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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할머니들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장윤미의 문화톡톡] 할머니들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1.06.10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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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립, 배움, 그리고 여자

자립이 인간의 최고 욕망이라고 했을 때 이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 중 가장 긍정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배움일 테다. 배움은 단지 지식 축적이라는 결과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여 자립에 이르는 과정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움과 자립에는 제한이 따른다. 즉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것 아니고, 아무나 자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립의 자격을 갖춘 주체만이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자격을 갖춘 그들은 누구인가? 중심/남성/권력/자본/신분을 인정(인증)받은 사람들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배울 이유도, 자립의 명분도 없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두 가지는 어울리지 않는 일 또는 주제 넘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여자다.

모든 국민에게 ‘교육의 의무’가 주어지고 보편화되기 전까지는 자립, 배움, 여자 세 언어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었다. 우선 여자는 자립해야 하는 혹은 자립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버지에게 의존해야 하고 결혼을 해서는 남편에게 의존해야 하며, 남편을 잃었을 때는 아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자립도 불가하다. 결혼 전에는 자신의 부모를, 결혼 후에는 남편의 부모와 남편과 자식을 동시에 돌봐야 한다. 이렇게 보면 여자가 홀로 설 수 있는 시간이나 기회는 인생을 통 털어도 없다고 보는 게 맞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지도 못하고, 자립하지 못한 여성을 딱하고 안타깝다고 생각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자보다 많이) 배운 여자, 자립한 여자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모가 없거나 또는 결혼을 하지 않아 가정이 없는 여자만이 혼자 살게 마련이므로. 모르긴 몰라도 남성/중심/권력으로부터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립한 여자는 ‘팔자 센 년’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저버린 ‘나쁜년’ 둘 중에 하나로 불릴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여기에 드디어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사람들이 있다. 눈치를 줄 부모도, 구박할 남편도, 돌봐야할 자식도 모두 떠났다. 비로소 자립할 수 있는 판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배우기만 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제 배워도 써먹을 데 없는 나이, 자립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다 늙어서 뭘 배우냐고 한심해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살던 데로 살아도 그만이라고 위로하는 사람도 있다. 글자를 모르는 게 무슨 자랑도 아닌데 학교까지 다니며 글을 배우냐며 주책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다.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가르쳐주지 않은 건 그들인데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여자의 것으로 돌리는 이상한 사회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감수하고 연필을 들고 한글을 배우러 다니는 사람들, 바로 약목면 할머니들이다. 빨래터에서, 마을회관 화토판에서, 그리고 요양원에서 흔적없이 휘발될 뻔 했던 할머니의 말은 글자를 배우고 스스로 기록할 수있게 되면서 그들만의 언어를 가지게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 곁에까지 올 수 있게 되었다.

 

2. 못 배운 부끄러움은 왜 할머니들의 몫일까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를 책으로 엮은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은 약목면 문해학교에 다니는 할머니들의 시와 그림을 담은 책이다. 평균 나이 여든 안팎의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는 이유는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그 내면에는 공통적인 경험과 감정이 놓여 있다. 바로 글을 몰라서 당해야 했던 부끄러움과 수치심이다.

어린 아들이 글자를 가리키며 이 글자가 뭐냐고 물어보지만 글자를 모르는 탓에 안 보인다고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부끄러움, 보물 이름이 적힌 쪽지를 발견해도 글씨를 몰라 선물을 받을 수 없었던 부끄러움, 남편 심부름으로 어쩔 수 없이 은행에 갔지만 글자를 쓸 수 없어 하염없이 앉아만 있다 망신만 당했던 경험은 글을 모르는 할머니들이라면 한번쯤 겪어본 경험이다.

여자가 글을 배우면 ‘못쓴다’라고 규정하고 금지한 건 사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은 오로지 글을 배우지 못한 할머니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이 부끄러움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숨(기)는 것이다.

 

은행에 가서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고 발만 보고 있었습니다

내 아들 같은 키 큰 남자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합니다.

이렇게가 어떤 건데요

얼마나 망설이며 용기를 냈는지 알까요

손가락에 반창고나

손목에 기브스를 하고 갈까

부끄러워 오만 궁리를 다했습니다

-김재환,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중, 113쪽-

 

숨(기)다, 라는 행동에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하나는 외부의 평가나 시선으로부터 부끄러운 대상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라면 다른 하나는 위험한 것들로부터 그 대상을 지키기 위함이다. 할머니들의 경우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는데 표면적으로 볼 땐 글을 모른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글 쓰는 수단인 손을 숨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외부의 비난이나 평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본능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임시방편으로 타인의 눈을 속여 순간의 부끄러움을 모면하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지속할 수도 없거니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는 점에서 또다른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경우 글을 모르는 부끄러움을 숨기도 싶다는 욕망이 이제 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숨(기)는 상황까지 이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아닐 뿐만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문제로 연결될 경우 스스로를 무가치한 인간, 혹은 수치스러운 인간이라는 극간적인 결론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처럼 쉬운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3. 글을 알면 어디든 간다

누구든 낯선 공간에 가면 긴장하게 된다. 특히 공식적인 절차가 필요한 공간일수록, 낯선 기계를 사용해야 하는 공간일수록 두려움은 커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이 그렇고 복잡한 업무를 요구하는 은행 같은 곳이 그렇다. 또한 이용 절차나 선택이 복잡한 식당이 그렇고, 키오스크와 같은 익숙하지 않는 기계가 있는 공간이 그렇다.

공간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낯선 공간을 아예 가지 않는 것, 또 하나는 민망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마지막으로 어렵지만 천천히 메뉴얼을 읽고 따라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근본적으로 숨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좋은 방법도 아니고 문제 해결방법이라고도 할 수 없다. 두 번 째는 원하는 바를 이를 수는 있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알려줄 수도 있고, 잘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는 실수를 하거나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세번 째 역시 쉬운 방법은 아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메뉴얼을 읽을 줄만 알면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혼자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방법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어느 공간에 가서도 당황하지 않고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숨지 않아도,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할머니들이 글자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마지막 방법이 주는 성취감 때문이다. 물론 원하는 목적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어려운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 버스 노선을 읽을 수 있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주소만 쓸 줄 안다면 전국 어디든 물건을 보낼 수 있고, 통장에 입출금 내역을 읽을 줄만 안다면 노동의 대가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 길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식이 보고 싶어도 사진만 쓸어보며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고,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도 따지지 못하는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된다.

할머니들에게 가장 두려운 건 글자를 모르는 것보다 글자를 몰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다. 수십 가지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식당에서도 선택할 수 없는 것, 집에 가고 싶지만 계속 오는 버스 중에 어떤 것을 골라 타야 할지 몰라 하염없이 서 있어야 하는 것, 가판을 읽지 못해 아예 접근하지도 못하는 것.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할머니들은 글자를 모른다는 이유로 선택권조차 갖지 못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을 때는 불편함이나 부당함을 그저 여자로 태어난 팔자 탓으로 돌렸지만 이제는 팔자 탓을 하기에 문자에 대한 할머니의 욕망은 너무나 강렬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다 늙어서 그런 쓸데없는 데 힘쓰지 말고 점잖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을 것이라고. 점잖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제 다 늙었다고 골방에 누워 티비나 보고, 자식한테 민폐 끼치지 않는답시고 외롭게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게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장담컨대 착한 할머니는 천당에 갈지 몰라도 글을 배워 이제는 ‘못쓰게' 된 할머니는 까짓거, 어디든 간다!

 

글 · 장윤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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