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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상과 음악, 대사의 화려한 협연 <카핑 베토벤>
[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상과 음악, 대사의 화려한 협연 <카핑 베토벤>
  • 송영애(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1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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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카핑 베토벤>(아그네츠카 홀란드, 2006)을 다시 봤다. 여전히 불친절한 영화였지만, 음악과 대사의 화려함은 매혹적이었다. 대사를 자막으로 읽다 보니 눈과 귀가 모두 바빠지는 영화기도 했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서 ‘합창 교향곡’으로

<카핑 베토벤>을 다시 본 건 우연에서 시작된 의식의 흐름 덕이었다. 우연히 SNS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피아노 연주로 들었다. 분명 피아노 솔로 연주인데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은 듯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베토벤 연주를 좀 더 찾다 보니 올해가 베토벤이 태어난 지 250년이 되는 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기념 연주회도 많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필자에게도 어렵게 입장권을 구해 연말 연주회를 가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기억났다. 한 3년 연속으로 연말 연주회에 갔었는데, 레퍼토리는 언제나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었다. 그래서 또 찾아봤다. 올 연말에도 어김없이 ‘합창 교향곡’ 공연을 하는지, 한다면 아직 입장권인 남아있는지, 코로나19 상황으로 취소된 건 아닌지 궁금했다. 예상대로였다. 공연은 예정되어 있었지만, 취소된 상태였다.

 

‘합창 교향곡’에서 <카핑 베토벤>으로

아쉬움을 느끼면서 영화를 떠올렸다. 바로 <카핑 베토벤>이었다. 이 영화에서 ‘합창 교향곡’ 초연 장면은 무려 15분가량이다. 이 기나긴 연주 장면이 더 특별한 이유는 상당 부분이 무대 위 베토벤과 카피스트 안나의 시선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함께 떠오른 또 다른 영화 <불멸의 연인>(버나드 로즈, 1995)에도 ‘합창 교향곡’ 초연 장면이 나오지만, 객석에 앉은 인물이 바라보는 연주였다.

2007년 개봉 당시 <카핑 베토벤>을 본 후 다시 본 적이 없었다. 그사이 세상도 필자도 변했으니 분명 또 다른 느낌을 줄 것 같았다. ‘합창 교향곡’ 초연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을까?

 

워칭(watching) 베토벤

<카핑 베토벤>도 베토벤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합창 교향곡’ 초연 4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토벤의 임종을 지킨 안나는 베토벤을 처음 만났던 3년 전 기억부터 떠올리는데, 이 영화는 안나의 베토벤에 대한 추억이고, 추모인 동시에 본인의 성장 이야기이다.

안나는 초연을 며칠 앞두고 급하게 고용된 카피스트였다. 베토벤이 작곡하며 작성한 악보를 연주자용 악보로 깨끗하게 옮겨 적는 게 카피스트 안나의 일이었다. 베토벤의 악보 일인 줄 모르고 갔던 안나나 최고 실력의 학생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여학생이 올 줄 몰랐던 베토벤이나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작곡가 지망생인 안나는 베토벤의 일이기에 하고 싶었고, 베토벤은 얼마 남지 않은 공연을 앞두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곧 베토벤은 자신의 실수를 오히려 고쳐놓은 안나의 실력을 알차 채곤 잃어버린 청력 대신 신이 보낸 천사라면 기뻐하게 된다.

두 사람은 ‘합창 교향곡’ 초연을 무사히 끝낸다. 안나도 함께 무대에 오르는데, 직접 지휘하겠다는 베토벤의 귀가 되어주기 베토벤 맞은편에 앉아 지휘한다. 둘이 함께 지휘하며 연주하는 ‘합창 교향곡’은 15분가량 지속된다.

 

뮤직비디오 서너 개 길이는 족히 되는 시간 동안, 무대 전경이나 객석, 연주자, 합창단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안나와 베토벤의 얼굴과 손을 더 많이 보여준다. 관객들은 때때로 안나를 바라보는 베토벤, 베토벤을 바라보는 안나가 되어 함께 연주하는 느낌에 빠져든다.

 

클로즈업과 포커스 아웃의 향연

‘합창 교향곡’ 초연 장면에서 베토벤과 안나의 얼굴이 화면 가득 보일 때 주변은 흐릿하다. 관객들은 포커스 아웃된 주변은 볼 수조차 없다. 그저 또렷한 두 사람의 얼굴에, 표정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타악기의 진동 때문일까? 교향곡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선 두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는 화면이 요동치듯 흔들리기까지 한다.

 

이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작곡하거나 연주할 때에도 어김없이 클로즈업과 포커스 아웃이 등장한다. 두 사람의 얼굴뿐만 아니라 빠르게 움직이는 펜, 악보 등도 화면을 가득 채운다.

클로즈업 촬영에 사용되는 렌즈는 초점 길이가 짧아 포커스가 맞는 부분 이외 모든 부분은 흐릿해진다. 촬영하는 사람이나 연기하는 사람이나 매우 성가신 작업일 수밖에 없지만,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데에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 영화의 첫 시작도 클로즈업과 포커스 아웃된 영상으로 가득하다.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안나의 모습은 춥고, 어두운 도심의 골목, 마차가 달리고 있는 교외 길가의 나무, 골목과 길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 안나가 탄 마차에 타고 있는 이들의 얼굴 등과 빠르게 교차하며 보인다. 점차 음악 소리가 커지면서 창밖을 보고 있던 안나의 표정도 상기된다.

 

음악과 대사의 화려한 협연

그렇게 도착한 곳은 죽음을 앞둔 베토벤의 집이다. 안나는 베토벤에게 말한다. “푸가를 들었어요. 선생님 방식대로요.” 조금 전 관객들도 함께 들었던 음악이 바로 안나가 내면으로 들은 베토벤의 음악이었다. 긴박감을 강화하거나 안나의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배경음악만이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두 사람의 내면의 음악인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이 작곡하거나 필사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나 악보 클로즈업과 함께 사각사각 펜 소리, 베토벤의 괴성에 가까운 허밍 소리, 그리고 음악이 들린다. 두 사람이 각각 작업하고 있는 모습을 번갈아 보여줄 때는 두 음악이 겹쳐 들리기도 한다.

베토벤과 안나가 나누는 대화도 흥미롭다. 베토벤이 음악에 대해 하는 얘기들은 명언록 수준이다.

   “악장은 끝나지 않아, 흐르는 거지.”

   “음악적 효과라는 건 없어. 자넨 형식에 강박이 있어.”

   “내면의 소리를 들어.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자넬 감싸면 자네 영혼은 노래할 수 있게 돼.”

모두 베토벤이 안나에게 한 말이다. 베토벤은 음악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우 혁신적이었다고 한다. 교향곡에 매우 파격적으로 합창을 도입했고, 귀족 계급에게 굽신 대지도 않았다. 영화 처음에 안나가 베토벤에게 그의 방식으로 그러니까 내면의 침묵으로 드디어 들었다고 말한 푸가는 후세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처럼 들리기도 하는 대사에는 베토벤의 철학과 열정이 담겼다. 침대에 누운 채 악기별로 박자와 음정을 부르는 베토벤과 그대로 악보를 받아 적는 안나가 나누는 대화에서 극치에 이른다.

   “찬송가네요.”

   “그리고 단음. 여린 단음이 나타나 오선 위로 치솟고, 음끼리 다툼이 계속돼.”

   “크레셴도로요?”

   “첼로는 계속 땅에. 다른 소리들은 계속 떠 있고, 인간은 영원 속에 거하게 돼. 땅은 존재하지 않아. 시간도 사라지고...”

죽어가는 베토벤은 점차 추상적인 단어들을 주절거리고, 안나는 애써 웃으면서 대답한다.

 

가상의 인물이 변호하는 베토벤

이 영화는 안나의 회상, 추모, 성장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베토벤에 대한 변호다. 안나 역시 처음엔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베토벤에게 보여줄 기회를 기대하며 베토벤의 괴팍함과 무례함을 참는다. 안나는 베토벤과의 음악 작업을 통해 점차 그를 이해하며, 자신도 성장한다.

안나의 시선에서 전개되다 보니, 베토벤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순간이 별로 없다는 건 아쉬운 점이다. 안나의 주변 인물들이 방해가 되기도 한다. 베토벤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겐 불친절한 영화다.

그러나 두 음악가에게 온전히 집중하게 하는 영상과 끊임없는 대화, 함께 들려왔던 음악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는 건 언제는 즐거운 일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베토벤의 음악이지 않은가!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영애

영화평론가. 서일대학교 영화방송공연예술학과 교수. 한국영화 역사와 문화 관련 연구를 지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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