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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다시 시작되는 위안의 풍경 (1) - 손보미와 정소현의 초기 소설을 중심으로
[이병국의 문화톡톡] 다시 시작되는 위안의 풍경 (1) - 손보미와 정소현의 초기 소설을 중심으로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1.10.1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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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어 있음의 서사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반복되는 하루를 관통해야만 하는 나는 그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거나 그 하루에서 일탈하여 새롭고 낯선 시간에 자신을 놓고자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우선해야 할 것은 내가 가진 하루라는 시간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런 다음 그 하루의 비어 있는 어떤 지점, 결여된 지점에서 하루를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물론 이 일도 내가 진정 원하는 바로 그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이를 문학의 장에서 이야기해보자.

 

예술의 가치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두어야 한다는 인식은 숭고한 무엇 앞에서 위압감을 느끼는 존재의 왜소함만을 불러온다. 총체성이 사라진 시대의 소설은 그 모든 것을 전부 설명하거나 보여줄 수가 없다. 거창한 수사를 동원하여 거대한 담론을 생성하는 것은 2000년대 소설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작금의 소설이 갖는 힘은 단편적인 사건 속에 있다. 그것이 장편소설이든 단편소설이든 마찬가지이다. 성장을 말하거나 환상적인 장치를 도입하거나 극단적 폭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그것이 정치적 목적에 있든 자기 세계의 토로에 있든 그들의 욕망은 미시적인 것으로부터 거시적인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것을 총체적인 것의 추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범위 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들의 욕망은 결여의 기반 위에 서 있다. 숭고한 어떤 것을 눈앞에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인가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면 그들은 자신의 결여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결여를 찾아가는 여정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소설의 지향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사진출처 - 픽사베이

여기 그 여정을 절묘하게 그려내는 두 작가가 있다. 정소현과 손보미가 그들이다.* 그들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엿보기 위해 우리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지점을 먼저 읽어보아야 한다.

 

「양장 제본서 전기」에서 정소현은 자신을 한 권의 책으로 제본하는 인물을 통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을 지워내는 방식을 채택한다. 무엇이 비어 있는 것일까. 정소현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자신의 결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녀의 소설은 여기서 출발한다. 영지는 자신의 기원을 찾고자 매일 도서관에 가 자신이 태어난 해의 신문을 읽는다. 하지만 거기서 자신의 흔적, 유기된 신생아에 대한 기사를 찾을 수는 없다. 영지에게 존재의 기원은 결여 그 자체이기에 어디에서도 그것을 메울 수가 없다. 자신의 기원에 대해 말해 줄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영지는 지워내는 방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것만이 “비인간적인 처사에 대한 인간적인”(19쪽) 행위라 인식하는 그녀의 처연함이 아찔하다.

 

손보미의 「그들에게 린디합을」에서 문정우, 임안나의 공동 작품으로 발표된 <그들에게 린디합을>이 결국 길광용 감독의 <댄스, 댄스, 댄스>의 연장이라고 할 때, 감독이 원했던 것은 자신의 존재를 잃게 한 욕망에 대한 위로일 것이다. 이를 그려내기 위해 손보미가 취한 방식은 낯설다. 그녀는 텍스트가 결여하고 있는 지점에 집중한다. 핵심 인물이 부재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접근하는 방식. 타자들을 통해 주체를 확정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안정한 추측과 해석만을 불러온다. 독자들은 볼 수 없는 <댄스, 댄스, 댄스>의 마지막 십 분처럼, 비어 있음 그 자체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과정의 서사만이 남는다. 손보미는 결국 서사가 결여하고 있는 만큼 소설 속 인물에게 비어 있는 지점에서 시작하도록 강제한다. 그러한 인물을 바라보는 그녀의 텅 빈 시선이 차갑다.

 

그렇게 비어 있는 지점에서 그들은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일까. 채울 수 없도록 배제된 것들, 혹은 텍스트 내부로 들어올 수 없는 억압된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서사의 균열을 통해 그들이 질문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은 여기에 나름의 대답을 하고자 한다.

 

2. 위악적 균열의 ‘오차’

 

손보미는 「그들에게 린디합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텍스트가 결여하고 있는 지점에 소설의 지향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신수정이『그들에게 린디합을』의 해설에서 “서사란 다만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안간힘의 소산”이기 때문에 “서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건의 전말을 한눈에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어떤 것’이 있다는 것”(249쪽)이라 말한 것처럼, 손보미의 서사는 이야기될 수 없는 지점에서 머뭇거리게 하는 ‘어떤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에게 린디합을」이 마지막 십 분, 비어 있는 지점의 ‘어떤 것’에 집중되어 있듯, 「과학자의 사랑」역시 ‘백억분의 일’이라는 오차에 집중되어 있다. 고든 굴드가 찾아낸 “중력에 저항하는 지역”은 “행복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임과 동시에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위험한 공간”(189쪽)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으로 제시된 이 ‘오차’의 공간은 고든 굴드가 에밀리 로즈를 ‘오해’하는 것처럼 “모든 불행의 근원은 당연히 고디 자신”일 수밖에 없는 ‘비극’을 의미한다. ‘오차’를 포함하고 있는 굴드의 방정식은 오히려 굴드의 삶이 결여를 채우기 위한 ‘오해’의 여정이 되리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 존재들의 서사가 바로 손보미의 첫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을 이끄는 힘이라고 본다면 그들의 ‘어떤 것’이 그들의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 것일까. 그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 그 비어 있는 틈을 손보미는 어떻게 그려내고 있으며 이를 채우기 위한 주체의 노력을 어떠한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사진출처 - 문학동네 홈페이지
사진출처 - 문학동네 홈페이지

손보미가 그려내는 ‘비극’은 일종의 ‘오차’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자신의 문제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는데「여자들의 세상」의 남자가 그러하다. 그는 자신이 여성 타자에게 느끼는 감정을 아내에게 투사하여 아내의 부정을 의심한다. “신성한 사랑의 맹세와 서약이 점점 사라져가고 탐욕과 추악함으로 점철된 음란함만이 이 세계에 남아 있다”고 느끼는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127쪽)한다. 아내를 오해한 주체의 ‘오차’에서 비롯된 기만은 그로 하여금 “영속적인 결속”을 끊고 외로움으로 침잠하게 한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달콤한 잠 - 팽 이야기」의 인물들처럼 “우스꽝스러운 국면의 한 모서리씩 차지하고 있어서 묘한 균형을 맞추고 있”(196쪽)는 방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팽, 정호, 수지 등은 삶의 균열을 일상적으로 내면화한 존재와 관계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삶의 균열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는 것일까.

 

「폭우」를 보면 손보미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두 쌍의 부부의 이해할 수 없는 균열의 지점을 제시하고는 구원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력을 잃은 남편과 그를 돌보는 가난한 아내, 그 아내가 듣는 구청의 ‘미국의 대중음악’ 강좌의 강사인 남편과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마다 고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아내.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관계는 전반적으로 모호한 공간적 배경만큼이나 불분명하다. 두 부부는 계급의 차이만큼 삶의 방식이 다르지만 부부간에 제대로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비슷하다. 맹인의 아내는 강좌를 듣고 그 강의 노트를 남편에게 읽어주지만 “내가 읽어주는 걸 이해할 수 있어?”(47쪽)라고 묻는다.

 

그녀는 남편의 눈이 먼 것도, 그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형편인 것도, 그리고 그 밖에 그들이 겪고 있는 불행의 모든 원인이 오로지 그들의 멍청함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고, 또 앞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그녀의 남편은 계속 자판만 치고 있었다.(54쪽)

 

부부의 관계는 서로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 남편의 요구는 아내에 의해 묵살되고 아내는 ‘이곳’을 벗어나고자, 즉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를 수 있”(34쪽)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아내는 강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강사는 그녀가 찾는 음악이 아닌 비슷하지만 다른 노래를 가져오게 된다. 이 ‘오차’로 하여금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보지 못했거나, 혹은 보고도 못 본 척 했”(32쪽)던 삶의 균열을 “인생의 한 부분”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방식을 취한다.

 

강사 부부는 조금 더 복잡하다. 아내가 짐작하듯 남편과 맹인의 아내와의 외도만이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냐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부부의 표정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고, 화가 난 것처럼 보였으며 또 얼마쯤은 슬퍼 보”(38쪽)이는 이유는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아닌 알 수 없는 자리, 비어 있는 자리에 있다. 공백의 지점에는 와해된 관계의 흔적만이 남는다. 마치 부부간의 신뢰나 소통이 관계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믿음은 그것이 상실되는 순간 회복할 수 없는 간극을 경험하게 한다. 간극, 즉 믿음의 ‘오차’는 불을 지른 아이라는 실재를 불러온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방에서 시작된 화재는 그들 부부에게 기억해서는 안 되는, 균열의 기원이 된다. 아내가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관계를 봉합하고자 하는 의지이겠지만 텍스트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은 실재와 마주할 수 없는 주체들처럼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그저 이곳을, 이 자리를 벗어나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녀는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

“그애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있죠. 우리는 그애를 영영 잃어버렸어요.”(57쪽)

 

구원은 오지 않는다. “폭우 속에서 슬픔과 분노 때문에 멈춰버린”(58쪽) 그들은 균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자신들에게 결여된 것을 채울 수 없다. 그들은 알고 있다, 아이 없이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말이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사진출처 - 픽사베이

「폭우」의 부부들처럼 「6인용 식탁」의 부부 역시 어울리지 않는 관계를 지속시키고 있다. 집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식탁처럼 그들의 관계는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생활과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서술자인 ‘나’는 서사의 핵심으로 존재하지만, 그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실눈을 떠보지만, 결국 그들은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무도 없다. 텅 비었다.”(139쪽) ‘나’는 아내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저 남편이라는 기표에 고정된 채로 자기에게 맡겨진 위임을 다할 뿐이다. 그렇지만 “아내가 입모양으로만 무언가를 말하는 시늉”을 보고 한참 후에 그것이 ‘개자식’이란 단어임을 깨닫고는 낯설어 하는 것처럼 ‘나’는 그저 하나의 공백에 불과하다. ‘나’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와 윤의 아내의 외도가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며 말해지지 않은 서사의 빈 지점을 뚫고 지나가는 축에 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157쪽) 확신하지 못하지만 ‘나’가 기억의 저편 어딘가에 억압해 놓은 얼룩처럼 되돌아온다. ‘나’의 인식의 자장에 포섭되지 않는 빈 지점을 뚫고 나온 얼룩이 ‘나’를 파국으로 몰고 간 것이다. 아내는 ‘나’의 얼룩인가. 세 쌍의 부부가 모인 모임이 초토화된 그 자리에서 ‘나’는 아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156쪽)고 말한다. ‘나’가 자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식탁의 거대함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어디에 있는 거야? 아니,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158쪽)라는 질문은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지만 손보미는 거기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컵을 하나 깬 것 이외에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아내는 깨진 컵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유리조각을 꼼꼼하게 치운 후,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개그 프로그램을 봤고, 커피도 한 잔씩 마셨다. 당신 친구들은 이상해요. 아내의 말에 내가 물었다. 왜? 너무 경직되어 있어요. 무슨 뜻이지? 다 바보들 같아(143쪽)

 

‘나’와 윤의 아내가 외도했다고 진술된 피크닉을 다녀온 그날 저녁, 부부는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만 「폭우」의 화재처럼 ‘깨진 컵’은 그들의 관계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지점에 처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아내는 “유리조각을 꼼꼼하게” 치우지만 파국으로 치달은 관계를 봉합하지는 못한다. 손보미는 관계의 파국과 삶의 균열을 위악적으로 서사화함으로써 무엇으로도 그것을 봉합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오차’의 세계를 살아가기 때문에 존재의 결여를 채울 수 없고 삶의 균열을 메울 수 없다고, 그렇기 때문에 주체로 하여금 말해지지 않은 서사의 빈 지점을 불안한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내 생각에…… 우린 끝장난 것 같아.”

“그래?”

“응.”

그들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를 다 끝낸 후 그녀는 그에게 커피 한 잔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커피에 맥주를 섞어 마셔도 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거실에서 커피를 마셨고, 그는 식탁에 앉아서 맥주와 커피를 섞어서 홀짝홀짝 마셨다.(81쪽)

 

「침묵」의 부부는 “끝장”났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줄 거라고 믿었다.”(67쪽) 그렇지만 부부싸움 도중에 갑작스레 나타난 세일즈맨의 말처럼 “아주 오랫동안, 누구도 모르게 진행”(76쪽)된 균열은 어느 순간 누구나 알 수 있게 도드라진다. 손보미는 세일즈맨의 입을 빌려 말한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한다”(78쪽)고. 균열을 내면화한 존재들은 그 틈을 메우려 하지 않는다. 균열은 이미 너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었으며 삶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더라도 주체는 일상을 고통스럽게 향유할 뿐이다. 「과학자의 사랑」의 고든 굴드처럼 말이다. 

 

 

* 이 글은 정소현과 손보미의 첫 소설집인 『실수하는 인간』(문학과지성사, 2012)과 『그들에게 린디합을』(문학동네, 2013)을 대상으로 한다.

 

글 ·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제4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동시대 한국인이 쓴 시와 소설 읽는 걸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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