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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놀이의 즐거움과 게임의 잔혹함-<기생충>과 <오징어게임>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놀이의 즐거움과 게임의 잔혹함-<기생충>과 <오징어게임>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1.10.0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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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포스터.

*이 글에는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게임>(감독 황동혁) 열기가 뜨겁다. ‘올킬’이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오징어게임>이 한때 넷플릭스 서비스 국가 83개국 모두에서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오징어게임>의 세계적인 흥행 요인을 분석하는 기사도 넘쳐난다. 이 분석 기사들은 <오징어게임>을 <살아있다>, <킹덤>, <스위트홈>, <헝거게임>과 같은 국내외 영화, 드라마와 비교한다. 이 가운데 작품의 서사나 주제 측면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자주 소환된다. 그리고 수직적인 계층 구조, 빈부 격차, 경제적 불평등, 생존을 위한 데스 게임 등이 키워드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오징어게임>은 실제로 <기생충>과 얼마나 유사할까? <기생충>의 ‘인디언 놀이’ 장면을 중심으로 그 구체적인 양상을 정리해 본다.

<오징어게임>은 ‘놀이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오징어게임>에서 놀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우선 작품의 서사는 놀이의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놀이의 종류는 여섯 가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 오징어게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딱지치기도 포함할 수 있겠다. 문제는 이 놀이의 성격이다. <오징어게임>의 인물들에게 이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생존 게임이다. 게임에서 지거나 탈락한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조상우는 “옛날에는 골목에서 놀다 보면 엄마가 꼭 밥 먹으라고 불렀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윌은 흐르고 상황은 변했다. 어릴 적에는 놀이였던 것이 이제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잔혹한 생존 게임으로 변질됐다.

 

'오징어게임'의 성기훈(왼쪽)과 서울대 경영학과 수석 입학자였던 조상우.
'오징어게임'의 성기훈(왼쪽)과 서울대 경영학과 수석 입학자였던 조상우.

‘설계자’ 오일남에게 <오징어게임>의 놀이들은 말 그대로 놀이에 불과하다. 삶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심심풀이일 뿐이다. 오일남은 성기훈에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사는 게 재미없다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가 이 게임을 설계한 것도, 선수로 직접 참여한 이유도 순전히 ‘재미’ 때문이다. 오일남의 시선은 서늘하다. 사채업자쯤으로 추정되는 그는 부자와 빈자의 삶을 ‘재미’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그들을 한 묶음으로 처리한다. 외국인 VIP들에게도 생존 게임에 참여한 인물들은 내기 대상에 불과하다. 오일남-프론트 맨-성기훈으로 이어지는 이 구조는 철저하게 수직적이고 폭력적이다.

<오징어게임>에서 놀이와 게임을 구분 짓는 잣대는 돈이다. 성기훈과 조상우를 비롯한 게임의 참가자들은 모두 돈 때문에, 빚 때문에 삶의 벼랑 끝에 몰려있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 위험한 게임에 참여한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의에 의해 참여 여부를 선택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오일남이 ‘재미’를 위해 설치한 덫에 빠져든 상황이다. 성기훈이 경마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이유도, 말에게 베팅하는 이유도 돈 때문이다. 그는 이 지점에서 VIP들과 동일한 위치에 선다. 그런데 성기훈의 행위는 놀이 혹은 재미를 위한 베팅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박한 외침이다. 그러한 점에서 재미로 베팅하는 VIP들과 다르다. VIP의 입장에서 보면, 성기훈은 경마의 말에 불과하다. <오징어게임>은 ‘말’이 된 성기훈의 행적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기생충'의 생일 파티 장면.
'기생충'의 생일 파티 장면.

<기생충>에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글로벌 IT 기업의 CEO인 박 사장은 아들 다송의 생일을 맞아 인디언 놀이를 설계한다. 그의 의도는 순수하다. 생일을 맞은 아들을 재미있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일파티는 우아한 노래와 박수로 흥겹게 진행된다. 박 사장에게 인디언 놀이는 즐거운 놀이일 따름이다. 반면 피고용인 기택에게는 실질적인 선택권이 없다. 그는 고용주인 박 사장의 참여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 이처럼 <기생충>의 인물 간 기본 구조는 수직적이다. 그들의 관계는 고용인과 피고용인, 부자와 빈자, 지상과 (반)지하로 구분된다. 그래서 <기생충>은 한국사회의 경제적 불평등과 수직적인 계층 구조를 다룬다고 평가받는다. <기생충>의 인디언 놀이는 이러한 수직 구조를 일시적으로 해체한다. 갑작스러운 폭우가 박 사장과 아들 다송에게는 정원에서 인디언 텐트의 낭만을 즐기는 계기가 되고, 기택에게는 반 지하방의 재난이 되는 빈부의 차이를 없애준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의 부재는 잠정적이고 표면적이다. <오징어게임>의 오일남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 참가한다고 해서 그가 다른 참가자들과 동일한 신분이 아닌 것처럼, <기생충>의 기택이 인디언 놀이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가 상류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디언 놀이가 박 사장에게는 놀이이지만, 기택에게는 업무의 연장일 뿐이다. <기생충>에서도 박 사장이 설계한 인디언 놀이는 생존 게임으로 마무리된다. 의도하지 않은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생일파티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참석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놀이터를 빠져나간다. <오징어게임>의 놀이터도 절박한 생존 게임의 현장이다. 게다가 <오징어게임>의 참가자들은 죽음의 놀이터를 스스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인디언 분장을 한 '기생충'의 다송.
인디언 분장을 한 '기생충'의 다송.

<기생충>에서 인디언 추장 분장은 가면의 역할을 한다. 이 가면은 인물의 실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빈부 격차, 경제적 불평등,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차이를 없애준다. <기생충>의 또 다른 가면은 기택 일가족이 쓰고 있다. 전원 백수인 기택 일가족은 명문대 재학생, 베테랑 운전사와 가정부, 유학파 미술 치료사라는 가면을 쓰고 박 사장 집에 기생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면이 찢어지면서 더 깊은 늪에 빠진다. <오징어게임>에도 가면이 등장한다. 프런트 맨은 물론 직원들도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도 계급이 존재한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가 그 표식이다. 오일남 역시 가면을 쓴 존재다. 그는 거액의 돈을 굴리는 인물이자 설계자이면서도 ‘치매 노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게임에 참여한다. 따라서 이 게임은 처음부터 불공평한 게임이 된다. 박 사장/기택, 오일남/성기훈은 서로 대응하는 존재들이다.

<오징어게임>에는 공평, 평등과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 단어는 가면을 쓴 상급자가 부하를 질책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된다. 그는 의사에게 다음 날 행해질 게임 종류를 알려준 부하를 총으로 쏴 죽이는데, 그 이유로 그의 행위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대사는 모순적이다. <오징어게임>에는 불공평과 불공정이 넘쳐난다. 성기훈을 포함한 참가자들은 게임의 종류를 모른다는 점에서는 평등하다. 그러나 게임의 구조 자체는 불공평하다. 주최 측이 놀이의 종류와 진행 방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참가자들은 그 놀이에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 오일남은 게임의 승리 방법을 다 알고 있다. 게다가 ‘징검다리 건너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주최 측은 게임의 규칙을 일방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 <오징어게임>의 주최자들은 공평, 평등, 공정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게임들은 구조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오징어게임'의 오일남(왼쪽)과 성기훈.
'오징어게임'의 1번 플레이어 오일남(왼쪽)과 성기훈.

구슬치기 놀이 장면에 나오는 ‘깐부 맺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오일남은 깐부가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지 않는 사이’라고 말한다. 구슬을 공유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깐부 맺기’ 과정도 수직적이며 불공평하다. 오일남은 구슬을 다 잃어도 죽지 않는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반면 성기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다. 정보의 심각한 불균형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오일남이 ‘깐부 맺자’라고 제안하는 것은 위선이다. 두 사람이 공평하게 게임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기훈은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하지만, 오일남은 치매를 가장한 채로 게임에 참가한다. 따라서 오일남이 구슬을 성기훈에게 양보한다고 해서 그 행위를 대단한 희생이나 휴머니즘으로 포장할 수 없다.

<오징어게임>의 세계는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공평해 보이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불공평한 구조로 되어 있다. 게임의 설계뿐만 아니라 진행 과정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달고나 뽑기’에서 한미녀는 몰래 가져온 라이터로 바늘을 달군 후 설탕을 녹여 살아남고, 그 라이터를 조폭에게 건네준다. 이러한 장면을 허술한 연출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온갖 편법과 불법이 횡행하고, 그들끼리 무리를 이루어서 이익을 챙기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징어게임> 자체가 현실의 복사판이다. 이러한 특징은 세계적인 흥행 요인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런데 <오징어게임>은 현실을 재현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관객들에게 판타지를 제공한다. 성기훈의 영웅 놀이가 대표적이다. 성기훈은 관객들이 감정이입을 하고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알맞은 인물이다. 노조 활동을 하다가 공장에서 쫓겨난 그는 현재 실업자이자 이혼남이며, 그러면서도 마음은 따뜻하고 선량한 인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황량한 사막에서 겨우 살아가는 존재인 성기훈은 죽음의 게임에서 승리함으로써 456억 원을 손에 쥔다. 그는 엄마의 수술비가 없어서 전처에게 돈을 빌리러 갔던 처지로 집을 나섰다가 거액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성기훈의 행적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정리한 ‘출발-입문-귀환’의 서사구조와 일치한다. 그는 온갖 모험을 하고 시련을 이겨낸 후 영약을 획득한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이 되어 떠났던 곳으로 돌아온다. 그러면서도 상금으로 획득한 돈에 손을 대지 않고 노숙자처럼 살아간다. 성기훈의 이러한 행적은 관객들에게 큰 위안을 준다.

 

달고나 뽑기를 하고 있는 '오징어게임'의 성기훈.
달고나 뽑기를 하고 있는 '오징어게임'의 성기훈.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결말은 많은 차이가 난다. <기생충>의 기택은 반지하에서 지하로 거처를 옮긴다. 반지하-저택-지하의 공간 이동이다. 게다가 기택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딸은 인디언 놀이의 아수라장 속에서 죽고, 아들은 정신이상자가 됐다. 기택이 전하는 모스 부호는 허공을 떠돌고, 돈을 벌어서 박 사장 저택을 구입하겠다는 아들의 다짐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더구나 박 사장 저택의 지하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기택과 근세 가족의 싸움은 잔인하면서 가슴 아프다. <기생충>에는 판타지가 없다. <오징어게임>에서도 인물들은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인 성기훈은 456억 원을 차지하는 부자가 된다.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에서는 ‘乙의 전쟁’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기생충>에서는 이 사회구조가 변화하지 않는다. 박 사장 저택에는 새로운 거주자가 들어서고, 근세가 거주하던 지하 공간은 기택이 차지한다.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이다. 반면 <오징어게임>은 ‘乙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성기훈이 새로운 미래를 예고한다. 거액을 쟁취하고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 성기훈은 아마도 시즌2에서 조금 더 영웅적인 인물로 나타날 것이다. <오징어게임>은 관객들이 성기훈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만들고, 이를 통해서 꿈과 위안을 제공한다. <기생충>의 현실은 냉정하고, <오징어게임>의 현실은 판타지를 머금고 있다.

 

*사진 출처: <기생충>=네이버 영화, <오징어게임>=넷플릭스.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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