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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과연 신의 뜻은 선한 것일까 - <사바하>의 흥미로운 질문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과연 신의 뜻은 선한 것일까 - <사바하>의 흥미로운 질문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1.01.18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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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인간은 신의 존재를 떠올린다. 평소 종교를 가지고 있었느냐 혹은 어떤 종교에 기울어져 있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때의 신은 그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원망을 퍼붓기 위해 필요할 뿐이니까.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절규, 어떻게 이렇게까지 억울한 죽음이, 허망한 상실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저렇게까지 잔인한 인간이, 악랄한 존재가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한 원통함은 도대체 당신의 뜻이 무엇이냐는 의심에 도달한다. 여기에는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 불신이, 그리고 극한의 분노가 포함될 텐데, 어찌보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이 이렇게까지 시련을 준 것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거나 타인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식의 굳이 깨달아 낸 결론보다 나에게 왜 이러느냐는 억울함이 먼저 튀어 나오는 것이 당연하고 솔직한 심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순간 순간 신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진대, 많은 이야기들은 ‘굳이 깨달아’가는 것에 긴 시간을 할애한다.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이 역경을 통해 주인공이 무엇을 얻어내는지는 사람들이 꽤 좋아하는 이야기 구조이다. 여기에는 우리 앞의 고통은, 그리고 악은 늘 우리의 반대편에 선 없어져야 할 대상이며, 이것의 소멸 후에는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내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선과 악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가? 어디선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듯 보이는 신의 뜻은 늘 선하기만 한 것인가? 신은 과연 인간에게 늘 우호적이기만 할까? 정말 그런 것일까? 누군가는 불경하다 할 이 질문들을 영화 <사바하>는 날카롭게 늘어놓는다. <사바하>는 ‘신의 뜻’을 굳이 해석하지 않은 채 인간의 솔직한 억울함을 드러낸다. 과연 우리가 당신을 알아볼 수는 있는 것이냐고,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뜻은 무엇이냐고,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사바하>는 총 세 갈래의 서사가 각기 흐르다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를 지닌다. 하나는 산속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쌍둥이 자매를 중심으로,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한 쌍둥이 자매의 모습을 그린다. 스산한 집안에서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금화(이재인)와 모두가 없어지길 바라며 창고에 가두어 버린 쌍둥이 언니는 스스로의 존재가, 그리고 상대가 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지를 늘 의심한다. 온몸에 털이 나 있는 기괴한 모습에 울음 소리 외에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이 존재는 마치 그 마을의 악령처럼 그려진다. 금화는 자신과 함께 태어난 이가 불쌍하면서도 증오스럽고 죽길 바라면서도 살아주었으면 싶은, 그에 대해서는 늘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영월에서 발생하는 소녀의 살인사건에 관한 것이다. 영월 관내에서 여중생이 시체로 발견되지만 뚜렷한 특징을 잡아내지 못하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알 수 없는 의식을 치른 것처럼 보이는 시체들은 상식선에서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이 미궁의 살인사건은 곧 이단을 쫓는 박목사(이정재)의 서사, 세 번째 갈래와 이어진다. 이단을 쫓으며 경제적 후원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박목사는 동방교라는, 여타의 사이비 종교와 같을 것이라 생각했던 곳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가는 사실들과 마주한다. 이 세 갈래의 이야기는 이제 동방교로 수렴되면서 근원적인 물음을 향해 달려간다. 나한(박정민)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사실들의 배신, 그리고 그것의 의미. 그것은 곧 신을 향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흥미로운 것은 <사바하>는 인간의 믿음이,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수렁 같은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면서도 그 원망의 화살을 신에게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바하>는 단지 인간의 믿음이 어리석다고 말하기보다, 인간이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신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누군가를 보듬어 주고 당신 스스로에 대해서는 어떤 욕심도 가지지 않으며 무한히 베풀어 줄 것처럼 보이는 존재, 말투·몸짓·목소리 등 이 모든 것으로 나락에 떨어진 우리를 인도해 줄 것이라 확신을 주는 존재는 제석(정동환)을 통해 온전하게 형상화된다. 이는 우리가 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모습과 닮아 있으며 따라서 그를 섬기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처음으로 너희들은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준 제석에게 나한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설사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일지라도)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이상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제석에 대한 충성은 곧 자신의 신을 모시는 것이며 구원 받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행동이라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제석의 잔인한 배후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이 정말로 모셔야 할 신을 누구도 돌아보지 않으며 없어지길 바랐던, 심지어 악령으로 취급했던 헛간의 괴물로 배치한다. 이 설정은 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인간의 믿음을 탓하기보다, 도무지 알아챌 수 없는 신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사바하>는 인간의 잘못된 믿음이 비단 인간의 무지나 탐욕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면서 신을 향해 절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의 존재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다면, 과연 그것에 담긴 신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가 종종 견뎌낼 수 없는 시련 앞에 서 있을 때 그 뜻 역시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헤아릴 의미가 없는 것인가? 박목사가 아프리카 선교활동을 갔던 친구가 가족을 그곳에서 모두 몰살당했다던 이야기를 꺼내며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나 곧 태어날 예수 보호하기 같은 날 태어난 아기가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봤던 신에 대한 의문은 바로 절대자에 대한 당연한 듯 믿어온 긴 시간의 허무함을 드러낸다.

<사바하>는 감독의 전작이 그랬던 것처럼 무속과 기독교, 그리고 불교 등과 같이 서로 다른 종교를 교차하고 가로지르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장면들을 담고 있다. 이는 이 작품이 신이라는 존재나 종교에 대한 믿음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절대자에 향해 질문을 던지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인간이 신을 향해 가지고 있는 것이 믿음만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때, 신에게 건넬 수 있는 대화는 구원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신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늘 먼 곳을 향해 부르짖고 있지만, 우리가 돌아보지 않는 그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신이기도 하다는 것, <사바하>의 절규가 들려주는 또 다른 역설이기도 하다.

 

 

<사바하>(2019)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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