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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린 나이트>, 삶이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린 나이트>, 삶이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 강선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09.0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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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만 하는 길, 떠나야만 하는 여정

<그린 나이트>는 중세 아서왕 전설에 등장하는 원탁의 기사 가운데 한 사람인 가웨인(데브 파텔)의 이야기, 『가웨인경과 녹색기사』를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는 가웨인의 전설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영웅의 전설만으로는 물어지지 않는 삶에 대한 여러 질문들을 던진다. 전설에서도, 그리고 영화에서도 이야기는 아서왕(숀 헤리스)과 원탁의 기사들이 모인 크리스마스 연회에 녹색기사(랄프 이네슨)가 등장하여 게임을 제안하며 시작된다. 녹색기사가 제시한 게임은 용기 있게 나서서 자신의 목을 치는 기사에게 이듬해에 똑같이 되돌려주겠다는 이상한 게임이다. 목이 달아난 기사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 자신이 당한 일을 되갚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용기있게 나선 가웨인이 녹색기사의 머리를 내려치자, 녹색기사는 정말로 잘려진 자신의 목을 들고 유유히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서 사라진다. 1년 뒤 성밖의 녹색예배당으로 자신을 찾아 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가웨인의 전설의 내용은 원탁의 기사들 가운데 가장 강한 기사 중 한명인 가웨인이 나서서 녹색기사의 목을 치고, 녹색기사는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숲으로 떠나며, 가웨인이 다시 자신의 목을 치겠다는 녹색기사를 만나기 위해 1년 뒤 숲으로 떠나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전설의 내용을 충실하게 따라가는데, 그 과정에서 독특한 숨결이 불어넣어진다.

<그린나이트>의 가웨인은 어머니(사리타 초우드리)의 돌봄 아래에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살아있는 전설들과 함께 원탁에 앉을 수 없는 아직은 기사가 되지 못한 자이고, 다른 원탁의 기사들처럼 자신만의 전설을 만들기 위해 녹색기사의 목을 치러 호기롭게 나섰으나, 이후 녹색기사에게 자신의 목을 내어주러 떠나는 여정은 그에게 너무 두렵고 회피하고 싶은 일일 뿐이다. 누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러 여정을 떠난단 말인가? 아직 미처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자신의 생에 대한 끝없는 집착이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떠나야만 한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결말이 정해져 있는 여정일지라도 그는 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우리의 생명이 그 소멸하는 결말을 알면서도 시작되는 것처럼,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계약이고 약속이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처음부터 가웨인의 출발에 삶에 대한 은유를 담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의 여정은 가웨인의 전설처럼, 그리고 영화 속 인형극에서 펼쳐지는 영웅의 모험담처럼 그저 하나의 스토리로 있지 않고, 복잡하고 망설임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의 형태가 된다.

 

삶과 죽음, 원환을 이루는 것들

가웨인이 죽음을 향한 여정을 떠나며 온몸에 휘감은 두터운 갑옷은 그의 삶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보여준다. 그런데 가웨인은 갑옷뿐만 아니라 녹색기사가 목이 잘린 그 자리에 두고 간 도끼, 어머니로부터 받은 생명을 지켜주는 녹색 허리띠, 식량과 같은 것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강도들에게 빼앗긴다. 강도들은 나무에 가웨인을 묶어두고 떠나는데, 가웨인은 끈을 풀기 위해 몸부림치다 기력을 잃는다. 그때 카메라는 가웨인을 홀로 두고 회전하면서 아무도 남지 않은 스산한 숲의 풍경을 비춘다. 마치 혼미해져가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카메라는 다시 가웨인에게로 돌아오는데, 돌아온 자리에서 그는 백골이 되어 있다. 마치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이 그는 나무 아래 죽어 있다. 그런데 황망한 그의 죽음을 두고 다시 카메라는 회전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다시 가웨인에게 돌아올 때 기력을 잃고 포기한 것처럼 보이던 가웨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살아남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마치 그가 상상한 그의 미래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이후 모든 여정이 끝난 후 다시 한 번 반복되면서 원환을 이루는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된다.

 

가웨인은 여러 유혹들을 이겨내고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길러내며 녹색 예배당에 늦지않게 도착한다. 마치 자연 그 자체인 것처럼 앉아있던 녹색기사는 깨어나 가웨인에게 이제 목을 치겠다고 말한다. 가웨인은 녹색기사의 말에 당황한다. 정말로 끝이란 말인가? 안온한 성 안에서, 어머니의 품 안에서 살아갈 때는 가지지 못했던 용기를 처음으로 발휘할 곳이 바로 자신의 죽음의 자리란 말인가? 가웨인은 결국 녹색기사의 도끼를 피해 도망친다. 달리고 또 달려 성 안으로 들어선다. 이후 그의 미래는 백골이 되는 그의 상상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아서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왕위에 오른 가웨인은 사랑하는 에셀(알리시아 비칸데르)을 버리고 에셀이 나은 아이만을 빼앗는다. 또한 왕으로서 국가의 부흥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만 오히려 전쟁으로 아들을 잃고 백성들의 원성만을 받게 되며 적군에 의해 머리가 잘린다. 이때 우리는 다시 목이 잘린 가웨인을 두고 회전하는 카메라가 다시 우리를 녹색기사 앞의 가웨인으로 데려다 주는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삶은 죽음으로, 다시 죽음은 삶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녹색기사 앞에서 가웨인은 용기와 회한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이제 자신의 목을 치라고 말한다. 그러자 녹색기사는 웃으면서 가웨인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Well done, my brave knight. Now, Off with your head.’ 녹색기사는 가웨인의 목을 칠 것인가? 그을 떠나게 둘 것인가? 영화는 그렇게 물음을 남기고 끝난다.

 

삶이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가웨인은 죽었는가, 살았는가라는 방식으로 결말의 의미를 예측하기보다 우리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웨인이 녹색예배당에서 죽는 것과 그곳을 떠나와 다시 성 안에서의 삶을 사는 것, 둘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이것이 우리가 죽음과 삶의 원환 앞에서 우리의 삶에 던져볼 수 있는 질문이다. 먼저 가웨인이 녹색기사 앞에서 죽었다면, 녹색기사의 도끼날 앞에서 펼쳐진 미래와 그것은 과연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도, 자신이 그토록 얻고자 했던 영웅으로서의 명예도, 삶도 지켜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웨인은 녹색기사 앞에서 초연하게 자신의 목을 치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녹색기사가 그를 살려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돌아가 자신이 보았던 풍경과 다른 풍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는 죽을 각오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형태를 바꾸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용기 있게 그렇게 해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을 수도 있고 피할 수 있는 전쟁만큼은 피하면서 적군이 성 안으로 쳐들어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녹색예배당에서의 죽음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가웨인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우연들,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그것들을 배울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그가 의도했던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결국은 그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삶에 침투하는 우연성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다. 삶의 의지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것이고, 부지불식간에 찾아와 우리를 끊임없이 좌절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죽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가웨인에게 삶이 다시 한 번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심지어는 그는 그가 마주하게 될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삶도 죽음도 그에게 쉬워질 수가 없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침투하는 우연성들과 싸워야 할 것이고, 그 우연으로 인해 자신의 운명의 일부분이 바뀌거나 바뀌지 않거나 그는 계속해서 전투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쉬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녹색예배당에서 녹색기사에 의해 행해진 죽음의 고지 앞에서 처음 가졌던 용기를 매순간 되살려내야 할 것이다.  늘 죽음의 기사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다독이면서.

삶이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똑같이 열렬하고 절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의도했던 것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갈 것을 안다면, 또는 그것들이 모두 성공적인 시도들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다시 주어진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우리는 가웨인의 삶이 펼쳐진 그 순간, 가웨인의 삶이 펼쳐질 그 순간 끝나버린 스크린 앞에서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된다. 가웨인에게 펼쳐진 미래가 전자의 것이라면, 그래서 어려움들로 점철된 운명을 그래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면, 후자는 삶은 조금 더 쉬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시험점수와 같은 것이다. 미래에 받기로 되어있는 좋은 점수를 알고 있더라도, 그 점수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시험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우리는 이렇게 가웨인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독려하고 위로하면서 살아간다. 운명을 알든 모르든 말이다.

우리는 다시 녹색기사를 찾아가는 가웨인의 여정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는 녹색기사로부터 목이 잘릴 것이라는 결말을 알고 찾아간다. 그것은 녹색기사가 게임을 제안한 첫 순간부터 알려져 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여정은 정해져 있으면서도 가웨인을 온갖 유혹과 고난들로 이끌고 그를 성장시킨다. 동일하면서도 변화무쌍한 얼굴을 한 운명의 여신은 우리를 때로는 좌절시키고 때로는 북돋우면서 우리의 여정을 계속하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다. 결말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쉬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가웨인경과 녹색기사』는 <그린 나이트>에 이르러 한 영웅의 전설이 아니라 인간 삶에 대한 은유가 된다.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운명이 우리에게 짓궂은 게임을 걸어오더라도.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강선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강사 및 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40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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