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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만 하는 것
[이병국의 문화톡톡]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만 하는 것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1.03.15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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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일본군 위안부 왜곡 논문이 2021년 벽두부터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국제법경제리뷰(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s) 3월호에 ‘태평양 전쟁에서 성매매 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위안부 피해자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이 같은 망언은 그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생활하는 등 일본 친화적인 인사였다는 점이나 일본 미쓰비시 그룹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와 더불어 연구 논문의 학문적 진실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그의 논문에 대해 앤드루 고든, 카터 애커트 등 같은 하버드대 교수들이 램지어의 논문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CNN부터 알자지라까지 세계 언론은 일본의 만행과 역사왜곡 등을 알리는 비판적 보도를 수행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일본이 왜곡하고자 했던 자신들의 만행을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 왜곡뿐만 아니라 소수자, 피해자를 억압하고 착취해 왔던 것들이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 있는 경우가 많다. 알게 모르게 자신이 외면하고 있던 이러한 억압의 양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넓게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대대적으로 폭로하는 것은 언중의 자각과 언론의 힘이랄 수 있겠으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는 타자의 아픔을 먼저 감각하고 같이 아파하는 문학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문학은 구체적인 일상 속에 투영된 삶의 양태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진 행동 양식들을 재생산하는 한편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반동적 행위를 동시에 수행한다. 이러한 양가적 토대 위에 구축된 문학은 강제된 아비투스(habitus)를 내면화하면서도 그것을 돌파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인의 정체성 문제는 오랜 역사를 통해 공고해졌으나 그것을 돌파하려는 문학적 시도는 근대 이후에 본격화되었다. 이광수의 『무정』이 그려내고 있는 ‘가르치는 남성’과 ‘계몽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구도가 가장 일반적인 예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여성에게 강요된 순종적인 상을 탈피하려는 시도 역시 다양하게 나타났다. 나혜석이 「경희」에서 그려내고자 했던 주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여성도 그중 하나다. 나혜석은 이 소설을 통해 전통적 삶과 현대적 삶이 교차하는 시기에 신여성으로서 자신의 주체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여성상을 그려내었다. 하지만 ‘경희’로 대표되는 신여성은 자기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과 내면화된 남성/권력의 무의식적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양상에 머무르는 한계를 보여주는데 기회와 가능성은 사회적으로 상상된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2018년의 소설적 동향을 살펴보자. 최근 한국문학 장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논의를 들자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이에 대한 필자들의 다양한 논의들을 굳이 여기에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으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을 필두로 소외된 존재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소설적 양상에 대한 사회학적이고 미학적인 논의는 2018년의 문학적 장에 중요한 키워드임은 분명하다. 조남주의 소설이 이광수식 세상에서 나혜석의 투쟁을 거쳐 온 이후를 다루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투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상상된 그 이상의 삶이 거부된 김지영의 삶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객관적 자료와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의 “객관적 현실의 총체적인 상(像)”1)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기록적 성격이 강하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 소설은 일종의 “최종 단행본이 되기 이전의 자료, 공식 자료 이전의 자료, 과정을 보여주는 회의 자료, 최종 결과물이 나오면 결국 폐기”되는 비공식 문서로써 “회색문헌”2)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그 자체로 완결된 자료나 공식 자료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설쓰기의 행위가 지속되는 것은 사실의 적시가 아니라 진실의 탐구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전-거기 사건을 지금-여기로 끊임없이 불러와 재현하는 소설의 의미를 등한시할 수 없는 것이다.

3.

문제는 이에 대한 ‘미적 실효성’을 갈구하는 입장에 있다. 문학적 재현을 어떠한 윤리적 의도를 가지고 수행되는 행위로 재단하려는 것은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비평적 참견이 될 위험이 다분하다. 작품이 갖는 효과는 그것이 정치적 차원이든 아니든 작품에 내재된 혹은 반영된 존재와 그 존재를 둘러싼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미 의미화되기 때문이다. 써야만 하는 당위는 사회적 억압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존재의 인정 욕망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면 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 이광수의 남성 세계로부터 억압된 나혜석의 경희가 그 단적이 예일 것이며 최근 성적 소수자를 다룬 일련의 소설이 보여준 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영화 속에 퀴어를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조건 합당한,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있어야 하는 거였다. (중략) 그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세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중략) 평범하고 발랄한 동성애자들은 현실성이 없고 순전히 다 지어낸 것 같겠지. 애초에 보통의 존재로 생각한 적조차 없었겠지.3)

 

존재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측면에서 어떠한 것도 강요받지 않아야 한다. 무엇이든 발화할 수 있는 자유가 그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사적 경험이 가벼운 연애나 한때의 추억을 반추하는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은 경계해야할 테지만 그것을 이유로 억압될 이유는 없다. 박상영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표제작에서 말하고자 한 것 역시 이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의 소설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의 자유분방함을 재현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으로 억압되고 소외된 성적 소수자로서의 삶이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성적 소수자라면 응당 지녀야 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고뇌를 강요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권위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미학적인 결함이란 인물이 수행하는 행위나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오는 거라기보다는 사회적 소수자를 “애초에 보통의 존재로 생각한 적조차 없”던 사회적 권위가 지적하는 의미에의 강요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합리적 이성을 중시하는 남성 중심적 사고와 가부장적 문화야말로 권력의 강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세계를 단일한 방식으로 규정하고 부당한 현실을 강요한다. 그로 인해 억압받는 사회적 소수자는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요구를 내면화한 채 자신의 목소리를 상실하게 되고 사적 기억을 공적 가치에 복무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한 개인의 정체성은 자신의 서사를 써나가는 수행적 존재라는 측면에서 주체의 저자성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기결정권을 가진 고유한 존재로서 그들의 삭제된 목소리를 복원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사진출처-현대문학 홈페이지
사진출처-현대문학 홈페이지

 

그런 점에서 최근 김숨이 수행하는 일련의 소설적 작업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사적 기억의 역사를 들추어냄으로써 과거의 사건을 (분절된 회상의 형태로) 재현하고 의미를 도출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비록 ‘회색문헌’으로써 기능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과정(『L의 운동화』, 민음사, 2016)을 통해 한 시대의 아픔을 그려내었던 김숨이 이후 주목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이다. 참혹한 역사를 몸으로 겪어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통해 역사가 남긴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현하려 하는 김숨의 작업은 『한 명』(현대문학, 2016)을 거쳐 『흐르는 편지』(현대문학, 2018)와 『숭고함이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 2018)로 이어진다.

문학은 관습적으로 강제된 부조리한 현실의 폭력을 기록하고 이를 가시화하여 삶의 진실을 알림으로써 고착된 사고에서 벗어나게끔 한다. 김숨의 소설은 폭력적 현실을 경험한 한 명, 한 명의 고백을 기록하고자 한다. 이는 섣부른 화해를 위한 선행 작업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침묵을 강요당한 목소리의 증언을 통해 그동안 그들에게 가해진 구조적 폭력이 지워나간 역사를 기록하여 인간의 존엄을 회복할 지평을 마련하고자 함이다. 주체적 삶의 기회를 빼앗긴 이들의 증언은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4.

김숨의 『한 명』은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 남았을 때를 상상하여 쓴 기억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때의 기억은 위안부 피해자 한 명의 사적 기억이기보다는 공식적 자료들과 수치를 인용한 사회적 기억이라고 볼 수 있다. 사적 기억이 공적 기억으로 전유되는 방식인 셈인데 이를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 『흐르는 편지』라고 할 수 있겠다. “어머니, 나는 아이를 가졌어요”(7쪽)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열다섯 살의 위안부 소녀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흐르는 편지’가 어머니에게 가 닿을 거라고 기대하는 독자는 없다. 서술자 역시 편지가 어머니에게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편지는 독자를 상실한 채 기술되는 한 개인의 내밀한 고통의 기록이 된다. 전쟁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그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 개인의 삶을 무참히 파괴하게 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기록. 육체에 각인된 고통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 정신적인 고통으로 먼저 발현된다. 비록 군인 역시 순수한 악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남성 중심적 세계를 지탱하는 도구로써 수행되는 군인에 대한 연민보다 앞서는 것은 위안부 소녀의 고통이다. 김숨은 가장 직접적으로 고통을 재현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녀의 고통을 체감하도록 하며 그녀의 기억을 공유하고 질문하도록 한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존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작동하는 세계로 인해 자기 자신을 잃고 타자가 되어 버린 고통 속에서 “내 이름은 금자…… 당신 이름은 뭔가요?”(214쪽) 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녀가 재현하는 고통과 삭제된 삶이 빚어내는 역사적 공백 사이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자리에 놓인다.

 

어머니, 그런데 나는 무슨 죄를 지은 걸까요.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먼 데까지 끌려와 조센삐가 되었을까요.4)

사진출처-현대문학 홈페이지
사진출처-현대문학 홈페이지

 

그러나 섣부른 대답은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고 호도할 수 있다. “조센삐가 되었을까요”라고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일제에 지배를 받았던 당시의 특수적 상황에 천착하여 민족주의적인 차원에서 대답하게 된다면, 오히려 이는 김숨이 소설을 통해 재현하고자 하는 바와 크게 유리될 수밖에 없다. 그녀(들)이 처한 상황은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에 가깝다. 그녀(들)의 현실에는, 단지 과거 한 때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그녀(들)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저 질문이 요구하는 진실은 특수한 한 때에 대한 기억이 아닌 지금, 이곳에 작동하는 허위를 깨뜨림으로서 보편적 진실에 가 닿을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이를 위해 김숨은 상상으로 구축된 사적 기억의 역사를 증언을 통한 공적 기억의 기록으로 재구축하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증언을 소설로 구현한 두 편의 소설이 그것이다.

2018년 국가 공식 기념일로 지정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8월 14일)에 맞춰 출간된 『숭고함이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살아온 날들의 기억을 독백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다. 이 소설들은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기록함으로써 우리가 통상 보아왔던 문학적인 윤문의 과정이 다소 배제된 형식을 취한다. 이는 소설이 감당해야 하는 사건의 실제가 허구를 압도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선택한 방법인 셈이다.5)

사진출처-현대문학 홈페이지
사진출처-현대문학 홈페이지

 

역사적 범죄의 피해자인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는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안개 속의 삶’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아온 할머니들은 지난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침묵을 강요받았다. 그들은 말할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자신을 표현할 어떠한 수단도 지니지 못했다.

 

나는 말을 못해.

말로 짓는 죄도 있어.

사람들은 내가 말을 잘한다지만,

나는 말이 무서워.

한 말을 되씹고 되씹어.

그 말은 하지 말걸,

그 말은 꼭 했어야 했는데.

그 말, 그 말, 그 말……6)

 

“너는 아무도 없지 않니.”

그 말,

그 말이 나를 아무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어.

말이 무서워.7)

 

나 말 못 해, 나 말 못 했어.

약해서, 여자라서.8)

 

말은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동시에 존재를 박탈할 수 있는 위협적인 힘을 지닌다. 그녀(들)에게서 말을 빼앗은 것은 가부장제 사회의 권력이다.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는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가부장제와 민족주의를 채택하였으며 이에 합당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존재들을 끊임없이 배제해왔다. 근대 국가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하는 차별의 장치로 가부장제는 남성 중심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한편으로 거기서 벗어난 인간의 존엄성, 특히 여성의 존엄을 고려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박정희 정권 때 맺은 한일협정 내용에서도 빠져 있었다.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여성은 체제 수호를 위해 억압하고 부정되어야 하는 타자일 따름이었다. 그러한 타자에게 말은 허용되지 않았다. 타자의 자리는 “아무도 없는” 자리,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자리일 뿐이었다.

사진출처-현대문학 홈페이지
사진출처-현대문학 홈페이지

 

이런 상황에서 타자가 자신을 ‘나’로 발화하는 것은 중요한 전환에 놓인다. 기존 권력에 의해 지정된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의 단초는 나를 ‘나’로 발화하고 ‘나’를 수행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했어.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그 끔직한 일을 당하는 여자가 또 있으면 안 되니까.”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내가 참으라는 것은 아픔을 참으라는 뜻이지 말을 참으라는 뜻이 아니야.”

“말해야 해. 그래야 사람들이 알지.”9)

 

내가 ‘나’라고 발화하는 순간 ‘나’는 하나의 언어를 나의 것으로 만들어 ‘나’를 억압하던 권력의 구조를 ‘너’로 만든다. 말을 억압당한 ‘나’가 언어를 획득함으로써 타자인 ‘나’는 주체의 자리, 저항적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인식 주체로서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행위, 그럼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다시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영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의 되찾음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사적 기억의 역사로서 ‘나의 이야기’를 발화하는 것이며 이를 공적 기억의 장으로 확장하여 공동체의 가능성을 여는 데에 있다. 김복동 할머니가 “나 외로운 건 못 느끼는데,/남 외로운 건 느껴”(43쪽)라고 말함으로써 타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녀 자신의 경험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획득하는 ‘숭고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상상으로 구축된 소설적 세계에서 한 개인의 사적 기억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증언소설까지 김숨이 수행한 증언의 기록은 역사적 사건이 남긴 지금, 여기의 상처에 접근하여 잃어버린 말을 찾아 삭제된 존재를 되찾는 여정이다. 그 과정에서 김숨은 발화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명확하게 하였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현재를 바탕으로 구축된 상상의 차원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와중에 나타나는 왜상(anamorphosis)의 방식이 아닌, 우리 삶의 기본 조건으로 불가피하게 말해질 수밖에 없는 직접성의 형태로 억압된 목소리를 구현함으로써 김숨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대담하게 풀어낸 것이다.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은 단일하지 않다. 그럼에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목소리가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만 한다.

여전히 강력한 자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무정』의 세계에서 강제된 상상력 바깥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억압된 존재의 사적 기억의 역사와 그것을 직접 발화하는 목소리를 기록해야 한다. 이는 김숨 뿐만 아니라 김금희, 최은영, 박민정, 강화길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모색되고 있다. 이런 노력들에 의해 우리는 억압되고 소외된 그들이 괴물이 아니라 우리의 다른 모습임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대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윤리적인 내용이 미학적 형식 속에서 억압되고 소외된다면, 그럼으로써 또 다른 보편적 가시성의 영역으로 목소리가 은폐된다면 문학은 강제된 아비투스를 돌파할 기회를 잃게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러한 고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온 한국문학의 방향성 속에서 쓸데없는 말일 수도 있다. 내용의 다양성만큼이나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작가들의 분투는 지속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찌되었든 과거의 일에 대한 대답을 하는 소설이 아닌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소설, 단지 과거에 있었던 사적 기억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넘어 그것이 지닌 사회적 의미를 상상하고 적어나가는 예언적인 소설이 지금 쓰이고 있다. 그 모든 노력들이야말로 숭고함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1) 김경식, 「루카치 장편소설론의 역사성과 현재성」,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황정아 엮음, 창비, 2015, 19쪽.

2) 강영숙, 「폴록」, 『회색문헌』, 문학과지성사, 2016, 38쪽.

3)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문학동네, 2018, 180~181쪽.

4) 김숨, 『흐르는 편지』, 현대문학, 2018, 291쪽.

5) 김숨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긴 생을 살아낸 한 인간으로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할머니들의 말을 재구성하고 제 문장과 섞으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갔는데,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중하다보니까 시 같은 형식이 됐어요.”라고 말한다. 서사적 형태를 포기하고 서사시적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사건의 경험 주체인 할머니들의 증언이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그 앞에서 소설의 문법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 끝까지 써보고 싶었다”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 증언소설 낸 소설가 김숨」, <경향신문> 2018. 8. 1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141618001&code=210100

6)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현대문학, 2018, 41.

7) 같은 책, 148~149쪽.

8) 김숨,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현대문학, 2018, 83쪽.

9) 같은 책, 94~95쪽.

 

 

*이 글은 필자가 『문학에스프리』2018년 겨울호에 실었던 같은 제목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4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동시대 한국인이 쓴 시와 소설 읽는 걸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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