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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당신의 세계는 어디에 있습니까-손희정 <다시, 쓰는, 세계>
[장윤미의 문화톡톡] 당신의 세계는 어디에 있습니까-손희정 <다시, 쓰는, 세계>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1.07.0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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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다변하고 자연스럽게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들이 많아지면서 ‘소란’과 ‘지껄임’에 불과했던 비주류의 말들은 저항과 투쟁과 함께 공적 공간 진입을 넘어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도달했다. 덕분에 기성 권력이 잃은 것은 ‘당연했던’ 권리요, 얻은 것이라곤 역차별, 불평등일 테다. 입지와 힘 모두 뺏긴 기성 권력 입장에서 불한당 같은 저들의 행패를 막기 위해서는 저들의 요구를 뛰어넘는 명분과 논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만든 명분은 원상복귀(backlash)이고, 논리는 ‘같지만, 다르게’다. 이 과정에서 혐오와 배제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단기간에 효과적으로 집단을 결집시킬 수 있는 꽤 괜찮은 행동지침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두 가지로 나뉘고 불린다. 능력이 있으면 알파걸, 능력이 없으면 김치녀, 된장녀. 하지만 알파걸이라고 해서 칭찬의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알파걸 역시 자기 잘난 맛에 살다가 종국엔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거나 멀쩡한 남자의 팔자를 망치는 년이 될 테니 말이다.

유감스러운 건 사회가 다양해질수록, 중심이 해체된다는 불안감이 커질수록, 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위기를 느낄수록 배제와 혐오는 다양성을 차단하고 혼란을 환원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쓰인다는 점이다.

 

혐오, 공공의 감정

 

혐오의 감정이 만들어지는 가장 밑바탕에는 어떤 논리가 숨겨 있을까. 두 가지다. 하나는 신 포도 즉 자기 합리화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 대상에 ‘가치 없음’ 혹은 ‘쓸모없음’과 같은 부정적 평가를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가 사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으로 그치면 문제가 안 되지만 이를 공식화했을 때 상황은 달라진다.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 시간이나 기회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규정된 언어는 다른 구성원에게 선입견, 왜곡, 편견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는 개인적인 방어기제이기도 하지만 공적 공간에서 소비될 경우 일방성과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다른 하나는 억울함이다. 이때의 억울함은 (원래대로라면) 내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탐욕스러운 타자’에 대한 억울함이다. 정의롭고 공정한 분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상에 불과하다. 이 세계에서 평등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은 어쩌면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동일 조건, 동일 환경에서 태어난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은 부모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건 타고난 복이며, 가난하거나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것 역시 개인의 불행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싶다면 죽을힘을 다해 노오력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정의와 평등을 빌미로 부당하게 ‘내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집단들이 자꾸만 눈에 거슬리고 내 것을 뺏기는 일들이 실체로 다가오면서 미움의 감정은 커진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서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얼마 전 십 대 남학생을 자식으로 둔 지인이 푸념했다. 요즘 십 대 남자애들은 억울함을 디폴트로 가지고 있다고. 이유를 물어보니 사회는 늘 약자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자신들은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되었단다. 전교 1등은 악착같이 공부만 하는 여학생들 차지고, 무거운 물건을 들을 때는 힘 좋은 여자를 두고 굳이 남자를 부르며, 똑같이 잘못해도 여자보다 남자가 더 혼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남자라는 이유로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고, 이 억울함이 만성이 될까 두렵다고. 이 말이 진실이라면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미움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란 존재는 내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박탈하는 것도 모자라 존재를 무능력하게 만드는 교활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감정이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 이동하면 개인의 억울함과 분노는 공공의 분노가 되고, 감정을 야기한 대상은 공공의 적이 되는데 김치녀 된장녀가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모든 거래의 기본은 기브 앤 테이크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받는 것에 익숙한 여자들을 보며 ‘남자의 매너’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제는 남자도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마음에도 들지 않는 여자의 밥값까지 계산하는 것은 부당하고, 계산대 뒤에 서 있는 여자는 속물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그녀들은 갱생 가능한가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어떤 남자를 선택할 것인가’보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쟁취할 것인가’ 훨씬 매력적이다. 여자는 선택의 대상이지 선택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이 좋아져서(?) 여자도 남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연애에서 선택권이 여자에게까지 주어지면서 선택하지도, 받지도 못하는 남자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선택받지 못한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닌 외모, 돈, 능력 따위 때문이라니. 누가 뭐래도 진정한 사랑은 존재한다고 믿는 남자들 앞에 잔인한 자본주의 논리가 개입되면서 남는 거라곤 씁쓸한 좌절감, 그리고 나의 진심을 훼손한 여자들에 대한 분노와 혐오다. 나의 진실된 사랑을 부정하는 불순한 집단들.

자본주의의 사회를 지속하게 만드는 동기부여는 능력과 자본이며 이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경쟁이다. 자본과 능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 진심을 알아주는 여자를 찾기란 진흙에서 진주 찾기와 다르지 않다. 세상은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고 이에 부흥하듯이 김치녀 된장녀들이 연애 시장의 물을 흐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여자들의 자정작용은 가능한가? 유감스럽게도 자정작용을 기다리기엔 저들의 욕망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탁하다. 아무리 에너지와 노력을 쏟아부어도 갱생의 여지가 없는 대상에게는 그저 혐오만 남을 뿐이다.

손희정이 언급한 ‘나와 연애해주지 않는 여자’라는 텍스트에는 두 가지 콘텍스트가 존재한다. 하나는 저 여자는 나와 딱히 어울리지 않다는 ‘신포도’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 사랑과 진심까지 부정당했다는 것에 대한 억울함이다. 특히 이 감정은 이 여자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선택했을 때 극대화된다. 내 사랑을 거절한 이유가 나보다 조건이 좋은 남자 때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한때 내가 품었던 사람이 “남자 경제력에 빨대 꽂는 무개념녀”[1]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그 여자는 좋아했던 사람이 아니라 허영과 사치에 눈이 먼 김치녀 된장녀일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남성의 경제력에 따라 움직이는 여자들은 이미 문명이 발생했을 때부터 존재했었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더) 욕을 먹는 이유는 남자들의 평등이 수 백 년을 거쳐왔지만 그들에게까지 여전히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남자와 나와의 차별은 능력의 차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지만, 그 능력의 차이를 여자로부터 평가받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이러한 부당함을 느끼는 남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여성 혐오는 이제 공식 승인된 감정으로 인식하게 이른다.

 

배제의 이중성

 

배제의 밑바탕에는 있음/없음 그리고 자격 미달이 놓여 있다. 배제의 근거는 가시적일수록 효과적이다.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일 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일 때 배제는 훨씬 쉽고 또한 강력하다. 그렇기에 신체, 성별, 권력(자본), 출신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배제의 이유가 된다. 흑인은 백인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은 남근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장애인은 정상적인 신체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는 좋은 혈통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배제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것이 부재와 미달의 이유가 되냐고 마치 처음인 것마냥 되묻는다(Reboot). 이쯤 되면 실체를 뛰어넘는 강력한 명분이 필요한데 바로 운명이다. 운명은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운명은 거대한 신이 나에게 부여한 것으로 함부로 거스를 수 없다.

그런데 신보다 인간이, 운명보다 의지가, 차별보다 평등이 먼저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고 이것은 개인을 움직이게 하고 저항하도록 도모했다. 이제 운명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 될 뿐이며 이 수단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전적으로 개인에 달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체, 출신, 성별, 자본의 여부로 권력을 확보한 기성 집단은 이 개인들의 움직임을 내버려 둘 리가 없다. 그들의 움직임은 곧 중심을 흔들고 해체하려고 들 것이기 때문이다. 더 강력한 것이 필요하다. 이들의 행위들은 불법이고, 파렴치하고 사회의 질서를 혼란을 야기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입지는 좁아질 것이고 혐오는 더욱 강력해질 것이고 그만큼 배제는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장애인, 외국인과 같은 비주류 집단에 대한 혐오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진다. 이들은 지금까지 잘 지켜온 당연스러움을 거부하고, 중심을 흔들고 분란을 야기한다. 하나같이 공공의 이익을 헤칠 뿐이다. 한국인의 돈을 빼가는 외노자가 그렇고, 성평등을 주장하며 내 권리를 빼앗은 페미니스트가 그렇고, 이동권을 주장하며 세금을 축내는 장애인이 그렇다.

차이가 차별의 이유가 되고, 다름이 배제의 이유가 되고, 투쟁이 혐오가 되는 세상에서 나는 어느 위치에 서 있을 것인가. 인간은 지극히 이중적이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을 선택하기 때문에 늘 같은 선택을 할 수 없다. 나의 바운더리가 중심에 가깝다면 외부의 침입이나 저항이 결코 달갑지 않을 것이고 멀다면 저들이 가진 권리(력)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내가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모든 것의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 · 장윤미(문화평론가)


*참고문헌

[1]손희정, <다시 쓰는 세계>, 오월의봄, 2020년,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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