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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문화톡톡] 관계의 선택, 선택의 관계-<우리들>
[김희경의 문화톡톡] 관계의 선택, 선택의 관계-<우리들>
  • 김희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1.08.09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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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구의 룰은 간단하다. 피하거나 맞거나 끌어안거나. 내야에 있는 선수는 공을 열심히 피한다. 그러다 맞으면 밖으로 나간다. 맞는 게 두려운 사람은 더 요리조리 숨으며 피한다. 반대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우도 있다. 본인 앞에 던져진 공에 맞을지 모르지만 용기를 내어 힘껏 손을 뻗어 공을 끌어안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룰도 간단하다. 피하거나 맞거나 끌어안거나. 피구와의 본질도 같다. 모두 ‘선택’의 문제라는 것.

영화 <우리들>은 어른들을 위한 ‘관계 선택지’와 같다. 작품을 보다보면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일뿐, 어릴 때 운동장에서 피구를 배웠던 순간부터 인간관계를 배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피구에 서툴렀던 것보다 관계 맺기엔 더 서툴다. 어른이 되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온통 초등학생 이야기뿐인 이 작품은 아직도 서툴기만 한 어른들을 위한 영화다.

 

<우리들>엔 세 가지 선택에 해당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선, 한지아, 이윤이다. 남매 사이인 이선과 이윤, 그리고 이선과 같은 반이 되는 전학생 한지아. 영화는 이선의 눈을 통해 바라본 학교 친구들, 그리고 지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피하거나’를 선택하는 인물은 한지아다. 동시에 어른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지아는 이선에 비해 부유한 집에서 자라고 있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혼했으며, 전학 오기 전 학교에선 부모의 일이 알려지면서 왕따를 당했다.

부유한 집은 육체만 훌쩍 커버린 어른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지아의 상처는 어른들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을 나타낸다.

지아는 방학식 때 학교에 갔다가 마주하게 된 선이와 빠른 속도로 친해진다. 선이가 왕따인 걸 모르는 상태지만, 아마도 관계에 대한 갈증은 서로 통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가장 큰 결핍인 ‘엄마’란 존재가 선이에겐 결핍이 아닌 오히려 행복과 만족의 근원이 되는 것을 보고 지아의 고독은 더 깊어진다.

지나친 외로움은 관계적 악순환의 근원이 된다. 자신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럴수록 외로움은 더 깊어진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보라의 존재는 지아가 더욱 공포감을 느끼고 선이를 피하게 만든다. 보라는 선이와 친했지만 선이를 왕따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리고 지아의 태도는 돌연 변한다. 선이의 인사는 잘 받아주지도 않는다. 선이로 인해 자신이 다시 왕따를 당해 고립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작용한 것이다. 이 두려움은 선이에 대한 회피로 이어진다.

 

지아는 선이를 ‘투사’의 대상으로 삼는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위해 그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는거야”라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했을 말을 선이에게 쏟아 붓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른들은 이런 지아에게서 현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선이는 어쩔 수없이 ‘맞거나’를 선택하게 된다. 선이는 믿었던 친구 두 명 보라와 지아로부터 연이어 소외된다. 이 소외는 다른 사람들, 즉 집단으로부터 격리되는 효과까지 유발한다. 피구에서 공을 맞으면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하지만 맞는 선이는 지아보다 훨씬 성숙하다. 맞을 것을 알면서도 다가간다. 처음에 지아를 보자마자 이름이 뭐냐고 묻는 선이는 반에서 왕따지만 사람에 대한 거리낌이 없다. 상처 받은 기억이 있어도 다가가고 싶어하고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계속 맞기만 하던 선이는 급기야 공격을 하게 된다. 이는 지아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맞은 만큼 돌려주는 선이의 모습도 어쩌면 어른들이 가진 단면일지 모른다.

 

가장 이상적인 ‘끌어안거나’를 선택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어린 윤이다. 윤이는 늘 친구와 놀다가 맞는다. 그래서 정작 ‘맞고 있는’ 선이의 잔소리를 언제나 듣는다. 그러나 그런 윤이는 밝고 천진난만하다. 지아를 자신의 친구인 것처럼 따르는 개방적인 태도, 자신을 때리는 친구와 끊임없이 함께 노는 것을 보라. 저 멀리서 날아오는 공을 온몸으로 감싸는 전형적인 ‘끌어안거나’의 모습이다. 누나 선이가 “너도 때려”라고 하니 “그럼 언제 놀아?”라는 말을 남기는 윤이. 이를 통해 그는 우리 모두 서툴지만 피구는 계속 되어야 하고, 그 안에 펼쳐지는 관계도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그저 관계 자체를 즐기는 것. 관객들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모를 그 순간을 윤이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떠올리게 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은 또 피구 선 안에 들어간다. 선택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관객들도 영화를 다 본 후 아이들처럼 피구 내야에 들어선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 선다. 피할 것인가 맞을 것인가 끌어안을 것인가.

 

*사진: 네이버영화



글 · 김희경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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