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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해피엔딩은 클리셰일까?
과연 해피엔딩은 클리셰일까?
  • 이주라 |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 승인 2021.05.31 18: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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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흔한 해피엔딩은 어디로?

대중적인 문화 콘텐츠에서 해피엔딩의 결말은 클리셰로 여겨진다. 서사적인 구조를 가진 대중문화 작품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은 ‘뻔한 줄거리’라는 것인데, 그 뻔한 줄거리의 대표 주자가 해피엔딩이다. 어차피 주인공 두 사람의 사랑은 이뤄질 거잖아? 주인공이 아무리 죽을 고비를 넘겨 봤자 결국 살아남을 거잖아? 이미 이야기의 결론은 정해져 있는데 무슨 재미야? 하지만 한국의 대중문화 속에서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이 실제로 그렇게 ‘뻔한’ 것이었을까?

1910년대, 일본에 의해 근대적 제도로의 전환이 급격하게 그리고 강압적으로 이뤄진 이후, 한국의 근대 문학 속에서 해피엔딩은 사실 실현 불가능한 공식 중 하나였다. 근대문학사의 지극히 초기 장면을 살펴보자. 이광수의 유명한 장편소설 『무정』(1917)은 어느 정도 해피엔딩 서사라 할 수 있다. 주인공 형식을 중심으로 한 지식 청년들이 교육을 통해 조선을 계몽하겠다는 희망적 결심을 전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이어서 발표한 『개척자』(1918)로 넘어가면, 소설의 서사 속 해피엔딩은 사라진다. 『개척자』에서 자유연애를 했던 여학생 성순은 그 사랑의 순수함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여기에서 작가 이광수는 성순의 오빠 성재를 초점 화자로 삼아, 타락한 사회 속에서 순수한 사랑을 추구한 성순이 이 시대의 ‘개척자’요, ‘선구자’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 모든 수사는 성순 사후의 부질없는 의미 부여일 뿐, 서사 속 현실에서 성순의 사랑은 실패했다. 그 이후로 식민지 조선의 신문과 잡지에 연재됐던 대부분의 소설에서 해피엔딩은 사라진다. 아름다운 여인은 언제나 타락하고, 그 여인을 사랑했던 남성들은 좌절하며, 그토록 아름다웠던 여인은 자살한다. 

해방 후에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여전히 한국의 대중소설 속에서 사랑은 불가능했다. 사랑하는 남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 1960년대 청춘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두수(신성일)와 요안나(엄앵란)는 결국 자신들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음을 직감하고 시골 헛간에서 ‘고향의 봄’을 부르며 학을 접다가 순결한 몸으로 정사(情死)한다. 최인호의 『겨울 나그네』에서 민우와 다혜는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하지만, 자신의 태생이 순수하지 않음을 알게 된 민우의 좌절과 방황 그리고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은 이어지지 못한다. 

1990년대의 사랑 또한 누군가의 죽음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영화 <편지>, <8월의 크리스마스>, 드라마 <가을동화>와 같은 작품들은, 시한부 생명을 사는 누군가의 짧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이 멜로드라마들은 예전처럼 사랑의 비극을 과잉된 감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짧고 아쉬운 사랑의 순간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물론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랑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고, 해피엔딩은 쉽게 만들어질 수 없었다.

 

함께하는 마을 공동체의 회복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2019) 포스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정서가 지배했던, 그래서 쿨하면서도 은근하게 멜랑콜리했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지나고 나면, 해피엔딩은 너무나 당연한 결말이 돼버린다. 사랑 이야기를 유쾌하고 발랄하게 다루는 로맨틱 코미디가 연애 이야기의 주류 장르로 자리매김하면서,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는 모두 주인공들의 행복한 결합으로 끝나고 있다. 그럼에도 연인들의 행복한 결합이 쉽지만은 않아서,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여주인공이 죽었다가 환생할 때까지 도깨비가 수십 년의 시간을 또 쓸쓸히 기다려야 하며,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는 남과 북으로 갈라진 연인이 1년에 한 번 스위스에서 겨우 만날 뿐이다. 평생을 함께할 수는 없다.

현실 속에서 사랑을 이룬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잘 나타난다. <동백꽃 필 무렵>은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도 온 마을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백(공효진)이 용식(강하늘)과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용식의 전폭적인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용식은 분명 동백이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며 동백이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지만, 이렇게 동백이 내면에 강한 힘을 갖추게 됐다고 해서 사랑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 로맨스 소설은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주인공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사랑을 완성하는, 상처와 치유 그리고 사랑의 완성이라는 공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이런 개인의 자존감 회복만으로 사랑이 이뤄지기는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주 소소하게는, 동백은 아들 필구의 허락, 용식의 어머니인 회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상을 위협하는 연쇄살인마 까불이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까불이와의 대결에서 동백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마을 공동체의 도움 때문이었다. 까불이로 인한 희생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동네 사람들의 결심은, 동백의 안부를 끊임없이 묻는 관심으로 나타난다. 동백이 홀로 까불이와 만나 살인의 위험에 노출됐을 때, 동네 아주머니들은 쉬지 않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한다. 그러자 까불이는 동백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살인 계획을 중단한다. 이렇게 동백은 살아나고,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이를테면 사랑은 둘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사회적 삶 속에서 각자의 안정적인 생활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사회의 인정 안에서 유지될 수 있다. 이렇게 사랑은 사적인 관계를 넘어 공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의 지지가 필요한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은 이런 사랑의 가능성을 소규모 마을 공동체의 힘으로 표현했다. 내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연인의 사랑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포용까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고 묻지 않는 수다 공동체

 

정세랑, 『피프티 피플』(2016)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동백꽃 필 무렵>의 마을 공동체도 그렇고, 드라마 <빈센조>에 나오는 금가프라자 입주민들의 단합도 그렇고, 좁은 지역 사회 속에서 서로 화합하며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공동체의 강고한 결속과 연대는 어쩐지 과거로 회귀하는 느낌을 준다. 하나의 깃발 아래 대오각성한 집단의 힘은 1980년대적이다. 이미 개인화돼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가운데 노동의 성격마저 업종별·개인별로 제각각인 오늘날, 단일한 공동체의 실현은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정세랑의 소설 세계는 모두가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한 해피엔딩의 결말을 만들어 낸다. 물론 이 함께함은 강고한 결속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여러 삶의 느슨하지만 다채로운 교차 속에서 정세랑은 해피엔딩의 가능성을 찾는다. 정세랑 소설의 가장 특징적인 형식은 바로 나열이다. 『피프티 피플』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이, 정세랑은 50명(실제로는 51명-「작가의 말」)의 이야기를 아주 짧은 엽편 소설의 분량으로 만들어 나열한다. 처음에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혀 연결되지 않아서 이게 무슨 소설인가 싶기도 하다. 인과관계에 기반한 플롯이 사라진 소설인 것이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인물들이 소설의 마지막에 영화관에서 딱 한 번 모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서로를 살린다. 영화관 건물에 화재가 나고 모두 대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각자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누군가는 대피로를 찾아내고, 누군가는 패닉으로 주저앉은 사람을 안정시키며, 누군가는 구조 순서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그들은 이미 앞서 펼쳐진 자신들의 일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주변의 타인들에게 힘을 줬던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시위 현장에서 자살 시도를 한 학생에게 너는 필요한 사람이라고 외쳐줬고, 누군가는 아무도 맡지 않는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시설을 맡아서 의사로서의 직업윤리를 다하고 있었다.

정세랑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수많은 삶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해피엔딩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그 다양한 삶에 대해 서로가 존중할 때 행복한 관계가 가능해 진다. 하나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44인의 삶을 보여주는 정세랑의 단편소설 『웨딩드레스 44』에서, 이성애자 친구는 결혼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동성애자 친구를 부러워한다. 그러자 동성애자 친구는 자신은 오히려 공식적으로 관계를 인정받는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성애자 친구는 자신의 시야가 좁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부주의한 말에 상처받았을 텐데도, 자신의 결혼을 축하해주러 온 동성애자 친구의 손을 진심 어린 감사로 맞잡는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들은 모두의 삶이 각자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삶에 예측하지 못한 불행이 생겼듯이, 친구의 삶도 그럴 수 있다고 짐작한다. 그래서 “너도 힘들구나. 그게 우리 관계의 바탕인 거 같아.”(「효진」) 이렇게 생각하며, 서로에 대해 존중한다. 이 존중은 함부로 묻지 않는 것이다. 『이혼 세일』에서 이재의 이혼 사유에 대해서 아무도 ‘왜?’ 라고 묻지 않는다. 이혼 사유를 캐묻지 않아도 친구들은 이재의 앞날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다. 잠깐 모여 나누는 이 즐거운 수다가 각자를 살게 한다.

정세랑의 나열법은 이런 다양성에 대한 존중의 형식이다. 그리고 동시에 끊임없이 ‘왜?’를 물어 가면서 인과관계에 근거해서 플롯을 구성하는 근대적 소설 형식에 대한 거부다. 정세랑은 한 인물의 삶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근대 소설의 플롯을 나열의 방식으로 해체한다. 그리고 이 다양한 인물들이 모두 말하게 한다. 정세랑의 해피엔딩은 이런 다양한 목소리의 한바탕 수다로 인해 가능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해피엔딩은 이렇게 각자의 삶을 존중하면서도 느슨하게 연결된 수다 공동체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글·이주라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한국 근대 초기 대중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중서사장르팀과 대중서사학회 구성원들과 함께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저서로 식민지 근대의 시작과 대중문학의 전개와 만화웹툰작가평론선-박희정, 공저로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가이드1-로맨스 등이 있으며, 현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국내판 온라인 지면을 통해 <이주라의 문화톡톡>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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