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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전공자의 눈으로 본 마니에르, "음악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 <마니에르 드 부아르> 음악편 독자 리뷰 ⓸
클래식 전공자의 눈으로 본 마니에르, "음악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 <마니에르 드 부아르> 음악편 독자 리뷰 ⓸
  • 정혜수
  • 승인 2021.04.08 1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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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에르 드 부아르> 음악편 독자 리뷰 ⓸

예술이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매체다. 글로서 전하면 문예가 되고, 소리로 전하면 음악이 되며 그림으로 전하면 미술이 된다. 이번 <마니에르 드 부아르>(이하 <마니에르>) 3권 『뮤직, 사랑과 저항 사이』는 음악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여러 비평가들의 글을 담았다. 

이번 <마니에르> 3호는 음악이 가진 사고의 힘을 전한다. 필자는 여기서 자신과 대중, 그리고 세계로까지 미치는 음악의 영향력을 느꼈다. '음악가'로서의 '나'는 어떻게 음악을 대해야 할지, 대중은 이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나아가 음악이 세계를 어떻게 이어주는지에 대해 말이다.

 


음악적 이상 VS 차가운 현실

필자는 이상주의자다. 그래서일까. 주위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음악학도의 길을 선택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지 행복이 별거 있으랴’하는 생각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의 진로는 확고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막상 전공의 길로 발을 뻗으니 꿈보단 고민이 늘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현실적인 조언들,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해 주는 사람들 덕에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 공부에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비용과 시간, 음악에는 큰 노고를 들여야 한다는 동기들의 푸념, 차라리 공무원이나 승무원을 준비하라는 가족들, 거기에 직접 아르바이트와 레슨을 몇 탕씩 뛰어보며 느낀 돈벌이의 현실까지. 다시 0부터 시작된 나의 진로 고민은 이상과 현실의 천칭 사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잡지를 펼쳐본 것이다.

 

 

클래식 전공자인 내 가슴을 뛰게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댄스홀의 이야기였다. 정원사로 일하면서도 자신의 음악을 이어가는 커트니. 빈민가 출신의 음악가들을 동경하며 언젠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지만 현실은 결코 녹녹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커트니에게, 커트니는 음악에게 서로의 희망이 되어 주기에, 녹음실로 발걸음을 돌리는 그를 보며 나에게 과연 음악이란 무엇인지 고찰했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의 글은 모든 시대의, 모든 이의 음악을 아우른다. 바흐부터 BTS까지, 그리고 클래식부터 대중가요까지. 음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모여 모든 음악은 하나임을 나타냈다. 문화는 융합하고 변화하며 발전하기에, 어쩌면 클래식만 고집했던 내가 나를 고립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음이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음악이냐 선동이냐 

흔히들 세상을 볼 때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마니에르> 3호 『뮤직, 사랑과 저항 사이』에서는 이에 비판적인 청각으로 들어야 한다고 더한다. 악보 위에 이념의 기호를 거두어라는 편집자의 말에서부터 촉이 왔다. "아, 음악과 사고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구나"

살아있는 동안 의도였든 아니든 눈을 통해 다양한 장면을 바라보게 되듯, 귀를 통해 다양한 소리를 경험하게 된다. ‘See’와 ‘Look’이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Hear’와 ‘Listen’도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가. 감각기관을 통해 뇌로 전달된 신호는 어떻게든 우리의 뇌를 흔들어 놓기 때문에 소리를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의식적인 필터링이 필요하다. 

 

 

크리스티앙 크슬레의 글에서 일본이 그들의 포로를 행복하다고 느끼게 만들기 위해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사용했다는 내용을 보았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유럽 국가만의 일은 아니다.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기 이전부터 한국 점령에 대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음악을 통한 선동이었다. 학교의 음악 교과서는 이미 일본 노래들로 가득했고, 우리는 여러 친일파의 음악을 흥얼거리며 자연스럽게 일본의 문화에 동조되었다. 겉으로는 항일의 필요를 느꼈음에도 말이다. 

우리가 소리를 어떤 식으로 듣고 생각하냐에 따라 우리를 치유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음악이 되기도, 사고의 틀을 바꾸는 선동이 되기도, 또는 지나가는 소음이 되기도 한다. 애국가, 교가의 존재 이유도, 바그너의 음악이 유대인들에게 금기시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의 3편이 이야기하듯, 우리는 음악에 대한 사고의 틀을 의식하고 해체해볼 필요가 있다. 

 

불협화음도 필요하다.

불협화음을 금기시하던 시대가 있었다. 불협화음이 사람들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신성모독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이는 곧 우리에게 협화음이 감미롭고 아름다운 것이며, 음악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틀을 내세웠다.

우리네 세상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세워놓고는 대중에게 전파해 외형에 대한 우월감과 열등감을 심어주는가 하면, 인종까지도 우세와 열세를 나눈다. 이는 흑인과 백인 간의 싸움에서 특히 도드라졌다. 

 

 

아미리 바라카의 “재즈가 블루스에서 출발한 이유”는 이런 사회의 모습을 잘 드러냈다.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시절, 백인들은 팝 음악을 주류로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노예제의 폐지로 인해 백인의 노예로 일했던 흑인들이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스레 음악을 접했고, 그들만의 음악인 레그 타임, 블루스로 발전했다. 특히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버전인 재즈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고,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인종의 사랑을 받는 음악이 됐다. 

아미리 바라카의 글을 읽으며 내게 불협화가 낳은 음악이 세상을 협화로 이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재즈는 불협화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문화다. 당시에는 노예들이 악기 특히 드럼을 만지지 못하도록 금지했었다. 대부분의 흑인이 백인의 노예였던 것을 보면, 백인이 향유하던 대중음악을 즐기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흑인은 남북전쟁 시기 전시상황을 기회로 군용 악기를 수집했고, 이러한 악기로 음악을 제작하고 공연하게 된 것이 바로 레그 타임이었다. 그야말로 인종의 불협화가 낳은 장르가 아니겠는가. 이후 재즈는 흑인문화를 널리 알리는 데에 기여했고, 백인에게도 이는 흑인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전 세계 인구는 2019년 기준 약 77억 명. 77억 명의 각기 다른 사람이 모여 지구촌을 형성해 살고 있다. 그만큼 인간의 사고와 세계는 끝없이 다양하다. 그리고 소리는 그 모든 인간들에게 최초의 기억 체계로서, 최초의 공통언어로서 작용한다. 음악을 통해 모든 인간과의 소통이 가능하며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 3편은 우리에게 음악의 가능성을 모색하게끔 한다. 나에 대한, 우리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글 · 정혜수

이화여자대학교 작곡과 휴학. 예술, 특히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며 글을 통해 예술의 매력을 전하고 싶다. 예술에 탐닉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두려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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