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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릎과 무릎사이>는 에로영화 밖에서도 의미있게 읽힐 수 있을까?
[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릎과 무릎사이>는 에로영화 밖에서도 의미있게 읽힐 수 있을까?
  • 성진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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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로라 멀비가 영화 이론사의 기념비적인 논문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에서 주류 영화 언어가 남성중심 시선에 종속되어 있다는 주장을 한 이래, 많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가부장제 체제에서 발전되어 온 영화 언어를 거부하고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새로운 영화 언어에 대해 고민해왔다. 동시에 또 많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다른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주류의 영화 언어를 변형하고 새롭게 읽어냄으로써 영화에서 여성 담론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넓히는 것, 로빈 우드의 말을 빌자면 “모든 길을 열어두고 가장 넓은 범위의 전략과 실천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텍스트의 불균질성은 이와 같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1980년대 한국 영화를 마주하다 보면 바로 이 후자의 필요성을 종종 깨닫게 된다.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닫힌 70년대에서 민주적이고 유연한 열린 90년대로 이행해가는 1980년대의 과도기적 특성이 그 당시 영화에서 종종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1980년대 한국영화를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인 ‘에로영화’ 카테고리에 포함될 만한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다. 에로티시즘이 오랜 기간 보수적인 가치관에 저항하는 전술 중 하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놀랄 만한 것은 아니지만, 페미니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꼼꼼하고 주의 깊은 접근을 필요로 한다. 또한 어떤 영화에서 작은 가능성이 포착되었다고 해서 그 영화가 성적 쾌락을 위해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하는 에로영화가 아니라고 귀결 짓는 것도 위험하다. 그 가능성이란 텍스트에 존재하는 균열의 지점에 연루되어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여러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무릎과 무릎사이>(이장호, 1984)는 오히려 그 균열과 갈등을 노골적으로 전경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균열의 전경화가 이 영화의 여성 혐오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주의를 끄는 영화다.

 

<무릎과 무릎사이>는 제목과 그 제목을 그대로 시각화 한 포스터만으로도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영화다. <무릎과 무릎사이>의 줄거리를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플루티스트 자영(이보희)이 성적 쾌락과 그로 인한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영은 성적으로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영화는 그러한 상황의 반복을 통해 ‘관객’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한다. 물론 여기서 ‘관객’은 남성이다. 주인공 자영의 서사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위해 조직된 셈인데, 그것은 말초적인 성적 쾌락을 자극하는 것을 넘어서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성도덕과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치밀하게 짜여있다.

강간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여주인공, 타락한 여성을 구원하는 순결한 남성, 처첩을 둔 아버지(심지어 그가 부인을 두고 만난 여성은 17살의 미성년자였다)와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감내하는 두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결국 이해하는 이복 자매 등, 이 영화의 서사는 가부장적 권력에 기대어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가했던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혹은 합리화) 하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특히 이 영화는 여주인공 자영이 폭력적인 성적 관계(심지어는 강간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 원인을 자영 자신에게 전가함으로써, 영화 속 남성들과 영화를 보는 남성 관객들을 죄의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남성을 대신해 죄를 짊어진 자영이 자살을 시도하게 하고 자영의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지켜보아 온 방관자 남성이 자영을 용서하고 구원하게 함으로써 교과서적인 여성 혐오 서사를 완성한다.

 

이 영화가 상업적인 ‘에로영화’를 목표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성의 신체를 파편적으로 전시하면서 성적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스펙타클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이 영화는 상당히 세련된 형식미를 갖춘 ‘에로영화’였다고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에로영화가 여성을 착취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릎과 무릎사이>의 서사가 여성 혐오적이라는 것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영화를 주목하는 것은 이 영화가 에로영화로서의 매끈한 완성도에 스스로 균열을 내면서 정치적 의도를 내비치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의도된 균열이 에로영화 본연의 목적과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온전하게 기여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무릎과 무릎사이>는 주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설명하는 영화다. 영화는 대금과 플룻을 비롯한 서양 악기 연주자와 한국 전통 악기 연주자가 합주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영화의 주제는 대금과 플룻이라는 두 악기 소리의 낯선 공존을 통해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 충돌 효과로 전달하는데, 그 주제란 수입된 서구 문화와 전통적인 한국 문화 사이의 갈등과 관계있다. 80년대에 유행했던 ‘로봇춤’ 추는 자영의 동생과 마이클 잭슨의 뮤직 비디오, 빠른 비트의 팝 음악에 맞춰 어지러운 조명 아래서 몸을 흔드는 젊은이 등의 이질적인 사운드와 이미지들이 중간 중간 삽입되는데, 이 순간 <무릎과 무릎사이>는 에로영화로서의 진행을 멈추고 정치적인 발언을 시도한다. 그것은 서구 문화 유입에 대한 경계, 전통 문화의 우수성과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 서구 문화에 물든 젊은이들을 향한 경고 정도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무릎과 무릎사이>는 에로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당시 한국의 사회 현상에 대한 논평을 하려는 목적의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바람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바보선언>(1983) 등의 영화를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그려내는 감독으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이장호 감독의 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겉으로는 에로영화이지만 그것은 정치적 메시지를 위한 외피일 뿐 이 영화의 진정한 목적은 다른 데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갖게 된다. 감독 이장호는 영화 말미에 직접 출연해 그 메시지를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기까지 한다. 이장호는 자영이 퇴원하기에 앞서 자영의 어머니와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로 출연하는데, 자영의 심리를 설명하는 그의 대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본인 보다는 오히려 우리 사회의 잘못이 많습니다. 우리 한국인에겐 맞지 않는 서구식 생각이나 생활 때문에 우리 모두 열병을 앓고 있는 거죠. 이제 지나간 악몽은 모두 잊어버리시고 앞으로는 따님의 정신적인 순결을 어머니께서도 높이 사주셔야겠습니다.”

<무릎과 무릎사이>에서 감독은 몇 개의 삽입된 이미지와 위의 대사를 통해 지금 한국 사회가 서구문화의 급격한 유입 속에서 문화적 충격을 경험하고 있으며, 자영이라는 인물은 그 병리적인 사회 현상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전작들을 만들었던 감독이 돈벌이용 에로영화를 만들면서 변명삼아 심어 놓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러한 특징은 에로영화이면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라는 텍스트의 양가성에 우리의 주목을 집중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자영이라는 인물 중심의 서사 속에서 이 대사의 의미를 찾다보면 전혀 다른 결과에 다다르게 된다. 의사(감독)의 말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자영이 겪은 모든 것은 서구식 문화 탓이다. 이 영화는 자영을 나락에 빠뜨린 것은 ‘서구’라는 것을 초반부에 설정해 놓았다. 자영은 어린 시절 서양인 플룻 선생님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그 서양인 플롯 선생님은 남자이며 어린 자영은 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 기억은 성인이 된 자영이 우연히 무릎에서 성적 쾌락을 느끼게 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상기되는데, 영화는 성인 자영에게조차 스스로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언어를 허락하지 않는다. 자영은 어린 시절 자신이 성폭력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그 과거의 경험과 연장선상에 있는 현재의 상황들을 어머니에 대한 반항과 죄라는 두 가지 언어 사이에서 이해하고자 애쓴다.

결과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창작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 그 정치적 메시지라는 것이 에로영화로서 <무릎과 무릎사이>라는 텍스트 속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전통과 서구의 대립 구도 하에서 ‘서구’라는 타자는 여성이 부당하게 지고 있던 죄의식을 전가 받는다. 그리고 악마적인 안타고니스트에 ‘서구’를 앉히겠다는 목적 하에 여성 인물이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언어의 존재는 완전히 부정된다. 이를 통해 관음증자 남성은 죄의식의 구속 없이 가학적인 성적 괘락을 즐길 수 있고, 남성의 언어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게 되며, <무릎과 무릎사이>는 더욱 매끈한 에로영화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무릎과 무릎사이>는 표면적으로 볼 때 텍스트를 불균질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과도기라는 1980년대의 역사적 맥락과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인정되는 감독의 위상은 에로영화 밖에서 이 영화의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유혹을 부추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질적인 요소만으로 텍스트의 성격을 단정 짓는 태도는 경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무릎과 무릎사이>를 불균질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만드는 요소들은 치밀한 텍스트 속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고, 이질적이고도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삽입된 메시지들은 결과적으로 에로영화로서 이 영화의 정체성과 여성 혐오적 성격을 강화하는데 기여할 뿐이기 때문이다.

 

글·성진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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