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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케이팝 에볼루션: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역사 (2)
[이혜진의 문화톡톡] 케이팝 에볼루션: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역사 (2)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1.09.06 09: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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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된 보아(출처: 출처:   http://dsfdsdr3f.blogspot.com/2013/02/blog-post_7.html)
일본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된 보아(출처: 출처: http://dsfdsdr3f.blogspot.com/2013/02/blog-post_7.html)

 

서구의 글로버리즘을 횡단하는 케이팝의 진화

1997년 IMF 외환위기는 한국의 대중음악산업계의 지형을 바꾸어 놓은 계기 중의 하나였다. 내수용 대중음악산업이 팔리지 않는 상품으로 전락하자 막대한 아이돌 자본을 갖고 있었던 대형 음악기획사들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세계 음악시장 2위의 일본 가요계에 처음 문을 두드린 것은 SM 엔터테인먼트였다. SM은 당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었던 보아(BoA)를 4년간 트레이닝하고 일본어 습득을 위해 어학연수를 시키는 등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통해 2001년 1월 J-pop 씬에 데뷔시켰다. 그해 5월에 발매한 첫 싱글이 오리콘 차트 1위에 오르고, 일본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들만의 무대인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에 6년 연속 참가하는 등 보아는 데뷔한지 불과 2년 만에 일본 가요 시장에서의 성공적인 진출을 입증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보아는 수출용 아이돌 중심의 케이팝을 해외에 정착시킨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J-pop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K-pop’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곧바로 K-pop star(2001)라는 잡지가 창간되면서 ‘K-pop’이라는 용어가 일본의 언론에 빈번히 등장했다. 이와 함께 2002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K-pop’이라는 어휘가 등재된 사실까지 더한다면 해외 시장에서 ‘케이팝’이라는 용어는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으며, 케이팝이 드라마나 영화가 해외로 확산되는 흐름에 힘입어 또 하나의 한류를 구성하는 강력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케이팝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확대되면서 한국의 대중가요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국내에 알려지게 되자 케이팝의 놀랄만한 상품성과 경제성에 대해 한국 정부가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즉 2000년대 초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한 케이팝 열풍은 한국의 소프트산업에 새로운 활로를 제시할 만큼의 강력한 힘을 갖추게 된 것이다. 초국적 자본과 미디어의 이동에 의한 역동적인 탈경계적 문화 현상으로 진화한 케이팝은 현재 전 세계 영화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할리우드의 영화산업과 비견될만한 일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케이팝이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전례 없는 초국적 문화현상이라는 사실은 그 동안 서구 중심적 글로벌리즘을 초극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1960년대 모타운 풍의 복고적 패션을 한 원더걸스(출처: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09/10/544310/)
1960년대 모타운 풍의 복고적 패션을 한 원더걸스(출처: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09/10/544310/)

케이팝은 SNS의 가장 큰 수혜자

아시아를 넘어 현재와 같은 글로벌 현상으로서의 케이팝의 확산과 진화를 가져온 것은 2010년을 전후하여 빠르게 확대된 인터넷ㆍ모바일ㆍ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역할이 가장 컸다. 2007년 JYP 엔터테인먼트의 4인조 걸그룹 원더걸스가 갖고 나온 <텔미>의 복고풍 댄스와 리듬이 열풍을 일으키며 화제를 불러 모으자 삼성경제연구소는 <텔미>를 그해의 10대 상품으로 선정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더걸스의 춤과 패션을 따라하고 또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을 인터넷과 모바일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공유하면서, <텔미>는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대중음악 팬들의 음악 소비 경향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공유가 보편화되자 사운드와 함께 영상의 질이 강조된 시점에서 원더걸스의 춤과 영상은 유튜브와 같은 영상 공유 플랫폼의 영향력을 각인시켜 준 경우에 해당했다.

그 뒤를 이어 <노바디>까지 히트하면서 한국 가요계를 연속 강타하자 데뷔 2년 뒤인 2009년 원더걸스는 미국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다큐에 출연한 GOD의 멤버 김태우의 말처럼, 당시에는 아무리 국내 인기 절정의 걸그룹이라고 해서 미국 음악시장에 진출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흑인음악에 대한 오랜 사랑을 자주 밝혀왔던 박진영의 전략은 이른바 미국에서 ‘1960년대의 사운드’라고 불리는 모타운(Motown) 풍의 복고적 콘셉트를 활용하여 원더걸스를 ‘레트로의 여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원더걸스의 멤버 예은의 증언에서처럼 한국에서와 같이 화려한 패션과 무대 퍼포먼스를 선보였음에도 원더걸스를 잘 알지 못하는 미국의 관객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미국 활동을 이유로 한 장기간의 부재에 대해 국내 팬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전망이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원더걸스가 자신들의 세계적인 인기몰이를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무대가 아니라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통해서였다. 포인트 댄스와 함께 짧은 후렴구를 반복하는 이른바 훅(Hook)을 넣은 원더걸스의 곡들은 한 번만 들어도 강렬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에 한국어 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해외의 케이팝 팬들에게 시각과 청각을 통해 직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감각과 흡인력을 제공했다. 수많은 팬들이 원더걸스의 춤을 추는 자신의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그 파급력이 전 지구적 범위로 확산되어갔다. 2007-2009년 젊은이들 사이에서 급격히 확산된 소셜미디어의 놀랄만한 영향력은 데뷔 2년 차의 케이팝 걸그룹 원더걸스를 서구권으로 진출시킨 새로운 문법이었다. 슈퍼주니어의 멤버 이특 조차 프랑스 파리의 수많은 팬들이 루브르박물관 앞에서 <SORRY, SORRY> 댄스를 따라하는 영상(2011.5)을 접하고는 자신들의 음악이 아시아를 훌쩍 넘어 유럽까지 뻗어나갔다는 사실이 마치 비현실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산다라 박의 회상처럼 2009년은 그야말로 ‘케이팝 아이돌의 황금기’였다. 불과 2년 전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 선언을 두고 케이팝이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지만, 약 2년에 걸쳐 발생한 인터넷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확대가 그것을 현실화 해주었다. 해외 언론에서도 “페이스북이 K팝 유럽 공연을 성사”시켰다거나 “케이팝은 SNS 확산의 가장 큰 수혜자”가고 보도하는 등 2010년을 전후로 한 소셜네트워크의 확산은 케이팝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했다. 보아와 원더걸스의 해외 진출이 철저한 사전 기획에 의한 ‘현지화 전략’을 꾀해서 가능했다면, 슈퍼주니어의 유럽 진출은 이제 영어가 아닌 한국어 가사 그대로도 전 세계 해외 팬들의 감성을 흡수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2011년 'SM타운 라이브 인 파리'(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10613138200005)
2011년 'SM타운 라이브 인 파리'(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10613138200005)

 

21세기 ‘코리안 인베이전’

2011년 6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프랑스 파리의 ‘Le Zenith de Paris’에서 개최된 ‘SM타운 월드 투어 인 파리’ 공연은 SNS를 통해 케이팝을 접한 프랑스 팬들의 엄청난 파급효과를 확인케 해준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케이팝 가수의 이름이 쓰인 티셔츠를 입고 드골공항의 최대 인파 기록을 세우며 아이돌 그룹들을 환영해주는가 하면, 짧은 공연 일정 때문에 티켓을 구하지 못한 팬들은 태극기와 한글로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국의 음악기획사들은 아시아를 넘은 전 세계의 팬들이 한국에서 온 대중음악이라는 의미로서의 ‘케이팝’을 온전히 승인하게 된 순간을 목격했다.

여기에 더해 2012년 7월 15일 YG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가수 싸이가 <강남 스타일>을 공개하자마자 빌보드 K-pop 차트 1위에 오르고 채 두 달도 안 된 9월 4일 한국 가수의 단일 영상물 최초로 유튜브 조회수 1억 건을 돌파하는 등 문화적으로 열세했던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케이팝 씬에서 연이은 신기록을 보여주었다. 당시 <매일경제> 뉴욕특파원이었던 박봉권이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강남스타일>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에 대해 ‘춤 동작이 코믹하고 재미있다’, ‘리듬의 중독성이 있다’, ‘(한국어라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춤과 노래를 따라 하기 쉽다’와 같은 요소를 꼽았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의 말처럼, “워크맨 시대에는 가사와 멜로디가 위주인 J팝이 떴지만, 음악을 비주얼로 즐기는 유튜브 시대에는 K팝이 대세”라는 것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과거 서양의 팝 스타들에 매료되었던 팬덤은 이제 아시아에서 자신들만의 스타를 찾으며 열광하는 현상으로 변화했다. 한류 열풍 속에서 케이팝은 새로운 매체 환경에 힘입어 일상 환경의 변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팬덤은 아시아의 대중문화에 세계인들이 향유할 만한 공통감각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케 한 계기를 형성해 주었다는 점에서 이제 케이팝 팬덤은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접근해가고 있는 추세다.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한류 현상에 대한 자부심과 부담감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JYP 박진영이 과거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다음의 글은 게재한 지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효한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우리에게 부국강병식 제국주의를 퍼뜨린 서구 열강들이 벗어던진 배타적 민족주의라는 질병을 동아시아는 지금도 한창 앓고 있다. 개인적으로 한류와 같은 문화적 소통이 정치·경제적 이슈에 좌우되지 않고 꾸준히 계속돼 동아시아가 유럽이 저지른 세계대전이라는 실수를 똑같이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우리나라 최고’, ‘우리 민족 최고’라는 관념을 벗어던지는 ‘포스트 모던(Post-Modern)’ 세상에 가보는 게 내 꿈이다. 어린 시절 내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고, 저녁 국기 하강식을 할 때 멈춰 서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자란 나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깨어나고 싶다. 이웃나라 국민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문화를 공유하도록 힘쓰는 것, 그래서 서로 싸우기 전에 조금 더 이해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나 같은 딴따라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글 · 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참고문헌

  • 유튜브 오리지널 <케이팝에볼루션> (https://nitter.nixnet.services/search?q=%23KPopEvolution)
  • 강준만, <한류의 역사>, 인물과사상사, 2001.
  • 유럽 달군 K글로벌·유튜브·맞춤 전략으로 대박, <한국경제>, 2011. 6. 12
  • 박진영 씨 한류 속 민족 과잉발언 파장, <중앙일보>, 2007. 2. 28.
  • 박봉권, 글로벌 시장에서 본 강남스타일열풍, <관훈저널> 제125, 2012년 겨울호,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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