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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의 삶은 밖에서 온다 – 영화 <내가 죽던 날>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의 삶은 밖에서 온다 – 영화 <내가 죽던 날>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1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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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많은 이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앞세우는 것은 ‘나’에 대한 관심인 듯 싶다. 여태까지 무엇이 좋은 것인지 싫은 것인지도 모른 채 살아오다가 자신만의 호오(好惡)를 깨닫게 되는 순간, 내가 이렇게 힘들었다는 것을 인정한 후 스스로에게 보내는 토닥임, 또 내 자신이 그 자체로 소중했다는 것을 깨닫는 눈물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서점가 베스트셀러 섹션에 나열되어 있는 많은 책들은 이러한 상황을 방증한다. 이 책들에서 가장 많이 찾을 수 있는 말들 즉 자존감, 자긍심, 자신감, 자부심 등이 모두 자(自)를 앞세우며 나에게 집중하라고 말한다. 최근 2-3년 새 갑작스레 떠오른 이 키워드는 꽤나 오랫동안 유지되지 않을까 싶다.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나라 전체가 성과와 성취에 집중된 그 자체를 상찬하는 동안 개인들은 외부적 기준 없이 자신을 칭찬할 수 없었고, 조용히 무수히도 무너져 갔기 때문이다. 지속된 감정적 착취 사이에서 이제야 조금씩 개인을 호명할 수 있을 정도의 숨통을 틔워 낸 것이 나에 대한 집중이 아닐까. 과거 몇몇으로 집약되던 ‘개성’의 ‘개인’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에 대한 집중의 확대는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삶이 오롯이 ‘나’에 대한 집중만으로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것은 물론 나이겠지만, 나를 구축하는 것은 오롯이 나홀로 가능할 것일까. 내가 무너지는 순간 도무지 스스로 헤어나올 길이 없다면 결국엔 타인을 둘러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현수(김혜수)가 세진(노정의)의 삶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되찾았던 것처럼.

 

<내가 죽던 날>에서의 ‘죽는다’는 두 가지를 의미할 것이다. 하나는 심리적·정신적인 죽음과 신체적 죽음. 전자에는 현수의 삶이, 그리고 후자에는 세진의 삶이 놓인다. 현수는 모든 것이 아무런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던 그때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다. 큰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남편은 자신을 떠났으며, 경찰 조직에서도 퇴출 당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티다, 그는 자신을 움직이게 해줄 일을 하기 위해 복직 신청을 한다. 현수는 순조로운 복직을 조건으로 배정된 한 사건의 마무리를 맡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섬으로 들어갔다가 세진의 흔적들과 마주한다. 세진의 삶 역시 현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잣집의 막내딸로 큰 어려움 없이 사랑받고 자랐던 이 아이 앞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경찰들은 아빠의 비위(非違) 사실에 관한 질문들을 늘어놓는다. 한 번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 의심치 않았던 세진의 삶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섬의 벼랑 끝에 선다.

이들의 삶이 하루 아침에 내려 앉은 것은 그들 탓이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고 자신의 미래를 완벽하게 그려 놓았다고 해도, 그들의 확신은 타인으로 인해 무너졌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구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나에게서 시작된 일이 아닌 것을 어떻게 내 안에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꾹꾹 참기에 바쁘다. 현수는 감정이 없는 사람인 양 움직일 뿐이며 세진은 누구의 도움도 거부한 채 스스로를 가두기에 바쁘다. 이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 개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선택이다. 모든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 채 감내하는 것. 그러나 방법으로는 결코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

 

<내가 죽던 날>은 바로 이 사실을 담담하게 풀어내면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타인에게서의 치유를 내민다. 그래서 영화는 현수와 세진의 상처를 호들갑스럽게 늘어놓지 않는다. 그들의 의지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일을 굳이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현수의 과거는 단편적으로 삽입되며 세진의 전사 역시 현재의 세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이 영화를 채우는 것은 이렇게 상처받은 이들이, 도저히 혼자서는 헤쳐 나갈 수 없는 이 상황을 타인을 통해 극복하게 되는 거대한 감정들이다. 현수는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발버둥쳤던 세진의 흔적들을 찾으며 앞으로 자신이 나아갈 힘을 얻는다. 세진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길 바라는 순천댁(이정은)을 만나 인생이 당장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영화의 흐름은 아마도 경찰의 박진감 넘치는 사건 해결을 기대했을 이들에게는 정보가 없다거나 늘어진다는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렇게 흘러간다. <내가 죽던 날>은 타인과 함께하는 감정의 공유와 공감, 그리고 공명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세진의 아버지가 그렇게 되었는지나 그의 오빠와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게 될지를 설명하는 것보다, 그리고 현수가 이후 남편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마비가 되었던 그의 손은 다시 같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지, 또 문제없이 복귀는 했는지 보다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타국에서 살아있는 세진과 현수가 함께 맥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벅차는 그 순간 자체가 그들이 살 수 있는 이유였을 것이다. 나의 삶이 나 혼자만의 발버둥으로 결코 설명되지 않기에 타인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으로 그들은 살 날을 얻어냈다. 세진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길 바랐던 순천댁도 세진의 편지를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살아낼 기대감을 가졌을 것이다. 삶은 이렇게 징그럽게도 아름답게도 서로를 얽어낸다. 세 사람이 한 번도 한 프레임에 담기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내가 죽던 날>(2020)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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