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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촌스러운 요구들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법 – 전형을 뒤흔든 배우 김혜수
[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촌스러운 요구들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법 – 전형을 뒤흔든 배우 김혜수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1.05.1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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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에 띄기 가장 좋은 방법은 대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때 그곳이 요구하는 것에서 한 발 비켜나는 순간, 찬사이든 비난이든 판단할 대상이 되며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각인이 숙명인 배우는 돌출이 선사할 가능성에 간절해지기 쉽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올 수 없는 저런 인간을 그려낸다는 것, 그래서 비슷비슷한 인물들 사이에서 전에 본 적 없는 인물로 빛난다는 것, 이는 그만큼 배우를 기억하게 할 기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었다며 찬사를 받는 배우들은 그들의 전작과 완벽하게 거리를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로움, 그것은 전에 본 적 없는 성격을 본 적 없이 표현하는 것으로 가장 쉽게 차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가 많은 것도, 온다 해도 적절하게 표현할 기회로 잡는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가끔은 이 돌출이 독이 되어 그가 원래 그랬던 사람인 것처럼 박제되어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무엇인가가 누군가의 시그니처가 된다는 것은 그것을 벗어난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의미 역시 포함하는 탓이다. 신선함과 당연함, 이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이뤄낼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칫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때의 요구를 차근차근 축적한 끝에 일탈을 이뤄내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35년 간 배우 김혜수가 스스로를 증명해낸 방법이기도 하다.

김혜수는 배우다. 새삼 이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누구보다 그가 ‘배우같다’는 수식 속에 깊이 파묻혀 정작 ‘배우로서’ 어떻게 자신을 빚어 갔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설명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를 ‘배우같다’고 칭할 때 따라붙는 생각들, 가령 ‘화려하다’, ‘눈에 띈다’, ‘파격적이다’와 같이 현실과 거리를 둔 심상들은 정작 그가 ‘배우로서’ 영화에 스며든 방법과 정반대에 있다. 김혜수가 어떤 것에도 거리낌 없이 오롯이 홀로 서 있었을 것이라는 환상은 그가 그에게 쏟아졌던 요구를 수용한 끝에야 완성 시킨 결절점들과 분명한 거리를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어떤 시간들이 여성에게 원했던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왔다.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거나 육체로 말을 걸고, 침착하게 상황을 간파하여 정리하거나 아이를 위해 희생하려던 여성 등 김혜수가 표현해 온 이들은 사실 매우 전형적인 여성 인물군 사이에 있다. 그럼에도 김혜수가 현실 밖에 존재하는 이인 듯 인식된 것은 그가 이 전형 속에서도 그만의 인물을 완성 시켰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 테다. 당겨 말해 김혜수는 차근차근 전형을 밟았다. 그리고 쌓아온 전형을 손에 쥔 채 일탈을 만들었다. 갑작스런 돌출이 아닌 보편을 통한 특수의 장악, 이 긴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선 그에게 ‘귀여운 어린 여성’이 요구 되었던 때로 돌아가야 한다.

 

2.

많은 배우들의 처음이 그렇듯이 그가 스크린에 인사를 건넨 첫 작품에는 그의 영역이 뚜렷하지 않았다. <깜보>(1986)는 두 남성의 이야기가 중심이었고, 이 사이 나영은 두 사람의 사건 전개를 위한 에피소드처럼 등장했다. 동그랗게 뜬 눈과 하이톤의 목소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놀란 모습으로 나타난 나영은 당시의 한국영화에서 어린 여성이 어떤 요구를 받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물론 비슷한 시기의 영화들을 떠올렸을 때 젊은 여성이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는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밝아야 했던 나영은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다행히 이 신선함은 <첫사랑>(1993)으로 흥미롭게 이어질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김혜수는 이 발랄함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했다.

 

영화 [첫사랑](1993)
영화 [첫사랑](1993)

<첫사랑>에서 김혜수는 짧은 커트 머리의 대학생으로 등장해 당차게 자신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연극반으로 초빙한 연출가를 짝사랑하는 영신은 가녀리고 수줍은 이의 짝사랑과 완전하게 멀어져 있었다. 마치 인형같은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스럽던 나영처럼, 영신에게는 소년의 발랄함이 묻어 있었다. 이 모습은 <첫사랑>이라는 제목을 통해 쉽게 떠올릴 첫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비웃듯 전환시킨 것이었다. 김혜수는 영신을 만나면서 큰 키와 시원시원한 몸짓으로 신선하면서도 담백한 사랑의 서사를 쓰고 있었다. 영신은,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런 것처럼, 분명 실패할 그의 사랑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를 궁금하게 했고, 그 순간이 왔을 때 으앙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 우는 것을 사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던 이들에게 사랑이, 그리고 거절이 이렇게 시원하게 울어 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한 순간으로 이야기해 준 셈이었다.

 

영화 [닥터봉](1995)
영화 [닥터봉](1995)

이렇게 김혜수에게 처음 주어졌던 귀엽고 어린 여성의 역할은 <첫사랑>의 변주를 통해 다채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펼쳤지만, 전형을 벗어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닥터봉>(1995)이나 <미스터 콘돔>(1997), <찜>(1998), <신라의 달밤>(2001)에서 김혜수는 얼토당토 않는 상황에 눈을 치켜 뜨고 상대를 흘겨보며 큰 소리를 냈지만 이 역할들은 김혜수에게 나영에서 영신으로의 변화와 같은 순간을 선사하지는 못했다. 기획 영화의 유행 속에서 캐릭터들은 비슷해졌고 젊고 당당한 여성, 이들에게 닥친 어이없는 해프닝들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일정 부분 정해진 툴이 마련된 상태였다. 영화의 내용 역시 정해진 흐름에서 굳이 벗어나려 하지 않았고, 이 영화들은 김혜수가 목소리를 빠르고 높은 톤에서 점차 차분하고 안정적인 목소리로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납작해져 있었다. 새로운 듯 보였지만 결국엔 보수적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들 사이에서 김혜수는 영화의 초반 당당해야 했던 ‘신세대’의 상징 같던 모습만이 마치 그인 듯 고정될 위기에 있었다.

 

영화 [좋지 아니한가](2007)
영화 [좋지 아니한가](2007)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는 ‘톡톡 튄다’는 말로 감추어왔던 ‘어리다’는 수식어들을 적극적으로 밀어냈다. 다양한 소재와 시도가 쏟아지던 2000년대, 김혜수는 철없는 이의 유희로 그만의 귀여움을 다시 찾고 있었다. 흔히 요구되던 애교나 아양과는 거리를 둔 이 변화는 그의 의도라기보다 새로운 얼굴을 내민 그에게 많은 이들의 응원과 해석이 안긴 선물 같은 것이었다. <좋지 아니한가>(2007)에서 고장 난 전기밥통의 공격으로 밥풀을 뒤집어 쓴 김혜수는 무심한 듯 가족에 섞여 든 미경의 모습, 그것이었다. 목이 늘어난 반팔티에 정리되지 않은 머리, 백수의 상징처럼 보이는 트레이닝 복은 그가 새로운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미경이 <이층의 악당>(2010)의 연주로 옮겨갔을 때, 그리고 홀로 예민함에 빠져 관객에게는 웃음을 선사했을 때 그가 그린 또 다른 얼굴은 김혜수의 영역을 확장했다. 상대의 의도를 확대해석하며 점차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던 연주는 더 이상 김혜수가 몇 가지의 단어로 정리될 수 없는 배우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었다.

 

3.

<어른들은 몰라요>(1988)에서 그가 유치원 선생님 유라였을 때, 그는 최대한 차분해져야 했고 그만큼 현명해야 했다. 그는 전직 권투선수 준이 의견을 구할 때에도, 아이들이 질문을 할 때에도 늘 적절한 답을 내놓아 바른 길을 보여줘야 하는 이였다. 김혜수에게 유치원 선생님 유라는 그 앞에 또 다른 여성상이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발랄함의 정반대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인물들,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길을 제시하는 인물들은 김혜수가 보여줘야 할 또 한 부류의 여성이었다.

누군가의 길잡이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이 인물들은 중심에서 멀어지기 쉽다. 사건을 끌어가는 인물들에게 힌트를 주거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를 보여주기보다 다소 기능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혜수는 중요한 시기를 짚어가는 영화들에 사이에서 기꺼이 이 기능을 수행하고자 했다. 조선시대에는 한 관상쟁이에게, 근대 초기에는 야구를 모르던 이들에게, 식민지기에는 민족의식 없던 한 청년에게, 그리고 IMF 시기에는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는 낮은 목소리,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 행동을 최대한 절제한 몸짓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려 했다. 이는 그의 차분한 무게감으로, 굳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능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임에도 그만의 방식으로 도드라졌던 것, 그는 시기를 넘나들며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 [관상](2013)
영화 [관상](2013)

<관상>(2013)에서 연홍의 복식과 행동은 충분히 화려했고 그만큼 그에게 시선을 잡아두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그가 도드라지기 위해서라기보다 누군가를 새로운 상황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려는 치장이었다. 이는 <모던보이>(2008)의 난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난실은 현실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을 위해 놓인 이였기에 그의 꾸밈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것이었다기보다 이를 알아챌 수 있는 이를 향해서만 유효한 것이었다. 연홍과 난실이 화려하게 스스로를 꾸몄던 것은 상대가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알아챈 후부터는 주목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관상쟁이가 한양에서 활약할수록, 청년이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고민하게 될수록 연홍과 난실의 자리는 점점 줄어들거나 스스로를 숨겨야 했다. 그럼에도 김혜수가 연홍과 난실이었기에,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입꼬리를 올리고 슬쩍 올려다 보는, 찡끗하는 코와 눈의 작은 움직임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다. 특히 <모던보이>의 난실이 현실의 외면한 채 흥청대던 청년을 훑을 때, 경멸을 감춘 듯 지그시 바라보던 눈길은 정체성을 잃은, 아니 관심조차 없는 이들에게 난실과 같은 인물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은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2018)
영화 [국가부도의 날](2018)

당시의 상황만큼이나 어두운 잿빛이 채운 영화 <국가 부도의 날>(2018)에서 시현은 누구보다 분노했고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분투했지만,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성의 모던보이를 바라보던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엉킨 시선은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도 안일한 대처만 내놓는 인간들에게 옮겨가 있었다. 낮지만 힘주어 말하던 목소리에는 점차 절망이 섞여 들었지만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의 시현은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듣는 이들을 위해 꾸미지 않았고, 오히려 딱딱해졌다고 할 만큼 상황이 주는 무게 속에서 경직되어 있었다. 그의 경직은 당시 이 나라가 어떤 상황에 속해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관객들은 누구보다 시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이후에 대해 발을 내딛는 유일한 인물로 변해 있었다. <YMCA 야구단>(2002)의 정림으로 깔았던 초석을 뛰어넘은 듯한 시현의 모습은 방향을 제시하는 인물이, 그리고 여성이 어색하지 않게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었다.

 

4.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관상>이나 <모던보이>의 카메라가 보여주었던 김혜수를 향한 관능적인 시선, 바로 그것의 발현이 상대를 끌고 간 힘 아니었겠느냐고. 그의 이름을 옆에 늘 한 영화제와 드레스라는 키워드가 따라붙는 것처럼, 그가 연기했던 많은 역할에서 가장 도드라졌던 것은 몸이 보여준 매력이 아니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35편에 달하는 그의 영화를 살핀다면 그가 흔히 섹시함이라 불리는 것들로 자신을 드러냈던 자품들이 손에 꼽을 정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몸의 선에 도드라진 ‘여’배우에 대한 왜곡된 두 가지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배우는 주어진 몸이 주는 매력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만약 이를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면 그 외의 것들은 그저 의외의 영역으로 남겨도 상관없다는 생각들. 물론 이는 배우가 아닌 도드라진 몸을 지닌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편협함이기도 하다.

 

영화 [쓰리] 중 [메모리즈](2002)
영화 [쓰리] 중 [메모리즈](2002)

재미있게도 그는 이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아니 오히려 강화했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가 선택했던 작품들은 현실 밖으로 던져진 인물들이었다. 이는 <해피엔드>(1999)가 1990년대 후반 담백함과 눈물을 앞세웠던 멜로 영화의 종료를 알리면서 시작된 하나의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대에 여성들은 다수의 영화에서 혼란 속에 있었고, 그가 <쓰리>의 <메모리즈>(2002)나 <얼굴없는 미녀>(2004), <분홍신>(2005)에서 보여준 과거에 대한 광적인 집착, 현실에서의 유리, 의도적인 망각 등은 이 흐름의 극단에 있었다. 이 작품들에서 김혜수는 인물의 혼란을 모두 몸으로 표현해야 했고 그만큼 그의 이미지가 굳어질 수밖에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영화 [얼굴없는 미녀](2004)
영화 [얼굴없는 미녀](2004)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기억을 더듬어가는 <메모리즈>에서 김혜수는 처음으로 창백한 얼굴을 내밀었다. 생기 넘치던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의문이 서린 얼굴은 그가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메모리즈>의 몽환적인 얼굴이 <얼굴없는 미녀>의 지수로 이행했을 때, 그의 얼굴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여기저기서 ‘파격’이라는 수식으로 호들갑스레 전시하려 했던 몸이었고 그가 지수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변화는 가려졌다. 지수는 충분히 파격적이고 도발적이었지만, 그 이상을 보여주기에 영화의 설정은 위험하고 또 위험했다. <분홍신>의 선재도 예민함 속에 문득 문득 드러나는 광기 어린 모습이 이전의 발랄함이나 차분함과 거리를 두었지만, 그가 뚜렷한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점을 찍기에는 아쉬웠다. 그러나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폈을 때, 그는 이러한 위험 혹은 아쉬움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듯하다. <분홍신>이후 선택했던 <타짜>(2006)의 정마담은 이 모든 위험을 깡그리 모아놓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그는 완벽한 전환을 맞이했다.

 

영화 [타짜](2006)
영화 [타짜](2006)

‘도박의 꽃, 설계사’로 등장한 정마담은 여배우 그리고 여성에게 쏟아지는 기울어진 관심을 역이용하면서, 이를 전시로 소비만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날렸다. <타짜>에서 김혜수는 정마담 속에 그가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인물들의 꾹꾹 눌러 담았다. 설계를 위해 필요했던 ‘예림’은 그가 가장 처음 발랄함으로 무장해야 했던 그 시기의 김혜수를 불러왔고, ‘정마담’이 고니나 광렬을 자신이 펼친 판에 앉힐 때에는 냉정한 계산을 돌린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집약체를 넘어 그 이상의 인물,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예쁜 칼’이라는 완벽한 캐릭터의 창조로 이어졌다. 누군가를 홀리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이용하면서도, 그 이상을 탐하려 했던 욕망체 정마담은 관음적 시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몸을 연기에 가장 적합한 요소로 만들어냈다. 역설적이게도 도박과 담배, 그리고 섹슈얼한 이미지 속에서 김혜수는 시선의 편협함을 월담하는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다.

 

5.

배우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설사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이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하거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에게 밝히는 것은 꽤나 따가운 눈초리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김혜수가 <미옥>(2017)을 언급할 때 묻어나온 솔직한 심정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책임감의 발현처럼 보였다. 201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영화계 내 ‘여성’에 집중한 논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를 반영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김혜수는 자신의 영화로 직감한 듯 했다. 이 영화들은 기존의 영화들과 다르게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했지만, 이 떠들썩한 홍보 자체가 우스운 것처럼 영화 역시 남성의 자리에 여성을 끼워 넣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여성에 대한 가장 큰 착각, 그러니까 여성은 모성 앞에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라는 환상을 갈등 해결의 알리바이로까지 배치하면서, 이 영화들이 특별한 고민 없이 유행을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증했다. <미옥>은 이 무지한 영화들 중 가장 최악의 결과였고, 미옥이었던 그의 사과는 지금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증거였다.

많은 여배우들이 자리했던 곳에 흔히 놓인 엄마라는 호칭은 김혜수에게도 옮겨갔다. 이 호칭은 참 이상한 것이어서 그들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재고 자르는 데 유용하게 기능하며 인물의 성격을 가늠했다. 엄마로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거나 엄마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거나와 같은 판단들은 우리에게 고정된 ‘엄마’의 상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호칭 속에 인물의 욕망과 가치를 가둔 셈이었다. 그러나 엄마에 대한 기대는 견고했기에 이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비난과 일정 이상의 잔혹함을 각오해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김혜수가 ‘엄마’라는 호칭이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그렇게 불리는 인물들로 분(扮)한 것이 도전이 되는 이유였다.

 
영화 [열한 번째 엄마](2007)
영화 [열한 번째 엄마](2007)

<열한 번째 엄마>(2007)에서 여자는 열 명의 엄마와 만났다 헤어졌던 아이의 잔소리를 듣는 이였다. 아이는 여자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쉽게 엄마라는 말을 입에서 꺼냈다. 아이에게 엄마는 그저 그런 존재였다. 아빠가 데리고 오는 여자였고 자신에게 딱 붙어 있으면 좋겠지만 쉽게 떠나는 사람. 여자에게 아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짐처럼 갑작스레 튀어나와 귀찮은 사람. 이러한 설정을 생각했을 때 두 사람이 상처를 알아보며 가까워질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리고 여자의 행적을 생각했을 때 두 사람의 유대는 해피 엔딩으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그래서 결국에 눈물을 자아내고야 마는 영화가 될 것이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엄마는 원래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는 점은 분명 되짚을 필요가 있다.

 

영화 [차이나타운](2014)
영화 [차이나타운](2014)

김혜수가 마우희가 되었을 때, <차이나타운>(2014)은 가장 잔혹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마우희의 쓸모를 증명하라는 말은 그가 엄마라 불렸던 이이기에 더욱 잔인하게 들렸다. 기미가 잔뜩 낀 까칠한 얼굴로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이들을 바라볼 때, 그 시선에는 상대의 효용을 따지는 서늘함이 배어 있었다. <차이나타운>은 김혜수의 끄는 듯한 목소리와 화면의 어두움이 만나 마우희의 무자비함을 최대한 살려냈다. 그렇기에 그가 효용 가치가 없는 누군가를 살려두는 것이 어떤 마음이었는지에 대해 관객은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제 아이’로 연민을 느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쉽게 보아왔던 모성과는 다른 결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좋을 땐 운다는 <열한번째 엄마>의 여자와 끔찍할 땐 웃어야 편하다는 <차이나타운>의 마우희는 바로 이 방식으로 당연하지 않게 상대를 품는 법을 보여주었다.

 

영화 [내가 죽던 날](2020)
영화 [타짜](2006)

이렇게 ‘엄마’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드러냈던 그이기에 <미옥>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을지 모른다. 그는 생물학적인 엄마가 아니어도 굳이 혈연이 아니어도 상대와 끈끈함을 유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해왔고 그것은 넓게 보아 연대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가 보여주려 했던 연대는 <내가 죽던 날>(2020)에서 성취된다. <내가 죽던 날>의 현수는 그가 찾아야 하는 한 여자아이와 이 아이와 관계가 있는 듯 보이는 섬 여인과 한 번도 한 프레임에 놓이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의 관계는 파편화 되어 있지만, 서로의 흔적들은 각자가 살고자 발버둥 쳤던 순간들에 살 수 있는 힘과 기대를 선사했다. 현수는 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찾으면서 나의 삶이라는 것이 나 혼자만의 분투로 이어나갈 수 없는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서로에게 엄청난 무엇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것, 공감이 주는 연대의 힘을 김혜수는 현수가 삶의 의지를 얻는 과정을 통해 외친 셈이었다.

 

6.

김혜수는 시상식에서 다른 이들의 수상 소감을 들으며 자주 눈물을 보였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먼저 걸었거나, 함께 걸어가거나, 앞으로 걸어갈 이들에 대한 존경과 공감의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눈물을 보이는 그를 보며 눈물지었다. 자신이 걷고 싶은 길을 먼저 걸어 저 자리에 선 이에 대한 존경과 안심의 표현일 것이다. 그는 지금, 이렇게 존재한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의 눈물에 기꺼이 공감할 수 있는 이들을 사이에 서 있다. 아마도 그가 그에게 주어졌던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더라면 결코 설 수 없는 그 자리에 역사가 아닌 현재로 자리하고 있다. 사실 그가 영화와 함께한 시간을 곱씹어 보면 어느 한 곳에 멈췄대도 이상하지 않다. 아마도 그 자리는 누군가의 회상 속에 아주 편안히 오랫동안 놓여 있을 확률이 크다. 그가 이를 거부하고 부딪힌 현재들은 한 번도 무뎌진 적 없는 잣대들을 들이댔지만 그는 찬찬히 대답을 내놓았고, 이 지난한 시간들을 견뎌낸 지금 누군가의 꿈으로 선 것이었다.

누가 이것에 대해 이야기할까 답답한 순간 입을 뗐던 그였고,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하려던 그였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섞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의 모습은 비슷한 영화들 사이에서 결국 자신을 찾고야 마는 집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드러낸 셈이다. 그는 굳이 피하지 않았고, 굳이 우회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영화로 나아갔고, 그 결과 그의 행보에 많은 이들의 기대가 모이는 지금에 있다. ……. 아무리 정리하려 해도, 아무리 그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를 늘어놓아도 그에겐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잉여가 넘실댄다. 그에 대해 적을 수 있는 언어의 한계를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것은 그가 명확한 표현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그만의 것을 갖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관객들은 그의 잉여 속에서 오랫동안 행복할 것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첫사랑>(1993)

<닥터봉>(1995)

<메모리즈>(2002)

<얼굴없는 미녀>(2004)

<타짜>(2006)

<열한 번째 엄마>(2007)

<좋지 아니한가>(2007)

<관상>(2013)

<차이나타운>(2014)

<국가부도의 날>(2018)

<내가 죽던 날>(2020)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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