문화평론가. 인천문화재단 이사. 계간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고, 현재는 문학연구를 토대로 문화연구와 비평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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