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脫)정치의 정치, 소크라테스의 트라우마
<국가>는 플라톤 하면 떠올리게 되는 그의 대표작이다. 직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 하여도 철인통치나 이데아의 동굴 비유 정도는, 자세히는 모른다고 하여도 다양한 경로로 들어는 봤을 것이다. 철학사, 특히 서양 철학사에서 플라톤의 위상은 독보적인데, 아마 칸트 정도나 되어야 플라톤에 이름을 견줄 수 있지 싶다.
칸트 이후의 철학자는 찬성이든 반대든 칸트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표명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서양 철학사에서 칸트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플라톤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을 텐데, 그에 대해선 철학사의 범위를 넘어서 아마도 서구 지성사 전반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20세기의 저명한 철학자 영국의 알프레드 화이트헤드는 “유럽의 철학 전통이 가지고 있는 가장 확실한 특징은 그것이 플라톤 철학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구 지성의 원천인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 아테나이에서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플라톤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남편을 잃은 플라톤의 어머니는 피릴람페스라는 사람과 재혼했다. 후세 사람에게 피릴람페스는 그리스 역사에서 기억될 만한 인물이 아니지만 그는 저 유명한 페리클레스의 친구였다. 어머니의 재혼상대를 통해서 간접적이나마 플라톤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플라톤은 전쟁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 성장했다. 그가 태어나기 4년 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년)이 발발했다. 플라톤은 전쟁 중에 태어나 전쟁 중에 성년이 됐다. 상류계급에 속한 플라톤이 당시 다른 명문가 자제와 달리 정치에 입문하지 않고 ‘철학자’가 된 데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앞서, 플라톤이 20대 초반의 청년이던 404년에 아테나이에는 30인 과두 정권이 출현한다. 이 과두 정권에 참여한 플라톤의 외삼촌과 외당숙은 플라톤에게 자신들과 함께 정치를 하자고 권유한다. 현실 정치에 관심이 있었지만 플라톤은 30인 과두 정권의 실정으로 정치 참여를 망설이며 상황을 지켜보게 된다. 그러던 차에 이 과두 정권은 8~9개월 만에 민주파에 의해 전복된다. 이후 전개된 정치보복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민주파의 정치 자체를 호의적으로 평가하였기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란 그 유명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플라톤이 현실 정치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실 정치에 뛰어들고 현실정치에서 크나큰 성공을 거둔다는 가정 하에, 만일 그랬다면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기록되었을 테지만 지금처럼 모든 철학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 불멸의 존재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존경하는 스승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 이유로 고발당해 결국 사형을 선고받아 독약을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플라톤은 철학으로 진로를 변경한다. 소크라테스가 향년 70세로 숨진 399년에 플라톤은 28세였다.
스승 사후에 정치입문을 포기한 플라톤은 이집트·남이탈리아·시칠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40대 초반인 385년에 아테나이로 돌아와 서양 대학교의 원조라 할 아카데메이아를 열었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많은 인재를 양성하면서 집필활동에 전념했다. 주지하듯 그의 저술에는 대체로 스승 소크라테스가 등장해 대화를 주도한다. 스승에 대한 일종의 철학적 오마주인 셈일까.
10권으로 구성된 <국가>는 1권과 나머지 아홉 권(2~10권)의 저술 시기가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1권을 빼고 나머지 아홉 권을, 플라톤이 50살을 넘겨서 썼다는 게 연구자들의 보편적인 의견이다. 원제는 <Politeia>로 국내 번역서 대부분은 ‘국가’란 제목을 달고 있다. 과거에 번역된 책 가운데엔 ‘공화국’이란 제목을 단 것도 있다. 서광사의 박종현 번역본은 “Politeia의 원래 뜻은 정체(政體)이기 때문에 그렇게 제목을 달아야 하지만 ‘국가’가 너무 익숙해 <국가ㆍ政體>로 병기했다”고 밝혔다.
<국가>에서 통치자가 되기 위한 최소 나이로 50세를 제시한 것이 저술시점과 연결되어 흥미롭다. 동양에서 공자가 50살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표현한 것과도 우연찮게 연결된다. 별 의미는 없지만 굳이 따져보면 플라톤의 생애가 공자(BC 551~BC 479년)와 겹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BC 470~BC 399년)와 공자의 생애는 살짝 겹친다. 플라톤은 공자가 죽고 약 반세기 뒤에 태어났다. 플라톤이 60세이던 367년에, 부왕의 왕위를 계승한 시라쿠사이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Ⅱ세의 초청을 받아 철인치자(哲人治者)의 사상을 전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 모습에서 우연찮게 공자의 주유천하를 떠올리게 된다. 플라톤과 공자 사이에는 유사점이 적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동양과 서양 사상의 원류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한 셈이다. 그 물은 아직까지 마르지 않고 흐른다.
플라톤이 꿈꾼 kallipolis의 철인통치자는 어떤 모습인가
<국가>에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주제는 철인통치이다. 일종의 유토피아이자 국가의 이데아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나라’에 해당하는 말이 <국가>에서 ‘kallipolis’이다. 제7권에 등장하는 kallipolis, 즉 ‘아름다운 나라’의 통치자가 철인이다. 플라톤이 말한 이상국가 치자(治者)의 모습은 정치권력과 철학을 한데 합쳐놓은 상태이다.
플라톤의 사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그 저작권 또한 마땅히 플라톤에게 귀속되어야 할 철인통치 이념은 플라톤 이후의 역사에서 수다하게 인용되었을 뿐 아니라 종종 편의적으로 변주되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또는 추진하기 위해 레닌이 주창한 전위정당론에 플라톤의 철인통치 이념이 변형되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철인통치의 전제는 응당 통치계급의 탁월성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는 탁월성이란 전제가 생략된 채 계급 혹은 특정 집단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종종 철인통치가 동원되었다. 소련의 스탈린 통치기를 비근한 예로 들 수 있다. 탁월하기 때문에 통치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통치하기 때문에 탁월하다는 본말전도의 왜곡이 ‘권력만이 정치를 주장하는’ 현실정치에서 심심찮게 일어났다.
현실에서 심심찮게 등장한 이러한 왜곡이 하나의 이유가 되어, 철인통치를 비롯한 <국가>에서 표명된 플라톤의 사상은 전체주의라는 비판에 때때로 직면하곤 했다. 플라톤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한 대표적인 사상가는 칼 포퍼다. 역사를 살펴보면 (플라톤이 꿈 꾼 것과 같은) 이상주의 국가가 자칫 (포퍼가 우려한 것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상존하기에 포퍼가 플라톤을 ‘열린 사회의 적’으로 지목한 게 아주 터무니없는 중상(中傷)이라고 폄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논의를 단순화하여 철인통치 하나만 놓고 보면, 동시에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안한 바로 그대로 철인통치가 시행된다고 한다면, 그때 그 국가에서 철인통치는 전체주의가 아닌 이상주의를 구현할 큰 가능성을 지닌다.
철인이 통치자 수업을 마치고 검증을 받은 ‘탁월성의 인물’이란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플라톤이 제안한 ‘탁월성의 구조’이다. 사회를 분석대상으로 삼을 때 대체로 개인보다 구조를 우선 살펴보는 게 합리적이듯, 국가를 논할 때도 그러하리라고 보아야 한다.
먼저 철인통치가 귀족정치하고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 대부분의 독자가 플라톤의 철인통치 구상에 처자공유가 포함된 사실에 당황할 법하다. 얼핏 보아 플라톤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대목이 사실 가장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처자공유를 통해 철인통치는 귀족정치와 달라질 수 있다.
귀족정치의 기본은 혈통이다. 즉 어떤 피를 물려받았는지, 누구의 자식인지가 탁월성을 입증한다. 반면 플라톤의 철인통치 체제에서는 처자공유로 인해 자기 자식과 아버지가 누구인지 서로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혈통이 소멸한다. 아버지의 탁월성과 아들의 탁월성은 전혀 별개의 현상으로 자리잡는 구조가 형성된다.(그리스 시대인 만큼 남성에 국한하여 설명했다.)
과두제가 일반적으로 귀족정으로 귀결하는 불가피한 경향을 보이는 반면 플라톤의 과두제, 즉 철인통치는 귀족정을 원천 배제한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혈통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전혀 어찌할 수 없는 ‘피’ 대신, 노력여하에 따라 자신이 입증할 수 있는 역량을 탁월성을 근거로 삼기 때문에 철인통치는 ‘민주적’이다. 여기서 과두제와 민주주의가 만나는 역설이 발생한다.
플라톤은 말한다. 통치 집단은 공동으로 식사하고 처자를 공유하며 자기 몸뚱이 외에는 소유하지 말라. 통치하되, 즉 권력을 행사하되 아내와 자식을 (개별적으로) 소유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금과 은을 갖지 말라.
상상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진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게 되리라고. 철학과 국가권력을 그런 형태로 결합하여 주고 그들에게 예쁜 여자,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물려줄 자식을 배제한다면 그들은 정말로 공복(公僕)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이렇게 쉽사리 수긍하게 되는 까닭은 모든 현실 정치에서 (남성 중심으로 서술해서) 여자, 자식, 돈이 반드시 권력 및 권력의 실패/부패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의 서구민주주의 혹은 자본주의 정치에서는 권력과 철학이 결합하는 대신 권력이 사적 소유와 결합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부지불식간에 (금권)과두제가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어진다. 이미 너무 친숙해진 이 체제는 외양의 민주성 아래 본질상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그리고 공공연하게 동시에 암암리에 착취하는 구조를 취한다.
플라톤이 제시한 그런 공산주의적인, 동시에 ‘진정한’ 민주주의적인 통치계급 육성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전제하에서 권장할 만하다. 권장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관점에 따라서는 완벽하다. 다만 이 시스템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지금까지는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유일한 약점이 아닐까.
그런 연유로 플라톤에게는 이상주의자 낙인이 찍히게 된다. 만일 이상주의를 벗어나 현실적합성을 모색하게 된다면, 앞서 지적한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해 이상주의는 전체주의로 타락을 모면하기 힘들어진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기실 모든 이상주의자는 몽상가이다. 문득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의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이 꿈은 짧지만 행복하니까요.” 실현가능성이 없더라도, 꿈꾸기야말로 이상주의자의 특권이다. 현실이 아니라 철학에서라면 꿈꾸기는 더욱더 용인되어야만 한다. 플라톤이 현실정치가가 아닌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렇다면 그를 전체주의자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플라톤에게 이상주의는 고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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