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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당한 포르노그래피 : <스파이럴>과 <분노의 질주9>의 강체에 대하여
타당한 포르노그래피 : <스파이럴>과 <분노의 질주9>의 강체에 대하여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1.06.0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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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서야 조명을 받는 영화들이 있다. 크게 세 가지 경우다. 하나는 대중의 관심 밖에 있다가 시류나 사회의 변화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경우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은 개봉 당시 평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컨테이젼>은 초고비용 자본의 창의적 운용을 전시했다. 이는 비평가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대중들에게는 큰 볼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펜데믹과 함께 <컨테이젼>은 대중들에게 ‘발굴’되었다.

두 번째 경우는 비주류적 취향이 주류로 편입되는 경우다. 올해 개봉한 코토게 코요하루 원작의 <귀멸의 칼날>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올해 1월 말 개봉한 이후 반년 가까이 박스오피스에 걸려있는 <귀멸의 칼날>은 국내에선 재페니메이션 서브컬쳐 팔로워들의 전유물과 같았다. 그러나 구심이 분명한 드라마와 빠른 전개, 뚜렷한 캐릭터들을 통해 대중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흥행작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다. 이 경우 영화의 생존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개봉한 <스파이럴>(<쏘우>시리즈)과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분노의 질주>시리즈)도 오랜 시간 시리즈로서 생존해서 재평가된 경우다. <쏘우>는 2003년 제임스 완의 단편을 시작으로 2021년까지 (단편을 포함하여) 총 10편을 이어왔다. 그보다 더 오래 이어져 온 <분노의 질주>도 2001년부터 올해까지 (스핀오프를 포함해) 총 10편의 영화가 개봉됐다. 10년을 훌쩍 넘긴 두 시리즈의 생존을 설명하는데 피할 수 없는 요소는 포르노그래피와 페티시즘이다.

 

<쏘우>, 밀실이라는 유폐된 강체

자가 고문을 선택지를 통해 고문 포르노로 장르적 정체성을 지켜온 <쏘우>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판타지를 구성해왔다. 삶에 대한 의욕을 잃거나 단죄가 필요한 인물은 ‘직쏘’에게 “Live or die, make your choice.”라는 선택지 혹은 게임을 강요받는다. 스스로 무언가를 희생(고통을 부여)해서 삶의 의지를 되찾거나 죽으라는 강요는 <쏘우> 시리즈의 중핵을 구성하는 판타지이자 포르노그래피였다.

<쏘우>시리즈의 판타지와 포르노그래피는 감금이라는 상황과 밀실이라는 공간에 대한 페시티로 지탱된다. <쏘우>의 등장인물들은 1편부터 최근작 <스파이럴>에 이르기까지 감금을 통해 상황을 강요받는다. 감금이 지시하는 상황은 분명하다. 직쏘의 사이비 철학을 긍정할 것인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다.

감금에 대한 설정은 시리즈가 진행됨에 따라 굴절된다. 사이비 철학이 만든 사이비 딜레마가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을 때 오는 카타르시스를 긴장과 서스펜스의 주동력으로 삼았던 1~3편을 지나, 4편부터 직쏘는 해체 불가능한 트랩을 만들기 시작한다. 고어에 몰입하던 시리즈는 어느 순간 ‘직쏘’라는 자리를 두고 전통성 투쟁을 벌이는 정치 스릴러의 면모를 띠고, 이내 직계(Lineal) 직쏘와 방계(Collateral) 직쏘의 전쟁으로 번진다. 여기서 시리즈의 중핵적 요소인 트랩을 고어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더 창의적인 트랩과 도륙을 찾던 시리즈의 경향을 지나, 시리즈의 리부트라고 부를만한 <스파이럴>에서 밀실은 정치적인 결단으로 나아간다. 부패한 경찰 조직을 단죄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직쏘는, ‘더럽고 숭고한 손’으로 존재하는 정치를 부정한다. 대신 그 스스로 더럽고 숭고한 손이 되겠다며 스스로 혼돈의 ‘스파이럴’을 자처한다. 여기서 밀실은 정치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를 청렴이라는 하나의 객체로 탈색하는 파시즘적 세탁기임과 동시에 고어를 위한 놀이기구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정치성이 장르적 특성과 만나며 유의미한 정치-비평적 코멘트가 된다는 것이다.

시리즈를 지나며 변화하는 설정의 굴절과 주름에도 불구하고 <쏘우>시리즈가 정체성으로서 이어가는 것은 밀실이라는 ‘놀이기구’ 그 자체이다. 이 점에 있어 붉게 산화된 철의 질감으로 마감된 상황과 밀실은 <쏘우>시리즈의 근간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트랩을 구성하는 철이라는 물질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지나며 산화되어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 물질은 도륙되고 조각으로 변형되는 육체와 대조를 이룬다.

불변하는 대상을 시리즈의 중핵에 둠으로써, <쏘우>시리즈는 유폐된 밀실이라는 독자적인 공간적 포르노그래피와 페티시즘을 형성한다. 세상 어딘가에 버려져 유폐된 밀실을 지나면 무언가 더 나아지거나 달라지리라는 환상이 <쏘우>의 판타지이다. 이 판타지는 주동 캐릭터들이 점유하고자 하는 의제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이상을 위한 강력한 도구적 공간이 되기도 한다. 유폐된 철의 질감으로 마감된 밀실이라는 강체야말로 <쏘우>시리즈의 강력한 생존력인 것이다.

 

<분노의 질주>, 머슬카라는 철의 강체

마찬가지로 10편의 시리즈가 만들어질 동안 시장에서 꾸준히 생존해온 <분노의 질주>시리즈에도 시리즈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머슬카’라는 강체가 있다. 다만 <쏘우>시리즈의 밀실이 이념과 갈등, 고어와 판타지를 담아내는 그릇이었다면, <분노의 질주>의 차는 말 그대로 부서지지 않는 대상이다.

<분노의 질주>는 시리즈를 지나며 충돌 테스트의 수위를 높여왔다. 육중한 본체로 가볍고 날렵한 디자인의 차들과 박치기하거나, 묵직한 관성으로 최신 레이싱카를 앞지르던 클래식카들의 스트리트레이싱의 남성주의적 정체성은 4편에서 리부트와 함께 물리적 법칙을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다.

4편에서 그랜 토리노와 무스탕을 타고 개미굴처럼 구부러진 터널을 통과하는 미션을 완수한 그들은, 5편에서 두 대의 머슬카에 톤 단위의 금고를 달고 거리를 반파해놓는다. 6편에서는 머슬카로 탱크를 상대하더니, 7편에서는 차를 가지고 빌딩과 빌딩 사이를 점프하고, 8편에서는 잠수함을 부순다. 9편에서는 정말로 차에 로켓을 달고 우주로 날아간다. 그 과정에서 차는 물리적 법칙을 위반하고, 철로 된 요새처럼 주인공들을 지킨다.

물리적 법칙의 위반이 향하는 곳은 리얼리티에 대한 배반이다. 이 점에서 시리즈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보여준 7편의 마지막은 곱씹어 볼 만하다. 2013년 11월 30일, 1편부터 7편까지 출연하며 시리즈의 강력한 정체성 중 하나였던 브라이언 역의 폴 워커는 <분노의 질주7>의 촬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7편의 제작진은 폴 워커의 마지막을 추모하기 위해 CG로 마지막 장면에서 폴 워커의 마지막 모습으로 이제는 대체할 수 없는 브라이언을 재현해놓는다.

7편의 마지막은 이례적일 정도로 시리즈가 가진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앙드레 바쟁이 지적했던 ‘미라 신드롬’의 현현이라고 할만한 이 장면은 시리즈가 왜 물리법칙을 위반하고 리얼리티를 배반하면서까지 충돌 테스트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준다. 브라이언은 8편과 9편에서도 그 존재가 꾸준히 언급되는데, 이는 결국 앙드레 바쟁이 지적했던 불멸을 향한 욕구라는 영화의 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해석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분노의 질주>의 머슬카란 불멸해야만 하는 스펙터클의 대상이다.

9편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돔(빈 디젤 분)의 과거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한 영화는, 죽었던 한(성 강 분)을 부활시킨 뒤에야 결론으로 들어선다. 그 과정에는 물리법칙을 벗어나 우주까지 가버린 머슬카에 대한 충돌 테스트가 있다. 스펙터클에 대한 해석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죽은 인물은 되살아오고 우주까지 나간 차는 부서지지 않는다.

 

강체 혹은 보편적 포르노그래피

<쏘우>에서든 <분노의 질주>에서든, 10년 넘게 시리즈를 지속해온 생명력은 앞서 언급했던 시리즈의 중심을 잡는 강체이다.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는 뉴턴 역학에서 등장하던 강체(Rigid Body)를 시공간의 대상으로 분석하며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서로 환원 가능했던 기하와 실재가 로바체프스키 혹은 리만 기하로 넘어오며 서로 환원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고 지적(Philosophie der Raum-Zeit-Lehre, 1928)한다. 이를 통해 그는 기하학에 관계성과 상대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보편력 제거의 원리(the principle of the elimination of universal forces)’를 증명하려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쏘우>든 <분노의 질주>든, 10년 넘게 시리즈를 지속해온 힘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리즈를 구성하는 강체이다. 구체적인 물질로 현현한 판타지가 구성하는 강체는, ‘시간이 지나서야 조명을 받는 영화’, 즉 시간의 힘을 이기는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이 점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말하는 리얼리티는 과연 상대적이고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어떤 것일 수 있을까? 혹은 영화에서 보편력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결국 영화가 스크린이라는 2차원 공간을 벗어날 수 있느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 라이헨바흐와 같은 원리로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은 뉴턴 역학적인 판타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2차원의 평면 공간이 3차원의 공간이 되진 않기 때문이다. 결국, 수평적 모델을 통해 가치를 통일하거나 죽음을 극복하는 일이 두 시리즈, 어쩌면 모든 영화가 가진 보편적인 포르노그래피가 아닐까.

그 이유는 영화에서 보편력이란 카메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메라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운동의 시공간을 분절하려는 실험에서 왔다는 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의 운동실험이 향한 곳은, 궁극적으로 포르노그래피였다. 물론, 영화는 뤼미에르를 통해 자정력을 회복하고, 멜리아스의 마법을 이어받아 발전해왔다. 그러나 그 기저에 마이브리지의 카메라가, 포르노그래피가 없었다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포르노그래피의 어원은 매매(prostitute)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pornē’와 쓰다(write)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graphein’이 합쳐진 말이다. 물론, 쓰기를 통해 매매를 자정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영화가 강체라는 판타지를 온전히 벗어나는 일이 궁극적으로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분노의 질주9>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실로 오랜만에 영화시장에서 유의미한 텐트폴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아직 <분노의 질주7>에서 보았던 폴 워커를 긍정하고 싶다. 9편에도 살아 돌아온 ‘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대중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스파이럴>은 <쏘우>시리즈의 강체를 효과적으로 정치화했다. 그것이 시리즈가 가진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면, 그것은 포르노그래피 전체에 대한 긍정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재현을 허용할 수 있는 타당한 포르노그래피의 가능성이 아닐까.

 

 

글・이현재

영화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영화평론부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경희대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2018) 등의 다양한 연구를 보조・수행했다. 평론으로는 「보이(지 않)는 폭력」(2020, 창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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