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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의 문화톡톡] 김점용 시인에게 보내는 뒤늦은 인사
[류수연의 문화톡톡] 김점용 시인에게 보내는 뒤늦은 인사
  • 류수연(문화평론가)
  • 승인 2021.06.21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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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용의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사진1. 김점용의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출처: 교보문고
사진1. 김점용의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출처: 교보문고

2021년 3월 8일, 한국작가회의로부터 부고문자가 날라 왔다. 일면식도 없던 시인의 부고문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때마침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그의 시가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생과 마주하고자 했던 시인의 마지막은 그렇게 한 권의 시집 안에 박제되었고, 그렇게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걷는사람, 2020)는 한 시인의 절명시가 되었다.

 

아내가 울면서 말했다

 

여보, 잘 들어. 악성이고말기래. 아스트로싸이토마astrocytoma 머릿속에 퍼진 것도 2기쯤 된대. 김 교수 말로는 생존율 중앙치가 13.4개월인데 표준을 벗어나는 케이스도 많대. 수술하자. 안하면 6개월실은 그것도 힘들대.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제발 수술하자 응? 내가 살릴게, 꼭 살릴 거야.

 

미안해. 안 할 거야. 약속 지켜. 스위스행 비행기 티켓 끊어 줘. 내 통장에 돈 있어. 스위스 가고 싶어.

 

나는 지금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다

안전벨트도 없고 기내식도 없고 스튜어디스도 없지만

존엄사가 인정되는 삶과 죽음의 중립국

스위스행 비행기 안에 있다

높고 아득한 공중을 날고 있다

아스트로싸이토마?

내 머릿속에 박힌 무수한 죽음의 별들이

날아가는 내 몸의 균형을 잡아 준다

그래, 지금까지 너무 한쪽으로만

비대칭으로 살기만 한 거야 영원히 살 것처럼

익룡의 깃털이 비대칭이어서 하늘을 날 수 있었다지만

이렇게 갑자기 날지는 않았겠지

가끔은 적에게 쫓겨 죽은 척도 하고

잠시 잠깐 죽는 연습도 하며

이 무거운 별에서 이륙하기 위해 줄어라 달리다가

덜커덕 죽기도 했겠지

한 마리의 익룡이 하늘을 날기까지 겪었던 무수한 실패와

단 한 번의 성공을

나는 지금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 보고 있는데

모든 별들이 살아 있는 죽음을 나르는 칠성판

영원히 사는 인생이 어딨어

내 머릿속의 별들도 조용히 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혼자서 스스로의 장례를 치르며 두 팔을 활짝 벌리네

- 스위스행 비행기전문

 

「스위스행 비행기」는 죽음과의 마주침을 담담한 목소리로 그려낸다. 예후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객관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절박한 심정으로 수술을 권하는 아내 앞에서 시인은 스위스행 비행기를 꿈꾼다. 물론 말기암 환자인 그에게 비행기 티켓은 쉽게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인해 막혀버린 하늘길 앞에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그는 스위스를 향하는 “높고 아득한 공중을” 날고 있다. 그것은 상상이지만 동시에 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한 현실이다. 그에게 있어서 스위스라는 곳이 “존엄사가 인정되는 삶과 죽음의 중립국”을 의미한다면,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는 시인에게는 그 어느 곳도 그대로 ‘스위스’ 그 자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권정관 평론가는 시인이 맞이한 이 지독한 슬픔의 관조를 “살아있는 죽음”(해설, 「채공의 시학, 꿈에서 공기로」,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살아서, ‘죽음’을 살아야 했던 시인의 고통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김점용 시인의 시가 결코 비극으로 점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삶이라는 비대칭에 경사되었던 어제를 뒤로 한 채, “스스로의 장례를 치르며 두 팔을 활짝 벌리”는 이 서글프도록 경쾌한 절명은 오히려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죽음이 이토록 찬란하고 아름답게 아플 수 있기까지, 시인이 겪었을 고통의 순간들은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의 의미는 한 시인의 죽음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재가 거대한 죽음 위에서 축조된 세계임을 모두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이후 죽음은 우리 삶에 가장 가깝고 일상적인 곳에 위치해버렸다. 그의 시는 이러한 시대 속에서 더 처절하다. 스스로 꿈꾸었던 생의 마지막조차 펜데믹이 야기한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점용 시인의 시가 보여준 가장 큰 초월은 그 지점에서 더욱 빛난다. ‘비대칭이었던 생사의 균형’을 잡은 이후, 시인은 오히려 더 강렬하게 생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 고구마를 삶는다

냄비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고구마가 익는다

다 익었나 싶어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찔러 본다

들어간다

고구마는 울지 않는다

나도 가만히 있는다

고구마를 맛있게 먹으려면 고구마 속 울음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흰 뱀 두 마리가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내 발을 물었다

어떤 고통은 가장 깊은 곳에서 오히려 고요하다

제 울음을 품은 채 고구마가 익어 간다

찔러둔 내 젓가락을 끝까지 다 받아 주면서

- 고구마부분

 

고구마 하나를 삶는 시간에서도 시인은 생과 사를 오간다. “고구마 속 울음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에도 그의 시간은 “스위스행 비행기”에 공존한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죽음의 순간들은 시시각각 그를 괴롭힌다. 그의 발을 무는 “흰 뱀 두 마리”는 그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독한 고통의 순간을 시각화한다. 그에게 고구마를 삶는 시간은 그토록 처연한 생사의 갈림길이었던 것이다.

죽음 앞에서 두렵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위악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살아내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에 가깝다. 그러나 그 어떤 위악으로도 가질 수 없는, 참기 어려운 공포로 각인되는 순간들이 있다. 시인의 고통스러운 투병기와 그로 인한 두려움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한 남자의 얼굴에서 표출된다.

 

이 엘리베이터 문은 한쪽만 열려야 한다

그도 몸이 불편한 사람

나와 같이 크고 둥근 휠체어를 타고 올 것이다.

 

(중략)

 

어쨌든 그는 올 것이다

 

딩동! 소리가 울리면

주렁주렁 링거를 달고 하늘색 담요에 덮여

아무것도 모른 채

조용히 미끄러지듯 내게로 올 것이다

 

거울처럼 환하게

나를 비추는 저 은빛 엘리베이터

그러니까 양쪽으로 갈라지는 저 문은

반드시 한쪽만 열려야 한다

- 엘리베이터 앞에서부분

 

은빛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인은 누구를 목격한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얼굴 위에 드리워진 익숙하면서도 낯선 죽음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시인에게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 곳에 놓인 공포였음은 이 시를 통해 다시금 확인된다. “크고 둥근 휠체어”를 타고 “주렁주렁 링거를 달고 하늘색 담요에 덮여” 매일매일 엘리베이터에 오르내리는 한 남자. 죽음은 바로 시인의 얼굴에 이미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시인은 더욱 간절하다. 그는 적어도 어제와 같은, 혹은 오늘과 같은 그런 순간만큼은 죽음이 오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자신의 일상이 죽음의 공포에 침윤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매일의 일상처럼 “양쪽으로 갈라지는” 그 순간만큼은, 죽음이 자신을 방문하는 그날이 아닐 것이라고 굳게 믿고자 한다. 그리하여 엘리베이터의 양쪽 문이 열릴 때마다 그는 ‘오늘이 아님’에 안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제 알고 있다. 이미 시인의 엘리베이터는 “한쪽만 열려”버렸음을. 시인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죽음)가 시인의 손을 붙잡았음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시인의 여정은 오히려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음을 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시를 통해 확인된다.

 

북부역

어딘지 모르게 끝까지 밀려간 느낌

모두가 떠나간 곳에서

꿈도 바닥도 없는 곳

너의 대답도 아무 대책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중략)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의정부북부역이 어디냐고 물어도

사람들은 묵묵부답

 

아무래도 나는

좀 더 북쪽으로 가야 할 것 같네

- 의정부북부역부분

 

시인은 떠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홀로 남겨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먼저 맞이할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혼자 남아 먼 사랑”을 지속할 것임을 노래한다. 그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다 해도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한 먼 여정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안타깝게, 그러나 강인한 의지로 떠나지 않고 여전히 남겨져, 거친 눈발을 헤치고 나아갈 그의 분신. 그것은 아마도 그가 이 땅에 남긴, 그리하여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너’를 만날 그 장소를 찾아 목 놓아 노래할 그의 시일 것이다.

그리고 홀로 남아 노래할 그 사랑에 답하는 일은, 이제 아마도 우리의 몫이리라. 그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을 ‘너’는, 묵묵부답의 ‘그들’이 아닌 그의 시를 함께 노래할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노래에 뒤늦은 답신을 보낸다. 그의 먼 사랑에 잠시나마 함께 하기 위해서 말이다.

 

 

글 · 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문학/문화평론가. 인천문화재단 이사. 계간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현재는 문학연구를 토대로 대중문화연구와 비평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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