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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다양성 안에서 헤엄치기: <물고기로 죽기>
[양근애의 문화톡톡] 다양성 안에서 헤엄치기: <물고기로 죽기>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21.07.27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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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몸으로 살다가 죽는 일

<물고기로 죽기>를 본 날은, 세 명의 성소수자가 세상을 등진 뒤의 어느 날이었다. 그들을 성소수자라고 쓰고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들이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성소수자로만 대표(representation)되는 자신의 삶을 넘어서고자 했다는 사실이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인이고 작가고 교사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그들로 인해 넓혀진 지평과 그들을 통해 달라질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성소수자라는 이 명명법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성소수자’가 뭘까. 따옴표 속의 단어를 생경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이 복잡한 기분이 대체 ‘정상’이 뭘까를 생각할 때 생경해지는 심정과 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몸과 생각과 환경과 생활방식과 성적지향과 취향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규범적 테두리가 요령부득일 때가 많다. ‘장애인’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대체 ‘정상’인 신체가 무엇이길래, 얼마나 신체가 오작동해야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일까.

‘정상’의 범주로 상상된 사회적 이상에 의문을 던지고 중심을 바꾸는 흐름을 공부하면서, 지금은/아직은 비장애인이자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여성인 나를 다양한 사람들 속에 배치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다르게 배치된 나의 세계 속에는 다양한 이웃이 있다. 그들은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렌스젠더, 장애인일지 또는 다 아닐지 모르지만, 학생이고 연구자이고 창작자이고 예술가이고 교사이고 활동가이고 그 이상이 되고자 한다. 무엇보다 고유성을 지닌 하나의 인간이고자 한다. “사람은 몸 하나이거나, 생식기 하나이거나, 이름 하나이지 않습니다.” <물고기로 죽기>는 생식기로 사람을 여성과 남성으로 판별하는 성별이분법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누구나 물에서 태어난다. 태어난 몸으로 한 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죽을 때는 어떨까.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누군가가 자기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데 한 생을 다 바쳐야 한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물고기로 죽기>는 MTF 트랜스젠더 소설가 김비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공연이다. 이 공연이 성소수자의 늙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귀가 번쩍 뜨였다. 성소수자의 재현이 거의 정체성의 깨달음과 사회적 차별로만 대표 되었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과 불화하는 시기를 지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늙고 병들어가는 자기 몸을 끌어안고 살다가 죽기 마련이다. 이 말은 전혀 가혹하지 않다. 주어진 시간이나 순서는 다를지 몰라도, 누구나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 존재가 겪는 다름없음은 평등함과는 다른 문제다. ‘자연사’하고 싶다는 말이 누군가에겐 지극한 소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로 죽기>는 트랜스젠더의 퀴어성을 리드미컬하게 가시화하면서도 그 흔들림 너머, 인간의 늙음과 죽음에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귀하고 오래 기억되어야 할 공연이다.

 

사진1-'물고기로 죽기' 출처: 원준혁 ©연극연급 프로젝트
사진1-'물고기로 죽기' 출처: 원준혁 ©연극연급 프로젝트

보늬가 껍질을 바라보듯

무대 위에 등장하는 인물은 둘, 아니 셋이다. 황순미, 양대은 배우가 한 몸처럼 꼭 붙어서 몸을 움직이는 것 외에도, 실제 사람보다 큰 형상으로 수어통역사가 영상 안에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인다. 최근 연극 안에 수어통역, 문자통역, 음성해설 등 배리어프리를 시도하는 사례가 많아졌지만, <물고기로 죽기>의 수어통역은 공연에 부가되거나 추가된 배려의 차원이 아니라 공연의 중요한 한 요소로서 배우와 음악과 텍스트와 ‘함께’ 움직였다. 한국농인LGBT설립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어통역사 김보석의 존재감은 이 공연이 퀴어성뿐만 아니라 장애의 문제까지 ‘가시화’하고 있다는 것을 전략적으로 잘 보여준다.

김비 작가가 연재하고 있는 ‘달려라 오십호(好)’에서 여성과 남성을 조합한 한자를 쓴 것처럼, 그리고 공연 포스터에 물고기 형상을 한 사람의 다리가 한쪽은 남성, 다른 한쪽은 여성으로 그려져 있었던 것처럼, 황순미 배우와 양대은 배우는 하나의 몸에 깃든 서로 다른 성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나의 몸 안에 있는 이질적인 요소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두 배우는 서로 어깨를 맞대거나 몸을 교차시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거나 등을 맞대고 앉으면서 신체적 행위를 만들어나가고 한 사람 몫의 대사를 나누어 발화한다. “우린 왜 몸에 갇혀 사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요?” 두 사람이 무대 위를 뛰어다니며 몸으로부터 이탈했다가 돌아오면서 무대는 ‘사람의 장소’가 된다. 거부당하고 낙인찍힌 이상한 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스스로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규범적 성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영상에는 형형색색의 염색체가 춤을 추고 키라라의 비트 넘치는 음악은 극장의 심장 박동을 크게 뛰게 만든다. 살아있다는 생생한 느낌은 뿌리로부터 발바닥을 통해 올라와 몸통을 진동시키는 것일까.

그러나 그들은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진다기보다 껍질 안에 들어 있는 속껍질, 혹은 하나의 자아 안에서 자라고 있는 여럿의 ‘나’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늬가 껍질을 들여다보듯,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나라는 겉껍질을 들추고 난 후에 드러나는 내피를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 몸의 문제와 정신의 문제는 다른 것이지만, 나라는 몸의 통합만큼이나 마음과 정신을 가진 나라는 존재가 통합된 자아로 느껴지지 않는 문제 역시 만만치 않다. 말하자면, 하나의 고정된 실체라고 상정되는 자아란 어쩌면 구름과도 같아서 가까이서 바라보면 그저 물의 입자일 뿐, 시시각각 모양이 바뀌기도 하고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특정한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는, 유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성전환 수술 후, 드디어 자유로운 몸이 되어 지프를 타고 전국을 여행한 이야기는 뭉클하다. 나로부터 벗어나 나를 만나는 그 자유를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상에는 김비가 찍은 시외버스터미널 사진이 여러 차례 지나간다. “내가 원하는 나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각은 낯선 터미널에서 만난 자신에게 용기를 준다. 그리고 문학, 김비가 써왔고 쓰고 있고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 이 공연이 트랜스젠더로 환원되지 않는, 소설 쓰는 김비의 이야기로 나아가는 전개가 나는 너무 좋았다. “나는! 나를 쓰는 사람입니다! 나를! 지켜내기 위해, 빼앗기지 않기! 위해 쓰는 사람입니다!” 비명처럼 외치는 그 장면이 정말 좋았다. 주민번호 뒷자리 1을 쓰고 투고한 소설로 ‘여성동아’ 장편 공모상을 받은 아이러니한 일화의 주인공인 그가, 네가 누구인지 증명하라는 무례한 질문을 향해 여전히 자기 글이 어디에 닿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작가로서 응답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이 참 좋았다.

공연의 큰 얼개가 유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 잔인한 설정을 원망하는 마음이 든 것은 연이은 부고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파도 앞에서 더 크게 몸을 흔들며, 물살을 따라 자유롭게 헤엄치면서, 경계 없이 사랑하다가 물고기로 죽기를 택하고 다른 물고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그의 이야기에 끝내 설득되고 말았다. 그러니 우리 모두 “살아생전에 죽는 것은 금지”하기로, 누군가에게 판별되는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하자고, 극장 밖을 향해 나도 말하고 싶어졌다.

 

사진2-'물고기로 죽기' 출처: 원준혁 ©연극연급 프로젝트
사진2-'물고기로 죽기' 출처: 원준혁 ©연극연급 프로젝트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상하다

<물고기로 죽기>의 마지막은 객석에 앉아 있던 김비가 무대로 올라오면서, 그리고 수어통역사인 김보석이 그들과 함께 서면서 다시 개시된다. 김비에 의해 다시 한번 발화되는 대사, “나는, 사람입니다. (...) 사람은 몸 하나이거나, 생식기 하나이거나, 이름 하나이지 않습니다.”는 그 직접성에 의해 의미가 강화된다. 이 장면은 이야기 속 주인공을 직접 본다는 놀라움을 넘어 당사자성을 확장시킨다. 김비가 직접 무대 위에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가 만난 것은 사실 김비의 몸이 아니라 두 배우의 몸이었다는 자각도 일어난다. 그러나 다양한 여러 개의 몸을 현시한 배우의 몸은 김비의 재현이나 대리물이 아니었다. 이 공연의 이야기는 김비로부터 나왔지만 트랜스젠더 혹은 퀴어를 넘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규범적이고 제도화 된 성과 그렇지 않음을 구별하기 위해 나온 ‘퀴어’를 기꺼이 전유한 성소수자들처럼, 장애인을 비하하기 위해 쓴 말을 전유한 ‘크리핑(cripping)’의 전복적 상상력처럼, ‘정상성’ 규범에 저항하고 중심의 공백을 질문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개인과 사회의 접면을 넓히고 다양성이 자유롭게 헤엄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만드는 문화가 곧 역사가 된다는 인식을 더 잘 벼려야 한다. 다른 몸을 가지고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과 이웃이 될 수 있다면, 당사자성이라는 말로 그들을 상대화하거나 타자화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나와 다른 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당사자성은 그렇게 확장될 수 있고, 그렇게 차별과 혐오는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이가 들면서 신체의 기관이나 장기가 치료 여부와 무관하게 다른 상태가 되어간다고 느낀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고정된 성 역할로 살아지지도 않는다. 통치나 그 밖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규범적 경계가 허술하다는 생각도 강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상한(queer) 사람들이 아닐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성은 이상함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상한 우리는 결국 모두 죽음 앞에 설 것이다. 그 마지막을 공연의 마지막처럼 즐거이, 두 손을 치켜들고 맞이하고 싶다. ‘퀴어(漁)’ 만세!

 

글 · 양근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극작, 드라마터그, 평론을 병행하며 극 창작에 참여하고 있다. 2016년 방송평론상을 수상했다. 기억/역사의 빗금과 경계를 파열하는 문화의 정치성 수행성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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