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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오징어 게임’의 일남이 야웨와 ‘평행’한다면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오징어 게임’의 일남이 야웨와 ‘평행’한다면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1.11.01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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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에 들이댄 기독교 신학의 프리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세계 전역에서 영화 <기생충>을 능가하는 인기몰이를 하는 중이다. <오징어 게임>에 출연한 배우 정호연이 국내 여배우 중 가장 많은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를 기록하여 화제가 되는 등 국내외에서 작품과 맥락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글로벌 플랫폼을 통한 한국산 콘텐츠의 세계적 확산이란 새로운 가능성과 한계 또한 거론되고 있다.

<오징어 게임>은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기이한 서바이벌 게임과 이 게임에 참가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담은 9부작 드라마다. 황동혁 감독이 연출한 이 드라마가 폭발적 인기를 끈 이유는 여러모로 분석이 이루어졌기에 이 자리에선 기독교의 관점에서 작품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분’은 누구인가

<오징어 게임>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가 정호연만은 아니다. 오랜 연기 경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무명에 가까웠던 배우 오영수는 일남 역으로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극중의 유명한 대사 덕분에 깐부치킨 광고모델 섭외를 받아 화제가 됐고, 거절해서 더 화제가 됐다.

일남(一男)은 한국의 옛날식 이름을 대표한다. 장남이란 뜻과 가문의 승계자로서 가부장의 지위에 닿아있음이 이름 자체에서 드러난다. <오징어 게임>과 기독교를 평행이론에 넣으면, 일남이 누구를 상징하는지는 분명하다.

일남은 게임의 1번 선수이자 게임의 설계자이며 주관자이다. 기독교 신학이 정립돼 가던 시기에 영향을 미친 사유 중에 신플라톤주의가 있는데, 신플라톤주의에서 신과 동격으로 만물의 근원으로 쓴 개념이 일자(一者, hen)이다. 세계를 일자의 유출로 설명한 신플라톤주의의 일자가 <오징어 게임>의 일남과 평행을 형성한다고 하여도 평행이론을 적용하는 한 과한 얘기는 아니겠다.

이정재가 연기한 기훈은 456번으로 마지막 번호이다. 일남과 기훈은 오징어 게임에서 시작과 끝이다.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은 기독교에서 흔히 신성을 표현하는 어구였다. 일남이 일자와 연결된다면, 시작과 끝의 일남과 기훈은 전체로서 모종의 신성을 의미할까. 혹은 기독교 삼위일체에 등장하는 성부와 성자의 뉘앙스에 닿을까. 받아들이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이기에 정색할 이유는 없다는 전제하에 기훈에게서는, 설계자에 의해 만들어진 세트장에 던져진 선수의 모습이 전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변화는 ‘게임’ 이후에 일어나는데, 게임의 승자였지만 막판에 게임의 규칙을 거부하고 게임이 끝난 뒤에 상금을 받지 않음으로써 게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일남과 기훈이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의 노골적 시간을 보면 어쩌면 감독이 애초에 기독교를 염두에 두고 연출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는 ‘참 신이자 참 인간(vere Deus, vere Homo)’으로 그려지며, 십자가 사건 이전까지 예수는 스스로 인자(人子)임을 강조한다. 기독교에서도 ‘사건’ 이전과 이후의 의미는 다르다.

 

<오징어 게임>의 기훈을 기독교의 무엇에 평행시킬지는 각각에서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에 이 정도로 하고, 가장 높은 ‘평행’도를 기록한 일남 이야기를 더 해보자.

<오징어 게임>의 중반, 게임을 지속할지를 묻는 표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 1번 선수 일남은 게임의 ‘지속’이 아니라 ‘중단’에 표를 던진다. 게임의 설계자이자 선수로 누구보다 게임의 속행을 바란 일남의 예상밖 투표. 그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기독교에서 예민한 문제이자 여전히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은 ‘자유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일남이 ‘중단’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역설적으로 게임을 떠나게 된 선수들이 이제 처음에 참여할 때보다 더 분명하게 상황을 파악한 채 자유의지로 게임에 돌아온다. 어차피 그들은 다시 게임에 돌아오게 돼 있었다. 달라진 점은, 부당한 상황에 억지로 내몰리고 있다는 인식이 부당하지만 내 몸과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개척하겠다는 의지로 바뀐 것이라 하겠다. 물론 그렇다 하여도 시리즈 엔딩의 기훈 대사에서 드러나듯 ‘부당함’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성서의 창세기를 논하자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열매를 따먹은 행위에는 표면상으로 자유의지의 문제보다는 금지를 금지하기로 한 68혁명 식의 도전정신이 작동하는 듯하다. 극중 게임에 다시 자발적으로 참여한 기훈 등에게는 사실 자유의지보다는 불가피(不可避)성이 더 본질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게임 참여’→‘중단’→‘재참여’는 주최측 입장에서는 불완전판매를 완전판매로 변경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주최측은 그들이 어떻게든 다시 참여하리라는 사실을 안다. ‘중단’을 통해 상대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기보다는 주최측이 스스로 면책하는 행위를 행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어차피 기독교의 자유의지나 인간의 자유의지나 자유 혹은 의지가 각각 실재하는지, 두 개념을 합한 자유의지 또한 실재하는지 모호한 가운데 사실상 임의로 사용하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금지의 금지’나 ‘불가피성’이 자유의지의 유의어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함께하는 신, 자신을 낮추는 신

<오징어 게임>에서 기독교의 신을 떠올리게 하는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내용의 하나는 구조이고 또 하나는 행태이다. 일남은 설계자인데도 선수로 게임 안으로 내려앉았고, (위급상황엔 모종의 대비책이 있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극의 전개만으로는 다른 선수와 동일한 조건에서 게임을 수행한다.

기독교 교리 중에 ‘케노시스’라는 것이 있다. 스스로를 낮춤, 스스로를 비움이란 뜻의 헬라어로 하나님 자신인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인간세상에 내려온, 그 낮아짐을,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감내한 성육신(成肉身)을 지칭한다. 기독교 교리에 위대한 점이 있다면 대표적으로 신이 기꺼이 낮아져 인간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데서 찾아진다.

유대교 개념 중에 ‘침줌’은 ‘자기제한’ 정도의 의미로 쓰이며 ‘케노시스’와 비슷한 의미로 인용된다. 침줌의 신은, 스스로를 비우고 내어주고 움츠려 세계에, 인간에 공간을 제공한다. 그 신은 널리 선전되듯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움츠린 신이자 숨은 신으로 인간사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으나 인간사에 함께하고 고통에 같이 고통받으며 세계 및 인간과 동행하는 신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일남의 존재는 이처럼 ‘케노시스’와 침줌‘의 신을 상기시킨다. ‘케노시스’와 침줌‘의 신은 딱 잘라 말하긴 힘들지만 신약적이고 근대적인 신인식에 가깝다. 반면 일남과 기훈이 벌이는 구슬내기는 구약적 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세상에 종종 등장하여 사람과 씨름하고 다투며 구해주기까지 하는 ’인간적인‘ 신의 행태. 특히 치매인 듯 아닌 듯 기훈에게 일부러 져주는 일남의 모습에서 신성의 흔적 비스름한 걸 느꼈다면 신성모독이 되려나.

 

기독교 혐오, 여성 혐오라는 주장에 대해

​​​​​​​<오징어 게임>의 인상적인 배역의 하나인 지영(이유미 분)은 게임에는 참여하지만 게임을 끝까지 뚫고나갈 의욕을 원천적으로 상실한 인물로 그려지고 실제로 중도 탈락한다.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 일로 아버지를 죽이고 감옥까지 갔다 온 지영의 캐릭터 자체에서 기독교 혐오를 읽어내는 탈레반 같은 기독교 옹호자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신과 달리 종교는 전적으로 사회적 현상이다. 개신교 목사 중에는 좋은 목사가 많지만 극중 지영의 아버지 같은 목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목사의 일탈을 묘사하고 캐릭터 설정에 사용했다고 그것을 기독교 혐오라고 한다면 논리의 비약이다. 기독교는 목사의 종교가 아니며, 신을 목사가 대변하지 않을뿐더러 더더군다나 일탈한 목사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혐오스런 어떤 기독교 목사를 극중 캐릭터 설정에 사실적으로 활용했다는 이유로 그 드라마를 기독교 혐오라고 몰아붙인다면 그 행위야말로 기독교 혐오이다.

마찬가지로 한미녀(김주령 분)의 캐릭터를 근거로 여성혐오적 작품이라고 한다면 대중예술의 표현한계와 리얼리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세상이 여성혐오로 만연한 형편에서 세상을 소재로 한 대중예술을 만들면서 그것만을 피하라고 요청한다는 게 너무 답답해 보인다.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이다. 재미 있어도, 메시지가 훌륭해도, 감성을 후벼파도, 각각이 그저 드라마일 뿐이다. 물론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다. 그 선은 결국 시대가 긋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다.

 

 

글·안치용
​​​​​​​영화평론가 겸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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