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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문화톡톡] 환상과 현실의 간극은 극복될 수 있을까-<브로큰 플라워>
[김희경의 문화톡톡] 환상과 현실의 간극은 극복될 수 있을까-<브로큰 플라워>
  • 김희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1.06.14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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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성 돈 존스턴(빌 머레이)은 주변인들에 의해 자꾸만 누군가와 동일시된다. 실존하지 않지만 항상 그의 곁에 존재하는 돈 주앙이다.

함께 살던 연인은 “한물간 돈 주앙”이라며 떠나고, 친구 윈스턴은 “자넨 돈 주앙같은 바람둥이였으니”라는 말을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한다. 그 횟수들은 다소 비현실적이게 느껴질 정도로 잦다.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브로큰 플라워>는 그렇게 동일시된 두 인물로부터 출발한다. 스크린 안의 돈 존스턴, 그리고 그가 TV를 통해 바라보는 또 다른 영화 속 돈 주앙이다.

 

타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돈 존스턴 스스로도 돈 주앙과 동일시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윈스턴에게 “돈 주앙 소리 좀 그만해”라고 하지만 그는 이미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윈스턴의 말을 부정하면서도 이 동일시를 바탕으로 한 그의 지시를 철저히 따른다. 또 연인이 떠나기 직전 까지도 TV 속 돈 주앙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가 흐를수록 그는 돈 주앙과 전혀 다른 위치에 서게 된다. 동일시된 인물간의 간극은 갈수록 확장되며, 그 파열음도 커진다.

돈 존스턴이 돈 주앙이기 위해서는 여인들의 호응이 필수다. 돈 주앙은 여자를 잘 아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돈 존스턴이 흠모하는 TV 속 돈 주앙을 대하는 여인들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얼굴엔 모두 미소가 가득하다. 하지만 돈 존스턴들 대하는 여인들의 태도는 일관적이지 않다. 어떤 여인은 좋아하며, 어떤 여인은 냉소를 퍼붓는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형태를 띤다. 다수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돈 존스턴은 돈 주앙이 되지 못한다. 여성를 잘 알고 한때 여성들이 좋아했던 인물인데 결과는 왜 달라진걸까.

 

 

영화는 돈 존스턴의 시선에 현재성을 부여함으로써 이 차이를 만들어낸다. 돈 주앙의 경우엔 그만이 자신의 장례식에 찾아온 여인들을 바라볼 수 있다. 여인들은 반대로 돈 주앙을 볼 수 없다. 일방적 시선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선이 있는 곳엔 판단이 따르기 마련이다. 반대로 차단된 시선은 판단을 제거한다. 그의 현재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순간의 판단 자체가 불가능하며, 오직 과거의 시선에 따른 판단만을 하게 된다. 돈 주앙 스스로도 이 시선 안에서 과거의 자신을 복기하면 된다.

하지만 돈 주앙의 상황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영화 속의 영화일 뿐이다. 일방적 시선만이 존재하는 건 훔쳐서 몰래 보지 않는 한 불가능하며, 현실 속에선 쌍방의 시선이 존재하게 된다. 돈 존스턴이 여인들을 바라보면, 여인들도 돈 존스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만 갖고 있던 여인들에게 지금 이 순간의 돈 존스턴은 현재성을 띤 대상이 된다. 그리고 여인들은 이를 기준으로 새로운 판단을 하게 된다.

카메라는 각 여인들의 얼굴을 비추기 전후로 꼭 집 풍경, 가족들의 모습 등에 많은 쇼트를 할애하는 것도 이와 연결된다. 돈 존스턴과 그가 찾아간 여인 둘만 배치한다면 집약적이고 간결한 진행이 이뤄질 것 같지만 계속 주변인들의 반응과 대화를 개입시킨다. 첫 번째 여인의 딸, 두 번째와 네 번째 여인의 남편과 같은 가족뿐 아니라 세 번째 여인의 조수도 이들의 대화 사이사이 끼어든다. 이들은 돈 존스턴에겐 크지 않은 존재들로 보이지만 여인들에겐 자신들을 둘러싼 현재다. 결국 카메라에 담긴 여인들의 시선은 과거와 다른 것은 늙어버린 돈 존스턴의 모습에만 기인한 것이 아닌 복합적인 요소가 모두 결합된 것이다. 과거의 열광적이었던 반응만 떠올렸던 돈 존스턴이 그 시선을 느끼기 어려운 건 이런 이유와 맞닿아있다.

 

역설적이게도 돈 존스턴은 동일시되던 존재로 인해 이미 여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현재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돈 주앙과 그를 동일시했던 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스스로도 ‘돈 주앙 같았던 과거’만을 TV를 바라보며 복기하고 있다. 함께 살던 여인이 떠나기 직전에 보던 돈 주앙 영화는 여인이 떠난 직후 소파에 돌아와서도 계속되며, 돈 존스턴은 여인을 따라가거나 붙잡지 않고 그 영화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떠난 여정도 이를 확인해가는 작업의 일환이었음을 영화는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아들의 어머니가 누군지 알기 위한다는 설정이지만 이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 이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돈 존스턴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다섯 번째 여인을 찾아간다. 편지를 보낼 인물일 수가 없는, 그래서 아들의 어머니일 수 없는 사람에게까지 끝내 도달하는 것이다. 심지어 네 번째 여인의 남편에게서 맞고 쓰러진 후의 상황이다. 이 여정이 ‘아들의 어머니는 누구일까’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닌 ‘과거의 여인들을 만나러 간다’에 따라 움직여진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행은 온전히 ‘돈 존스턴은 더 이상 돈 주앙이 아니다’를 깨닫게 하기 위해 시작된 것일까. 영화가 시제의 불일치를 통해 증명하려 한 건 무엇이었을까.

답은 돈 존스턴의 눈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의 핵심은 눈에 있다. 떠나가는 여인을 바라봐야 할 눈, 큰 집에서 재미와 행복할 만한 놀이를 찾아야 할 눈은 초점조차 흐릿해 보인다. 마치 앞에 하나의 가림막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 돈 주앙은 프레임 속 이야기가 프레임 밖으로 나와버린 ‘환상’이며, 이 장치가 돈 존스턴의 시야를 막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여인들의 좇던 돈 존스턴에겐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선이 생긴다. 자신을 찾아올 것으로 추정되는 아들이다. 이제 여인들을 찾던 시선은 아들을 찾는 시선으로 전환된다. 마지막 흔들리는 카메라워크는 자신을 부정하며 떠나는 청년, 어쩌면 진짜 자신의 아들로서 자신의 시선이 머물 대상이 될지 모르는 청년과 동시에 마주하면서 느끼는 양가적 감정의 혼란을 드러낸다. 하지만 여기서 마지막으로 현재성에 더 다가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신을 찾아오는 순간을 그저 기다리거나, 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두려운 그러나 보다 현재를 욕망하게 되는 그의 모습은 그렇게 차에 탄 소년의 눈에도 담기는데,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돈 존스턴과 그 대상이 보내는 쌍방의 시선엔 시제의 일치가 일어난다.

 

이 시제의 일치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던 돈 존스턴의 눈에서부터 나타난다. 그의 동공은 차안의 소년을 향해 천천히 확대되고 카메라는 이를 클로즈업한다. 마찬가지로 소년의 눈도 동시에 커져간다. 카메라는 이런 소년의 표정 변화와 소년이 타고 있던 차의 움직임도 슬로모션으로 잡아낸다. 서로를 응시하며 감정을 읽어가는 속도에 맞추듯 말이다.

그 소년이 아들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인물과의 시선의 교환, 시제의 일치를 통해 환상과 현실이란 간극을 극복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해 둔다. 돈 존스턴이 영화의 마지막 쇼트에서 서 있는 곳이 사거리의 중간지점인 것도 어쩌면 이를 암시하는 것 아닐까. 아무런 변화가 없던 돈 존스턴의 눈동자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는 모습에서 영화는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한 채 막을 내린다.

 

 

*사진: 네이버영화

글 · 김희경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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