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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바르샤바에 현현한 ‘체르노빌 예수’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바르샤바에 현현한 ‘체르노빌 예수’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1.10.1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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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영화리뷰) <첫눈이 사라졌다>

<첫눈이 사라졌다>는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한 영화이고, 모호한 듯 명료한 영화이다. <첫눈이 사라졌다>는 판타지 아트버스터라는 장르로 홍보된다. 이 영화의 특성을 잘 잡아낸 분류이긴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에서는 무엇보다 종교성을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특별히 기독교 색채를 강하게 띤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감독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의 개인 종교와는 당연히 무관하고 슈모프스카 감독 또한 기꺼이 종교성을 고민하였겠지만 직접적으로 종교영화를 지향하지는 않았다. 이 영화에서, 치유의 능력을 전면에 내세운 주인공 제니아(알렉 엇가프 분)가 누구를 상징하는지는 비교적 뚜렷하다. 슈모프스카 감독은 이 영화에서 바르샤바에 나타난 체르노빌 출신의 예수를 그린다. 바르샤바를 폴란드의 특정 지역이 아니라, 서구의 어느 곳 혹은 크게 현대 사회로 바꿔놓아도 괜찮다.

 

버려진 땅에서 온 이방인 치유자

 

판타지 장르로 소개되는 영화는 대뜸 묵시록의 분위기로 시작한다. 어두운 숲에서 제니아가 걸어 내려오고, 이어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통한 상승, 육교를 이용한 이편에서 저편으로의 이동을 보여준다. 처음 보여준 어두운 숲이 제니아의 출생지인 프리피야티임이 극중 초반에서 곧 확인된다.

외국인 취업이나 이주 문제를 관할하는 폴란드 관리가 프리피야티란 말에 체르노빌로 반응한 것에서 확인되듯, 프리피야티는 체르노빌과 등가이다. 벨라루스 접경지대인 우크라이나 북부 프리피야티 강 옆에 체르노빌 핵발전소와 아톰 그라드프리피야티가 구 소련 시기에 건설됐다. 소련이란 이름의 국가가 유효할 때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당연히 지금처럼 국가명이 아니었다.

소련 정부가 표방한 아톰 그라드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프리피야티는 체르노빌 핵발전소 종사자의 주거타운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1986426일 체르노빌에서 원자로가 폭발했을 때 그 사고는 체르노빌의 사고이자 프리피야티의 사고가 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된 뒤 재앙의 땅, 버려진 도시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세계 각지의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다. 관광상품 홍보는 체르노빌로 하겠지만 주요 관광지는 프리피야티이다. 물론 관광객들이 체르노빌 핵발전소를 훑어보기는 한다. 그곳은 전기의 공간이었고 사람의 공간은 프리피야티였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치유와 최면 능력, 추가로 모종의 초능력을 지닌 것으로 설정된 주인공 제니아가 프리피야티의 숲에서 내려와 거의 똑같은 모양의 집이 종횡으로 늘어선 폴란드 바르샤바의 부유층 주택단지에서 치유의 일을 하다가 어느 날 학예회 마술 행사에서 증발해버린다. 영화 <비바리움>을 연상시키는 로케이션은 실제 폴란드 주택단지를 활용한 것인데, 사실 그곳은 언어만 빼면 폴란드라 해도 좋고 서울이라고 해도 좋다. 역사성과 사회성은 영화에서 덜 부각된다. 판타지이자 우화이기에 그곳을 바르샤바 아닌 서울이나 예루살렘, 나아가 이스라엘로 불러도 무방하다. 그러나 영화 구성상 프리피야티를 다른 곳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리피야티에 대응할 단 하나의 지명은 나사렛이다.

예수가 천한 땅 나사렛에서 태어났듯이, 제니아는 버림받고 저주받은 땅 프리피야티 출생이다. 종교를 염두에 두든 그렇지 않든, 구원은 드물지 않게 저주에서 또는 저주의 그 자리에서 발견된다. 프리피야티에서 태어나 방사능 노출로 어머니를 잃고, 자신은 피폭에서 반대로 모종의 초능력을 부여받은 체르노빌의 예수는 극중 폐쇄형의 어느 부유한 마을에서 치유를 행한다. 사실 나사렛 예수가 생전에 일상적으로 행한 일은 치유였다. 치유를 위해 몸에 손을 대는 일은 기독교 전통에 속한다. 따지고 들면 의료행위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슈모프스카 감독이 연출 의도를 육체의 관계가 결국 영혼의 관계로 바뀌는 이야기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는데, 마사지사 겸 최면술사가 세상을 구하는 수퍼히어로가 되는 영화의 맥락과 동일하다. 공동감독이자 촬영감독인 마셀 엔그레르트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떤 거창한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 언급 또한 사회성을 괄호 친 치유와 구원의 문제를 영화가 천착했음을 시사한다.

 

 

현대화한 기이한 형태의 예수전은 그 모색을 관객에게 드러내지 않지만, 그렇다고 숨기지 않고 곳곳에 상식적인 연결점을 두루 배치한다. 제니아는 1986년 그 사고가 일어나기 7년 전 바로 그날에 출생했다. 제니아가 말 그대로 증발하는 기적을 행하기 바로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그의 어머니를 만나는데, 메모 형식의 초대장엔 33이 등장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숫자를 비의와 종종 연결짓기에, ‘7’‘33’이라는 숫자가 기독교를 염두에 두었음은 자명하다. 극중 제니아와 달리 실제로 1986년 사고가 일어난 그 해에 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태어난 엇가프가 영화에서 내내 십자가 목걸이를 차고 있다는 사실 또한 너무 평범한 상징이라고 할까. 치유자 제니아와 그의 어머니를 감싸 안은 마술적인 분위기는 서구에서 선호된 특별한 모자의 느낌과 닮았다.

 

Never Gonna Snow Again

 

한국어 영화제목 <첫눈이 사라졌다>는 영어 제목 Never Gonna Snow Again’과 폴란드어로 된 원제 Śniegu już nigdy nie będzie’와 뉘앙스가 다르다. 한국어 제목은 과거형인 반면 원제와 영어 제목은 미래시제이다. 그냥 눈과 첫눈의 차이도 눈에 띄지만, 첫눈이 없으면 어차피 눈 자체가 없는 것이니 본질적 의미의 차이는 아닌 셈이다.

눈에 관한 언급은 잊어버릴 만하면 나온다. 처음에 화장실에서 만난 용변 보는 아이가 제니아에게 대뜸 (앞으로) 눈이 안 올 것이라는 의견을 변기에 앉은 채로 말하고, 영화 중간쯤 행인이 같은 의견을 피력하고 이때 제니아는 소극적 반대 뜻을 표명한다. 막바지에 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죽은) 어머니와 만남에서 눈은 방사능 낙진과 겹쳐진다. 방사능 낙진은 재앙이지만, 눈은 축복이자 구원이다. 제니아는 재앙과 구원의 중첩 속에서 (세상을 구할) 수퍼히어로로 세상에 보내졌다고 설명된다. 어머니의 말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다. 낙진이 아닌 강설이라는 좋은 소식. 그러나 기적의 주인공은 사라진다.

첫눈이 사라졌다라는 진술에서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인간 누구에게나 도래한 임박한 재앙이다. 그러나 영화제목이 기후위기만을 지목한 것은 아니다. 폴란드어 원제의 ‘będzie’‘być’3인칭 단수 미래형으로, 영어로 치면 ‘be’ 동사에 해당한다. 영어 제목은 , 원제는 (눈의) ‘유무에 초점을 맞추었다. 둘 다 미래를 말하기에 한국어 제목과 결을 달리하고, 두 미래형 제목 안에서는 폴란드어로 된 원제가 ‘be’ 동사에서 갖는 힘을 발휘하여 현상 너머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이제 눈 내리는 일은 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진술이 기후위기를 지목했다고 하여 틀린 말은 아니지만, 눈처럼 내리는 방사능 재를 유발하는 일, 즉 체르노빌 폭발 같은 재앙이 없기를 바란다는 희망으로 말한다고 해도 맞는 얘기다. 메시지에 주목하면 절망 속에서도 어떻게든 붙들어야 하는 간절한 희망을 말했다. 원래 희망의 속성이라는 게 부재할수록 더 간절해짐이며, 본래 기독교는 지금과 달리 간절함에서 희망을 확인하는 종교였다.

이 영화가 일종의 예수전이라고 규정했는데, 암으로 투병하다 숨진 이의 아들이 제니아 앞에 말없이 앉아있다가 갑자기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른 뒤 아저씨가 누군인지 안다라고 말한 것은 그렇다면 기독교 용어로 일종의 증언이다. 그가 그임을. 크리스마스로 치달으며 제니아의 증발로 마무리짓는 전개는 성서적이다. 사실 기독교 복음서의 최초 기록은 부활이 아니라 빈 무덤으로 마무리된다. ‘빈 무덤에 조응하는 빈 상자’, 그리고 강설의 기적은 영화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제니아는 마사지와 최면치료를 하며 검은 시냇물이 발 밑에서 흐르다가 (마사지 받는 이의) 몸과 머리를 통해 제 손으로 전달된다고 말한다. 불행고통병에 시달리는 사람의 치유와 구원, 또는 불행고통병 그 자체로부터 치유와 구원이 기독교 용어로 대속 혹은 구세주의 희생을 통해 달성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속류 구원론은 아닌 게 암환자가 낫지 않고 죽는다. 그럼에도 그에겐 위로와 안식의 구원이 주어지는 것으로 그려지며, 공간적으로 그 장소는 프리피야티의 숲이다. 역설이 반복된다. 반복된 역설은 기적이며 기적이야말로 종교와 신앙이, 혹은 보편적 용어로 믿음이 뿌리내릴 수 있는 근거지가 된다.

 

사회풍자?

 

이 영화는 예민한 현실비판 의식을 담은 영화로도 해석될 수 있다. 파키스탄인과 우크라이나인 혐오와 프랑스 문화에서 느끼는 열등감을 동시에 표현해, 난민과 이주, 세계화에 관한 현대 사회의 (유럽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속물성과 말 그대로 천박한 자본주의 정신을 드러낸다. 앞서 언급한 기후위기와 핵공포에 관한 문제제기는 너무 확연하다. 무엇보다 모든 등장인물이 고통받고 불행하며 소외돼 있다.

주연배우 엇가프는 어느 매체 인터뷰에서 “(제니아를 연기하면서) 개인적으로는 미하일 불가코프의 책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주로 떠올렸다. 책에 볼란드라는 악마가 등장하는데, 그는 존재 자체로 악함을 나타낸다. 제니아가 바로 그런 인물로 그려지길 바랐다.”라고 말했다. 얼핏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영화 속 제니아란 캐릭터는 볼란드의 반대 성격에 가깝다. 감독이 제니아란 캐릭터를 전형적이고 상투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몽환적이고 기이하게 표현하다 보니 그런 오해가 가능할 법도 하다. 자기 생각과 달리 엇가프는 볼란드가 아닌 슈모프스카 감독의 상()으로 제니아를 그려냈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2015) 도입부에 얼떨떨한 조연을 연기한 엇가프가 다행스럽게 의미 있는 캐릭터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잘 소화해냈다는 점은 칭찬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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