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호 구매하기
[강선형의 시네마크리티크]<노매드랜드>, 무엇을 위해 떠나는가
[강선형의 시네마크리티크]<노매드랜드>, 무엇을 위해 떠나는가
  • 강선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07.05 0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원작 『노마드랜드』의 부제는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Surviving America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다. 이 부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책과 영화가 향하고 있는 곳은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곳’으로서의 미국이다. 영화는 책에는 부재하는 인물인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맨드) 의 이야기를 자막으로 소개하며 시작된다. 엠파이어 시에 있던 US석고 공장이 폐업하면서 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주거 공간도 모두 폐허로 남게 되었고, 공장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던 공장 인근 지역 모두 우편 번호까지 사라지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죽은 남편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던 곳, 함께 노동하고 서로 부양하며 삶의 연쇄를 이어온 곳을 떠나며, 펀은 남은 물건들을 창고에 넣어두고 밴을 타고 떠난다. 그리고 떠나는 길 위에서 그녀는 자신과 닮은 무수한 사람들을 만난다. 두 자녀를 다 키워냈으나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낮은 임금으로 몰리는 상황을 마주한 린다(린다 메이), 암에 걸린 스왱키(샬린 스왱키), 아들의 죽음 이후 길 위의 삶을 택한 웰스(밥 웰스)……. 그들은 어느새 서로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나누고 길 위에서의 생존법을 나누며 미국이라는 땅에서 ‘살아남는다.’

 

무엇 때문에 떠나는가, 무엇을 위해 떠나는가

『노마드랜드』의 작가 제시카 브루더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집을 잃고 저임금 단기노동으로 몰린 새로운 노년층의 삶을 조명했다. 영화 역시 펀의 여정을 따라가며 삶이 저물어가는 한 지점에서 만난 ‘하우스리스’의 삶들을 그려낸다. 브루더가 만난 사람들이 영화에 실제로 등장하여 그 자신을 연기했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책과 영화가 수면 위로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의 감춰진 단면들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밴이 고장나 언니 돌리(멜리사 스미스)에게 수리비를 빌리러 간 펀은 수많은 하우스리스들을 딛고 여전히 견고하게 자신의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여전히 손님들을 초대할 수 있는 아늑한 집과 잘 가꾸어진 마당을 가지고서 ‘2008년에 모든 것을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같은 이야기들을 하며 절박하지 않은 아쉬움들을 토로하는 여유를 나눈다. 우편번호마저 잃고 떠도는 삶 속에서 그런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마주하며 살아남아 온 펀은 그들에게 말한다. ‘감당 못할 집을 사려고 평생 모은 돈을 투자하고 빚을 지도록 부추기다니 이상하군요.’ 그러자 그들은 펀이 자신들을 제한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고 답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펀을 제한적인 시선으로 본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가버린 사람.’ 그들에게 펀과 떠도는 삶을 택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삶을 어떻게 그들과 달리 보아야 할까? 펀과 떠나는 삶을 선택한 이들은 절박한 현실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단지 돌리가 펀에게 말하는 것처럼 ‘늘 밖을 더 흥미로워해서’와 같은 그런 무책임한 이유가 아니다. 그렇지만 또한 그들의 절박한 현실이라는 것이 단지 그들이 집을 잃도록 내몰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펀이 돌리의 말에 ‘그게 내가 여기 머물 수 없는 이유야’라고 답하듯이, 펀과 떠나는 사람들은 그들이 택한 삶의 형태를 그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들, 또 금융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숫자만으로 의미와 가치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떠나야 했기 때문에 떠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단순히 견딜 수 없는 가난의 굴레라고 말하기보다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모색할 수밖에 없이 만드는 절박함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절박함은 아주 동일한 의미에서의 추동력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노매드랜드>는 이렇게 그들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로서 그들이 처한 사회적인 환경을 그려내는 데에서만 멈춰 있지도 않다. 그들의 삶은 내몰리고 강요된 모습으로 처연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매 순간순간 그들의 능동적인 선택들의 연속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이동하는 삶은 늘 일방향으로 줄지어 떠나는 행렬이 아니라, 여러 방향을 가리켜 보이는 이정표 앞에서 언제나 나아갈 방향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단지 길의 방향을 선택하는 것만이 아니다. 펀의 서사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주어지는 안정의 기회들을 그녀가 저버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는 여러 선택지들 앞에서 늘 떠나는 방향을 선택한다. 펀은 돌리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녀를 좋아하게 된 데이브(데이비드 스트라탄)에게서도 함께 살자는 제안을 받고, 마트에서 만난 옛 인연을 간직한 가족에게서도 초대를 받지만, 그녀는 늘 다시 떠나는 길 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녀를 계속해서 길 위에 붙드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이다. 그녀는 ‘기억하기 위해’ 길 위에 머문다.

 

길 위에 머문다는 것

길 위에 머문다는 건 사실 머물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길 위에 머문다는 건 그 자체로 모순을 가진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펀이 그런 선택을 계속해서 하는 것은 그녀가 얻게 될 안정과 남편과의 기억을 맞바꾸어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부부와 함께 살게 된 데이브가 바깥에 방치해두는 밴처럼, 그녀는 자신의 삶의 전부였던 소중한 기억들을 잊어버린 채로 방치해두고 안정을 택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우리와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노동을 하고 다시 집에 돌아와 식사를 준비하는 우리의 일상들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들은 온갖 분주함으로 가득한 것이다. 펀이 밴에서 그렇게 하듯이 통조림을 뜯어 끓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하는 건강한 한 끼의 식사를 위해서는 오늘의 요리를 구상하고 그에 알맞은 재료를 구매하고 요리하고 대화를 나누며 먹고 또 그것을 치우는 분주한 과정들의 연속이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늘 반복되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끼는 것일 뿐, 그것은 그 자체로 나의 생각의 연쇄들을 끊어내고 방해할 만큼 부산스럽고 어수선한 일이다. 펀은 그러한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자신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될 때, 그래서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들을 더듬고 매만져주지 않게 될 때, 그 때를 두려워하는 것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건강한 삶이라고 부르는 그런 삶들이 펀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 현재를 걸어 나갈 때마다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의 파편들이 부수어지고 짓이겨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일 것이다.

아마도 펀과 떠나는 삶을 택한 사람들이 길 위에 머물면서 가만히 두면 금세 떠나버리는 자신의 기억들을 계속해서 붙들어두는 것은 길 위에 머문다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표현일 것이다. 머무는 순간 떠나버리는 바로 그 기억 때문에 그것을 붙들어 매어놓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또 다시 떠나려는 펀에게 돌리는 말한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고. 이상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건 더 용감하고 정직했기 때문이었다고. 그러고 나서 자기 안에 담아두었던 자기에게 누구보다도 중요했던 펀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펀은 늘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숨어 있을 때 자기를 봐 주었고, 어떤 때는 스스로를 보기 전에도 먼저 자신을 봐주었던 사람이었다고. 펀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본 모습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조차도 잊어버릴 때에도 그것을 간직해주는 사람. 펀은 단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또 무책임하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간직하기 위해 떠나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사실 일상 속에서 펀과 같은 사람들에게 쉽게 말하곤 한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무언가를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 그만 놓아주어버리라고 말한다. 그것이 건강하지 않은 삶인 것처럼 그렇게 쉽게 말하곤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건강한 삶이라는 것,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영위한다는 것은 정말로 무슨 의미일까? 바쁘고 분주하게 계속해서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 또는 돌아가는 수레바퀴 위에 올라타는 것, 정말로 그것만이 전부인 것일까? 펀의 길 위에서의 끝나지 않는 여정은 바로 이런 물음들에 가닿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의 미국이라는 척박한 터전 위에서 우리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펀에게 제한적인 시선으로 보지 말라고 말하면서 돌리의 남편인 조지가 덧붙인 말, 우리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가버리지 않았다’는 말, 그러니까 삶의 이 분주한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고 돌려왔다는 그 말은 정말로 충분할 것일까? 우리 삶에 책임 있는 태도는 정말로 그것뿐이라는 것일까? 우리 역시 이런 질문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간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묻는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강선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강사 및 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40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