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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혹시 당신은 정의중독에 빠져 있습니까
[장윤미의 문화톡톡] 혹시 당신은 정의중독에 빠져 있습니까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1.10.05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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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 노부코, [정의중독]
나카노 노부코, [정의중독]

 

1.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전신을 가리는 슈트-없다면 비슷한 기능을 하는 도구라도-를 장착하고 악당을 응징하기 위해 주인공이 출동을 준비한다. 범인이 영웅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이때 포인트는 두 가지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 악당을 응징할 때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처벌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없다. 대중에게 짜릿한 통쾌함을 주지 않는 영웅은 진짜 영웅이 아니므로.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는 서사는 대개 비슷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사적 욕망과 처벌과 응징의 주체자로서 철저하게(혹은 처절하게) 악당을 처벌·제거해야 한다는 공적 욕망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갈등이 그것이다. 결국 영웅은 후자를 선택하지만,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오는 길에 느끼는 외로움은 필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저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영웅은 고민한다. 이 일을 계속하며 외롭게 살지, 아니면 모든 것을 밝히고 범인의 삶을 살지.

그런데 일상을 내 걸지 않고도 영웅이 될 수 있는 세계가 열렸으니 바로 SNS 세계다. 이곳에서는 슈트를 입고 벗는 수고조차 할 필요가 없고,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SNS 세계는 익명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활동하고 있는 SNS 세계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선택, 구성되어 있기에 내 정의는 곧 이 세계의 정의이기도 하다. 여기에 '좋아요'와 따듯한 댓글은 내 정의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SNS 세계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악당에 대한 응징 수위는 법적, 물리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까닭에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악당을 비참하게 만들수록, 재기 불가능하도록 만들수록 쾌감 지수는 상승한다. 그런데 이 쾌감은 중독성이 있는 감정으로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자주, 더 강한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중독이란 그것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상태로 그것 말고는 대체할 것이 없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한 대상에 중독에 빠지게 되면 목적과 수단의 위치는 전도되고, 결과적으로 일상은 물론 주변을 망치게 만든다.

<정의 중독>(나카노 노부코, 시크릿하우스, 2021)은 뇌과학적 입장에서 사람들이 정의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책이다. 책에서 작가는 SNS가 정의 중독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편향적 사고를 하려는 뇌의 습성은 SNS 세계와 만나면서 훨씬 뚜렷해지고 극단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와 다른 생각과 사고를 하는 사람을 비난했을 때 느끼는 쾌감은 중독되었을 때 느끼는 쾌감과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이 쾌감을 지속할 방법은 간단하다. 내부 검열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나와 어떠한 관계도 없는 사람, 동시에 공공의 적으로 지목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모든 모욕을 주고 비난을 퍼붓는 것.

 

2. 타인을 비난할수록 쾌감을 느끼는 이유

본능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속한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대신 공격하는 습성을 지녔는데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도파민이다. 도파민은 쾌락을 관장하며 뇌를 흥분시키는 신경전달 물질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 도파민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집단을 공격할 때도 생성된다. 공격은 정의로운 행동이고, 사회성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공격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 예로 SNS상에서 이루어지는 특정인을 향한 네거티브 공격, 마녀사냥, 신상털기, 보복성 불매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집단 공격의 이유는 분명하다. ‘저’ 집단은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며 ‘우리’의 정의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막상 팩트체크보다 우선되는 건 저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하는 것이고, 그것에 따라 대응 태도를 결정하는 경우가 흔하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 때론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 편협되고 왜곡된 정보일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저들과 어떤 관계로 맺지 않았기 때문에 중립적인 태도로 객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동시에 정의의 기준은 나고 나는 곧 정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과 결정을 하지 않는 저들은 불한당에 불과하고 마땅히 비난받고 응징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뇌의 성향을 들여다보면 객관적인 판단, 중립적인 태도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논리적이고 편향적이다. 뇌는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을 선호하고 어려운 판단보다 쉬운 판단을 하려고 하는 것,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의 말을 더 신뢰하고 기왕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이고 그들과 어울리려고 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유다. 이러한 습성을 내집단 편향(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라고 하는데, 내집단 편향으로 연결된 집단이 보이는 성향 중 하나가 바로 확증 편향적 태도다. 작가는 확증 편향적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으로 SNS를 꼽는다. SNS에서는 비슷한 부류끼리 연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집단에서 원하는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높은데 문제는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선택은 늘 옳고, 내 선택은 곧 정의이자 세상의 진리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확증 편향적 태도는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습성이지만 SNS는 이 습성을 왜곡시킨다. 세상은 나와 같은 정의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확대해석하고, 나와 반대의 생각을 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곧 공격해야 할 적이자 처벌 대상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위험한 이유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물론 존재 자체를 비생산적, 비효율적이라고 확정 짓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극단적 사고방식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 세상에 정의는 단 하나여야 하고, 이 정의를 훼손하는 악당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불순하고 불쾌한 개인(또는 집단)으로 규정하여 혐오의 대상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토록 비난하고 혐오하고 공격한 대상이 내 가족이었다면, 또는 친구였다면, 하다못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라면 SNS 세계에서 했듯이 거침없이 모독과 비난할 수 있을까. 작가는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사는 세계는 영웅이 사는 세계가 아니라 이해와 관용이, 사과와 용서가 필요한 평범한 인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정의 중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작가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의도적으로 새로운 공간을 찾아가기, 불안정한 환경에 자신을 노출하기, 안일한 방법으로 대상을 범주화하거나 낙인찍지 않기.

 

3. 인간의 정의는 상대적이다

사회적 공분을 산 범죄자를 직접 처벌하겠다고 선언하며, 출동을 선언하는 유튜버들의 영상이 종종 올라온다. 그들은 스스로 영웅을 자처하며 범죄자가 죗값을 제대로 치르도록 만들어 법도 하지 못한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외친다. 이른바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일 테다. 그와 뜻을 같이하며 정의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댓글과 ‘좋아요’를 누르며 그들만의 정의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범죄자가 죗값을 치렀더라도 처벌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이 땅의 정의는 사라졌다며 불만을 표출한다. 기본적으로 죄인은 용서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기대에 부응하는 처벌이란 객관적이기보다 자신의 판단과 기분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만족과 통쾌함을 동반하는 처벌만이 제대로 된 처벌이고, 그것을 수행한 자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심리에는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본능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정의에 대한 욕망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단순 쾌감에서 비롯된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정의는 공동체를 선한 상태로 오래 유지하는 데 필요한 덕목이지만 이것이 편을 가르고 구분하고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해야 한다는 편향적 사고가 개입되면서 정의의 본질은 분열된다. 이 틈을 비집고 나오는 문제들이 차별과 배제, 그리고 혐오와 같은 형상일 것이다.

타인을 인정하기 싫을 때 가장 쉽게 쓰는 것 중 하나가 ‘멍청이’, ‘또라이’, 그것도 아니면 ‘~충’을 붙여서 부르는 말이다. 저마다 가진 특수한 상황과 조건을 납작하게 만들고 환원해버리는 이러한 원초적인 비난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반박이나 저항의 의지를 단번에 뭉개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좋은 논리다. 멍청이 또는 또라이라는 비난을 듣는 입장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란 멍청이와 또라이를 뛰어넘는 단어를 찾아 더 세게 공격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같은 급의 언어로 맞받아치는 것, 그것도 아니면 반응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 말고는 없다. 이러나저러나 확실한 건 둘은 이견을 좁히거나 합의하고 싶은 마음이란 처음부터 없고, 그저 저들은 애초에 틀려먹은 사회악이자 벌레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정의는 오로지 단 하나이고, 상대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내가 속한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념 없고 멍청한 또라이들이 모여 있는 쓸모없는 집단에 불과하다. 혹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 집단을 향해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강하게 외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정의중독에 빠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글 · 장윤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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