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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이 아니다, 피플리즘이다
포퓰리즘이 아니다, 피플리즘이다
  • 손아람
  • 승인 2011.07.11 17:1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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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오세훈 서울시장이 유행시킨 ‘복지 포퓰리즘’이란 조어에서는 시적 모순과도 같은 묘한 긴장이 느껴진다. 마치 ‘진실한 거짓말’처럼, ‘평화적 폭력’처럼, ‘민주적 독재’처럼. 복지라는 접두어를 애써 접착해두지 않으면 포퓰리즘 자체는 복지의 정반대 인상을 환기하는 까닭이다. 포퓰리즘의 역할을 수행한 복지정책이 기억나는가?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분배가 아니라 성장 논리의 함정으로 작용해왔다. 고민 없이 판정 내릴 수 있는 포퓰리즘 정책은 이런 것이다. 연 7% 성장률 달성,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 대한민국의 세계 7위 부국 등극. 달콤했던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747 공약’이다. 이런 제안은 분배의 논리도 성장의 논리도 아니다. 그냥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이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그 말을 의심스럽게 들었던 국민보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들려준 대통령이 더 잘 알고 있었을 터. 이런 게 바로 포퓰리즘의 진수다.

시적 모순 같은 말, ‘복지 포퓰리즘’

무상급식 사안이 포퓰리즘의 인기 영합 효과를 발휘할 만큼의 덩치가 되는지도 의문이다. 무상급식 실현에 필요한 예산은 대략 700억∼5천억 원으로 추정되는데, 자주 언급되는 4대강 정비 사업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서울시에서 랜드마크 조성 사업으로 추진 중인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건립에 들어가는 돈이 6천억 원이다. 복지 분야에서 이에 맞수가 될 포퓰리즘이 나오려면 무상급식으로는 턱도 없다. 무상 뷔페 정도는 도입해야 한다.

그래서 6천억 원을 들여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는 시장이 무상급식의 요구에 혈압 오른 논조로 포퓰리즘 공세를 퍼붓는 것은 도둑이 제 발 저린 예민한 반응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울시의 자랑스러운 6천억 원짜리 랜드마크? 그런 건 고생스레 시공까지 안 가도 된다. 발상만으로 이미 포퓰리즘의 역할을 다했다. 꿈만 같았던 747 공약처럼.

오세훈 시장이 ‘포퓰리즘’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선택해 방어 전략을 펴는 데는 무상급식 도입 논란이 선동가들의 프로파간다로서 적정 온도 이상으로 뻥튀기됐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로서는 지난 세월 일부 학부모의 청원에 그치던 무상급식 사안이 갑작스레 범시민적 어젠다로 대폭발한 것을 이해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세훈 시장의 시야를 위협적으로 가린 것은 단지 무상급식이 아니다. 여기서 한발 물러서면 앞으로 사사건건 선동에 휘둘릴 수 있다는 공포감, 그게 겨우 오페라하우스 하나 짓는 규모의 예산 책정 요구에 정치 생명을 걸고 ‘망국적 포퓰리즘’이란 배수의 진을 친 배경이다.

한진·등록금·급식,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

‘망국적 포퓰리즘’은 링컨 미국 대통령의 노예해방 정책에 맞서기 위해 남부 노예농장주들이 내세웠던 유서 깊은 논리다. 오세훈 시장의 망국적 포퓰리즘론에는 노예해방 같은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여기서 밀리면 다 죽는다는 노예농장주들의 비장한 정치적 절박감 같은 것이 서려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노예농장주들처럼 오세훈 시장 역시 시대의 징후를 읽되 분석에 이르진 못한 모습이다.

▲ <무제>, 2008-이은정
이것은 최후의 징후도, 최악의 징후도 아닌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최초 징후일 뿐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공간이 동질화된 세계를 목격하게 되었다. 과거 무상급식 같은 의제가 학급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사회로 확산되는 데 간섭했던 시공간적 지연을 떠올려보라. 매스미디어 시대의 서명운동과 웹 시대의 커뮤니티 회원 모집,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리트윗’을 비교해보라. 변화의 위력을 감지하려고 시리아와 이집트의 민주화 시위를 찾을 필요도 없이, 이 기술의 진보를 촉매 삼아 북한을 조리할 방법을 궁리하기도 전에, 우리 사회가 먼저 변하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의 ‘속도’가 불씨를 살려낸 무상급식 도입 논란, 실황 중계와도 같은 동시성으로 공유되는 한진중공업 사태, 10년의 더딘 숙성이 믿기지 않을 만큼 한순간에 분출한 대학 등록금 투쟁의 경우를 보라. 의제의 확산이 지연되면서 의제의 무게가 함께 희석되던 비극은 이제 지폐의 초상화처럼 낡은 이야기가 되었다. 단지 속도가 바뀌는 게 아니라 정치적 의사소통 기작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새로운 발견이다. 그간 역사 속에서 사장된 수많은 쟁점은 인간에게 외면당한 것이 아니었다. 확산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스스로 산란되고 소진된 것이었다. 소셜 네트워크의 등장과 함께 의제 확산 속도가 처음으로 의제의 ‘처리’ 속도를 따라잡으면서, 그 누구도 논쟁을 거치지 않고 의제를 소거하기는 어려워졌다. 필연적으로 이곳은 뜨겁게 논쟁적인 사회로 탈바꿈했다. 그게 바로 오세훈 시장을 두렵게 하는 ‘선동’의 실체이자 전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비밀 세력도, 어떤 주동자도 없다.

사회가 논쟁적으로 변한 건 무조건 좋은 일이다. 논쟁적인 사회는 전적으로 논쟁이 가능해진 사회란 뜻이기 때문이다. 사회 분열을 걱정한다고? 그런 걱정은 논쟁을 건너뛰고 결론을 강제 수렴할 수 있던 시대를 향수하는 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태어난 그들의 자식은 결국 그들보다 우리를 닮게 될 것이다. 우리에 맞서거나 혹은 우리와 어울려 논쟁하며 살아갈 것이다.

현재의 대학생들은 10년 전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내던 것의 대략 두 배에 달하는 등록금을 지급하고 있다. 대학 등록금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해마다 등록금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랐기에 내가 재학 중일 때도 휴학을 신청하려는 학생들은 졸업이 미뤄지며 발생하는 불경제적 효과를 복리에 따라 계산하곤 했다. 등록금 문제가 대학가의 단골 투쟁 의제였음은 물론이다. 그때는 학생들이 등록금 인하까지 바라지도 않았다. 동결만 해달라고 사정했고, 번번이 묵살당했다. 학교는 완강했다. 사회는 무관심해 보였다. 지난 10년간의 등록금 투쟁이 캠퍼스의 메아리로 머물렀던 것은 지금보다 학자금 대출이 용이해서가 아니었다. 국지적 호소가 사회적 소통으로 확산될 장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록금 투쟁은 화성에서 외계인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소식과 한정된 지면과 채널 안에서 겨뤄야 하는 처지였다.

의제 ‘확산’ 속도가 ‘처리’ 속도 추월

그러나 소셜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아직도 대학가 안에서 공론화되는 데 몇 년이 걸렸던 등록금 문제가 한순간에 나라를 뒤흔드는 쟁점으로 발화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게 정말 선동가 몇 명의 역량으로 일어났다면, 대한민국은 그들의 손아귀에 있다. 그런 경이로운 능력에는 저항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인 논리로, 무상급식이나 등록금 인하 요구가 선동으로 가능하다면 복지 포퓰리즘이란 반테제 역시 선동으로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 아마 저쪽에서도 공들여 노력은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는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분산돼 개별성을 담보하며 망구조로 조직된 여론은 일방적 소통구조를 갖던 구미디어 시대에는 엄두도 못 낸 진정한 수준의 비가역성을 획득했다. 지구가 선동가들의 부채질로 방향을 바꿔 자전할 수 없듯이, 생태사슬이 선동가들의 입김으로 역전될 수 없듯이, 이제 여론은 조작되거나 선동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생명을 얻었다. 미디어가 여론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론이 미디어를 움직이는 시대가 왔다. 언론 기사를 들여다보라! 이제 기사의 주된 인용처는 여론 자체다.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끝을 얼버무리는 전문가의 예측을 입맛대로 번역할 필요가 없어졌다. 섣부른 혹은 고의적 예단이 여론의 재귀적 반응을 부추기며 덜컥 증명되던 시대가 지나간 것이다. 예측보다 자명한 것들이 눈앞에 놓여져 있으므로. 기자들은 트위터를, 페이스북을, 커뮤니티 사이트의 즉각적인 반응을 인용한다. 그것은 여론의 현물이다.

이제 여론은 조작·선동되지 않는다

매스미디어의 시대 막바지에 일어난 잔혹한 미군 범죄 사건들에 대한 시민들의 대응은 역사화된 추모 양상을 띠었다. 그때 등장한 촛불은 처음에는 단지 기일 제례의 상징으로써 기능했다. 웹 시대의 막바지에 일어난 서울 용산 참사 사건의 경우에는 즉각적이긴 했지만 여전히 사후 항쟁에 머무르는 모습이었다.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한진중공업 사태는 사건과 반응이 동시적이다.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는 논쟁은 더 이상 과거를 반추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록하는 동시에 실행하게 된 것이다. 세계의 시공적 간극이 수축하면서 인간의 의제는 모든 인간의 책임이자 관심사가 되었다. 대학가에서, 부산의 공업지대에서, 학교 급식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동등한 자격과 기회를 가지고 우리의 입을 거친다.

“어느 곳의 부정의도 모든 곳의 부정의이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은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암살당했을 때는 음모만이 난무했고, 그의 지휘 아래 전진하던 인권운동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가 남긴 말은 때이른 소망이었다. 새 시대의 도래를 염원하는 기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연민하며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게 선언하고 싶다. 우리가 도달한 여기가 새 시대다. 바로 이 시대, 어느 곳의 부정의도 모든 곳의 부정의이다. 어느 곳의 부조리도 모든 곳의 부조리이다. 이제 인간의 외침이 전파되는 속도는 결코 지연되지 않는다. 인간의 외침이 전파되는 거리에는 결코 한계가 없다. 그리스에서 출발해 3천 년을 달려온 민주주의는 한때 이상주의에 빠진 철학자들의 상상 속에서나 전개되던 위대한 원정로에 접어들고 있다. 새 시대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이 모든 일을 포퓰리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포퓰리즘이 아니다. 세상 위에 오로지 인간과 인간의 문제만이 남은 시대, 이것은 바로 ‘피플리즘’이다!

글· 손아람
저서로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소수의견>, 공저로 <너는 나다: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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