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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원작과 각색의 위험한 관계: <위험한 관계> 허진호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원작과 각색의 위험한 관계: <위험한 관계> 허진호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1.11.0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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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과 “위험한 관계”의 각색들

 

 

한국 허진호 감독이 연출하고, 한국과 중국의 톱스타 장동건과 장쯔이, 장바이즈가 출연한 한국, 중국, 싱가포르의 합작영화 <위험한 관계>(2012)는 18세기 프랑스 작가 라클로(Pierre Choderlos de Laclos)가 쓴 서간체소설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 1782)를 원작으로 한 각색영화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글로벌화 시대의 초국가적 혼종 문화 현상인 한류가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서구문화와의 문화접변 과정과 혼종화에 끼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는 당대 상류 귀족 사회의 엘리트들인 “리베르텡”(libertin)들의 “리베르티나주”(libertinage)를, 간단히 말해, 체제가 부과한 기존의 도덕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지적 동향과 그들의 자유분방한 성풍속도를 다룬 리베르탱 소설 (roman libertin)이다. 라클로는 당대 대표적인 리베르탱 소설 작가인 사드 후작(Donatien Alphonse François, marquis de Sade)과 더불어 자신이 속한 상류계급 사회의 치부를 드러낸 내부의 배반자 또는 수치의 작가로 낙인이 찍혔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스캔들 소설”로 오랜 세월 평탄치 못한 수용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갑자기 1980년대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마침내 위대한 프랑스 고전문학으로 재탄생하는 운명의 반전을 겪게 되었다. 이렇게 원작을 명작으로 등극하게 만든 여러 요인 중, 프리어스(Stephen Frears)의 <위험한 관계>(Dangerous Liasions, 1988)와 포만(Miloš Forman)의 <발몽>(Valmont, 1989)과 같은 헐리웃 각색영화의 성공이 주요 동인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후로 지속적인 각색과 리메이크로 프랑스 문학 중 가장 많이 각색되는 정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1세기 글로벌화 시대의 혼종 문화의 산물 허진호의 <위험한 관계> 또한 이에 앞서 제작된 이재용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2003)와 더불어 이러한 일련의 각색들에 포함되는 한류 각색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원작의 정전화와 그 전통을 지속적으로 보존 확대시키는데 일조하는 보수적인 장르의 각색영화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공간인 동아시아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맥락에서 원작과 기존 각색에 대한 ‘다시-보기’(re-vision)를 시도함으로써 이 영화는 각색 본연의 의도, 즉 기존 텍스트가 기초하는 전통과 그 통제력에 대한 도전을 위한 비판적 개입을 실천한 각색영화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원작과 더불어 일련의 기존 각색영화들과의 상호텍스트적 관계 속에서 모방과 차이를 비교 분석하는 접근 방식이 적절할 것이다.

 

“밝혀지지 않은 스캔들”

스캔들의 소설로 낙인이 찍혔지만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는 두 남녀 리베르탱, 발몽 자작(Vicomte de Valmont)과 메르테이유 후작 부인(the Marquise de Merteuil)의 대결의 결과로 당대 사회 체계의 기초가 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기준에 따라 발몽을 “리베르티나주의 위대한 완성”을 이룬 승자로 손을 들어 준다. 그러나 그는 메르테이유를 발몽보다 단연코 우위의 의지와 지적 능력을 갖춘 리베르탱으로 창조하는 위험한 선택을 했다. 하이드처럼 피조물 메르테이유가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나게 된 스캔들을 은폐하기 위해 작가는 그녀를 흉한 마녀로 만들어 해외로 추방해버리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와 같이 그는 메르테이유를 본 텍스트에서는 추방했지만, 그녀에 대한 후속 이야기가 발간될 가능성을 편집자의 주석으로 언급함으로써 주변 텍스트에 그의 여성 주체성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밝히지 않은 스캔들에 대한 언급을 남겨두면서 소설의 결말을 맺고 있다. 후일 1980년대 프리어스와 포만의 각색영화가 전경화시킨 것이 바로 원작에서 억압을 강요당했던 메르테이유의 존재로 그녀의 경쟁 우위를 부각시켜 은폐되었던 스캔들을 드러낸다. 이러한 다시-보기로 이 영화들은 두 리베르탱의 대결을 통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기준으로 한 서구 근대 주체성을 탐구한 원전이 억압한 여성 주체성을 가시화함으로써 잊혔던 원작의 재탄생에 유력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헐리웃 각색영화들 또한 밝히지 않은 스캔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메르테이유의 주도적 게임 참가와 노력으로 체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지식인을 지칭하는 “리베르티누스”(libertinus, 해방된 노예라는 뜻의 라틴어)을 어원으로 한 리베르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화려한 사교계의 스펙터클은 경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잔인한 게임이 일어나는 그 이면의 세계를 은폐하고 있다.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를 당한다는 법칙이 작동하는 그래서 결국은 소진되어 해체될 수밖에 없는 자연주의적 타락의 세계에서 탈주는 일단 그 게임에 참가하는 한 불가능하다는 스캔들은 밝히고 있지 않다. 들뢰즈(Gilles Deleuze)에 의하면, 여자들은 게임을 하는 자가 아니다. 그 게임에서 희생을 당하는 투르벨 부인(Madame de Tourvel)과 같은 “희생자(victim)”가 아니면 그 게임을 잘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교계의 여왕과 같은 “이용자(user)”가 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역할에 저항하여 참가자로서 메르테이유가 게임에 참가한 것은 그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1980년대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파괴적인 선택 또는 거기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녀의 목적은 그 잔혹한 세계로부터의 탈주가 아니다. 따라서 게임의 승자로 그녀가 맞는 결말은 발몽을 죽음으로 몰고 간 팜므 파탈로 낙인이 찍힌 채, 파리의 사교계에 “갇힌 여자”로 남는 것이다. 프리어스의 메르테이유가 엔딩에서 휘청거리고 눈물을 보이는 모습은 악의 화신으로 전락한 것에 대한 그녀의 회한과 반성으로 흔히 해석되지만, 실은 그 세계로부터 탈주할 수 없는 절망감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스캔들을 담지한 모습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이다.

 

사실 라클로도 그리고 헐리웃 각색영화들도 서구의 근대성, 근대적 주체성을 특징짓는 중요한 정신, 리베르티나주의 관점에서 서구 근대성 탐구와 귀족사회가 도달하게 될 엔트로피와 몰락의 분석에만 집중하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탈주와 구원의 가능성 추구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바로 서구 근대성 논의의 한계이며, 원작과 서구 각색영화가 공히 억압하고 있는 가장 큰 스캔들이 바로 이것이다. 한류 각색영화 <위험한 관계>가 각색을 통해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서구 근대성 논의의 한계이다. 동서양의 이질적인 문화의 접촉과 변용을 통한 기존 서구 텍스트의 다시-보기로서 이 영화는 서구 텍스트에 내재한 이러한 한계를 가시화할 뿐 아니라, 셰이판(발몽, 장동건)도 아니고, 모지에위(메르테이유, 장바이즈)도 아닌, 희생자 투르벨 부인을 각색한 뚜펀위(장쯔이)를 리베르티나주의 완성과 진정한 해방, 즉 탈주를 시도하는 인물로 등장시키는 놀라운 역전을 만들어냈다.

 

“동양의 파리” 상하이: 헤테로토피아적/제3의 혼종 공간

 

이 영화는 원작의 무대, 18세기의 파리, 전 유럽의 지성뿐 아니라 향락의 수도로 부상해서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영광을 누렸던 파리를 1930년대 “동양의 파리”로, 부와 세련됨을 겸비한 당대 부자와 명사들의 메카로 알려진 상하이로 옮겨 놓았다. 사실 1930년대 상하이는 서구 제국주의적 국가들의 문화권과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거대한 고치와 같은 상하이시로 구성되어 도시 자체가 이미 혼종성의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이 영화가 구축한 스펙터클 또한 시공간 응축의 현상을 보여주는 21세기 글로벌화 시대 영화답게, 세트와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으로, 1930년대 상하이를 공간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는 전근대, 근대, 포스트모던의 가치가 공존하는 시간적, 공간적 혼종성의 대도시의 스펙터클로 구축하고 있다.

이 영화는 라클로의 원작소설보다 프리어스와 포먼 영화의 혼성모방(pastiche)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스펙터클과 특정 시퀀스들 뿐 아니라 두 헐리웃 감독들의 스타일까지 모방하고 있다. 이러한 혼성모방은 헐리웃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표함으로써 헐리웃 영화 시스템 속에 편입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오마주와 함께 차이들을 부각시켜, 바바(Homi Bhabha)가 말하는 차이들 사이의 교섭에 의한 문화 번역이 일어나는 혼종성 공간을 만들기 위한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으로 이 영화가 창출한 제3의, 사이의(in-between), “혼종”(hybrid) 공간은 제국주의적·지배적 담론에 대한 균열과 저항이 일어날 수 있는 문화의 장을 이룬다.

 

 

이 영화의 1930년대 상하이 상류사회의 스펙터클은 프리어스와 포먼 영화의 화려한 귀족사회의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영화 특유의 고도로 양식화된 스펙터클을 모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스펙터클은 헐리웃 영화의 스펙터클이 배제한, 그러나 바로 근접한 현실 세계의 공간, 예컨대, 난민들, 집단 시위대, 그리고 상류사회의 스펙터클 속으로 잠입한 운동권 학생, 그를 잡으러 들어온 일본군 등, 당대의 역사와 사건 장면들을 함께 담고 있다. 즉 헐리웃 영화가 특정한 단일 시점에서 자족적인 귀족적 영역, 역사로부터 단절된 인공적 영역의 스펙터클을 구축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혼종화를 통해 다층적이고 이질적인 목소리들을 포함시켜 기존 서구 텍스트에 내재된 그러나 억압된 다성성을 구현할 수 있는 스펙터클로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리베르탱들의 마스크레이드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사교계 무대 위의 마스크레이드(masquerade)를 위해 준비하는 남녀 리베르탱, 발몽과 메르테이유의 아침으로 시작하는 프리어스 영화를 모방하고 있다. 프리어스 영화의 첫 시퀀스는 교차편집을 통해 메르테이유과 발몽의 화장, 머리손질, 옷치장의 긴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이 영화는 다면경 앞에 서서 하녀들의 도움으로 치장을 하는 셰이판(발몽, 장동건)의 분장 장면과 성공한 여성 사업가 인터뷰와 잡지 표지 촬영을 위한 모지웨이(메르테이유, 장바이즈)의 분장을 별도의 시퀀스로 처리한다. 이러한 오프닝의 차이는 두 리베르탱들의 대결에 중점을 두는 원작과 헐리웃 영화에 대한 오마쥬와 더불어 다른 관점에서 이 주제를 또는 다른 주제를 다루겠다는 것을 처음부터 시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차편집으로 첫 시퀀스부터 보여주는 프리어스의 발몽과 메르테이유의 대결은 그들이 마스크레이드를 게임의 전략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목적으로 그 전략을 사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발몽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갖춘 위대한 유혹자로서의 평판과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것이라면, 반면에 메르테이유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기초한 그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선택한 것이다. 중국의 화화공자(花花公子)와 서양의 카사노바를 혼합한 ‘나쁜 남자’ 셰이판은 프리어스의 지적인 리베르탱 발몽 보다는 쾌락적 리베르티나주를 추구하는 포먼의 발몽과 더 유사한 인물로, 그 역시 다른 발몽처럼 마스크레이드를 게임의 전략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상하이 최고의 플레이보이 셰이판은 한류 선풍을 일으킨 K-드라마가 만들어낸 부드럽고 착한 순정남 이미지의 한국 남성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순정남 셰이판은 서구 근대 남성성, 즉 헤게모니적 남성성과는 다른 남성성을 재현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게임에서 사용하는 마스크레이드 전략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즉 여자와 소수자에 대한 권력 행사를 위한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의 전략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강화가 아니라 남성적 권리 행사를 위해 희생자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여자의 구원과 탈주를 위해 여성의 역할로 간주된 “사라지는 중재자”의 역할을 스스로 선택하는, 즉 종속적인 여성적 역할을 수용하는 새로운 혼종의 남성성을 구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1930년대 상하이 사교계에서 돈과 권력을 모두 가진 선망의 대상인 신여성 모지에위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셰이판과는 달리, 첫 등장부터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성공한 여성 사업가로 유명 잡지 표지 촬영과 인터뷰를 위해 화장을 하며 잠시 거울을 보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거울 속 그녀의 이미지를 포착하지 않는다. 그녀는 화려하게 차려입고 카메라 앞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으며 인터뷰에 응하지만, 신문에 난 애인 진사장의 어린 여학생과의 약혼 기사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숨기느라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영화의 시작부터 화려한 상하이 사교계의 여왕 모지에위에게서 서구자본주의와 근대화의 위력 하에서 돈에 대한 광적인 추구에 혈안이 된 상하이 상류층 남자들의 냉혹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위험한 게임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는 불안한 여전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녀 역시 메르테이유처럼 게임에 참가함으로써 그 세계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영화의 엔딩 부분에서 셰이판이 죽은 후 배달된 그의 선물 흰색 드레스를 입고 그녀가 침대에서 오열하는 장면은 흔들리는 거울과 천장의 다면경에 비치는 흔들리고 파편화된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거울은 이 영화에서 화려한 상류사회의 서구식 저택의 일부로 그 스펙터클을 구성하는 주요 장식물로 사용되어, 예컨대 첫 시퀀스에서 다면경 앞에 선 셰이판처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나르시시즘적 탐닉을 만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모지에위를 흔들리고 파편화된 이미지로 비추어 주는 거울과 천장의 다면경은 그것들이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스펙터클 이면에 내재한 자연주의적 세계의 충동과 폭력의 이미지를 방출하여 그 속에 갇힌 모지에위의 불안과 공포를 투사해준다. 따라서 거울이 비춰주는 그녀의 흔들리고 오열하는 모습은 셰이판에 대한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순정녀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아니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리 천장처럼 그녀에게 주어진 한계 또는 그녀를 가두고 있는 냉혹한 경쟁의 세계로부터 탈주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좌절의 몸부림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이다.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프리어스 영화의 엔딩에서 메르테이유의 휘청거리는 모습이 담지한 스캔들을 적나라하게 가시화한다.

 

헤게모니적/하이브리드 남성성

셰이판 역시 다른 발몽들처럼 리베르탱으로서의 우월감과 자기통제에 대한 자신감에 차서 모지웨이와 게임을 시작한다. 발몽이 메르테이유에게 선전 포고를 하게 되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대한 위협을 그녀로부터 감지했기 때문이며, 여기서부터 그들의 게임은 파국을 치닫게 된다. 그러나 셰이판의 몰락이 시작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장면, 셰이판이 뚜펀위를 버리고 모지에위를 찾아와 그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모지에위의 뺨을 때리는 장면에서이다. 그녀의 눈빛에서 그가 주장하는 남성적 권리가 바로 강간과 폭력의 남성적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그는 나쁜 남자에서 순정남으로,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의 진전이 급속하게 가속화된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기준으로 원작의 발몽보다 프리어스와 포만의 발몽이 남성성이 약화되어 낭만적 주인공으로, 그리고 한류 각색영화에서는 더 약화되어 순정남으로 격하된다고 볼 수 있다. 셰이판의 순정남으로의 전락은 근대 남성성인 헤게모니적 남성성과는 다른 비전통적 남성성,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하이브리드 남성성” 수행으로 설명될 수 있다. 뚜펀위를 희생자로 한 모지에위와 게임 진행 과정에서 그는 남성적 권리 행사를 위해 희생자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여자의 구원과 탈주를 위해 여성에게 요구되는 “사라지는 중재자”의 역할을 스스로 선택하는, 즉 종속적인 여성적 역할을 수용하는 하이브리드 남성성을 구현하게 된다. 물론 하이브리드 남성성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재확립하거나 강화시키는 전략이 될 수 있는 여지도 다분하다. 그러나 셰이판의 하이브리드 남성성 생성 과정은 뚜펀위의 여성 주체로서의 자아실현과 주체성 추구 과정과 상호작용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런 전략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셰이판을 통해 구현된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서구 근대 남성성과는 다른 구성 방식으로,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이상과 맞지 않는 요소들을 부정과 배제가 아니라 혼종적 포섭과 협상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된 남성성인 것이다.

 

뚜펀위의 탈주: 동아시아 근대 여성의 주체성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서세동점의 산물로 주어진 것이고, 그 과정 또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오리엔탈리즘적인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설명된다. 동아시아 근대성 또한 문화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서구 근대성을 기준으로 파악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적 근대성이 보편성이 아니라 특이성, 그리고 이제 소진의 이슈로 논의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근대화와 근대성 논의 또한 새로운 사유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영화는 서구 근대성을 탐구하는 원전과 서구 근대 여성 주체성 논의로 다시-보기를 한 두 서구 각색영화들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헤테로토피아적이면서도 현실의 혼종 공간을 창출하여 새로운 사유방식으로 동아시아 근대 주체성 탐구를 시도한 한류 각색영화로 그 성과가 평가될 수 있다.

상하이 플레이보이 셰이판의 유혹은 만주사변을 피해 동북성에서 온 정숙한 과부 뚜펀위를 희생자로 만드는 대신 과부로서의 삶을 벗어나, 사이와 혼종의 공간을 상징하는 난민촌에서 자신의 유교적 신념을 본격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오히려 제공한다. 셰이판과의 일탈적 사랑은 그녀의 과거를 상징하는 남편의 유산을 포기하고 화려한 상류사회 저택을 벗어나 서민 아파트로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자유와 새로운 삶으로의 탈주를 추구할 수 있는 결단의 용기와 희망을 준다. 따라서 뚜펀위의 자아실현과 주체성 추구 과정은 셰이판의 하이브리드 남성성 구현과 상호작용 속에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셰이판은 모지웨이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이 속한 상류사회의 심연에 작동하고 있는 폭력과 충동이 자신을 몰락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죽음이 그의 유일한 출구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뚜펀위를 희생자로 만드는 대신 그녀의 구원과 탈주를 도와주고 사라지는 촉매와 중개자라는 여성적 역할을 스스로 맡는 순정남으로서의 하이브리드 남성성을 구현하게 만든 것이다.

 

 

뚜펀위가 그녀를 희생자로 만드는 세계로부터 탈주의 선을 찾은 것은 또한 다름 아닌 유교적 전통의 실천을 통해서이다. 전통을 따른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과 그 외 다른 전통을 배제하고 부정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 전통을 구성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그것으로부터 배제되는 또는 특히 그것의 주변부에 할당되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역량을 실천하는 것이다. 뚜펀위의 유교 전통 실천은 바로 이러한 역량을 실천하는 것이고,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 정하는 경계선을 넘는 일탈과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난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희망에 찬 뚜펀위의 모습으로 끝나는 엔딩 장면에서 그녀는 아이들에게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미래를 이야기한다. 서구자본이 유입되어 건설한 철도를 따라 중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주역인 기차를 타고 가족과 공동체의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미래에 대한 뚜펀위의 비전은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아니다. 그곳은 비서구 국가 중 처음으로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이 침략하여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로, 그곳으로의 탈주는 식민과 탈식민의 교섭이 일어나는 사이의 공간, 혼종의 공간,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는 공간을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엔딩 장면에서 뚜펀위가 떠올리는 세이판이 그려준 교과서 삽화 속 기차가 하늘로 내뿜는 하얀 연기는 그녀가 추구하는 새로운 열림의 미래로의 탈주의 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뚜펀위는, 서구 근대 주체성이 전제로 하는 여성의 역할, 즉 남성의 주체성 추구와 탈주를 도와주고 사라지는 촉매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그녀를 희생자로 만드는 억압적 체제로부터 자유와 정신의 해방을 추구하는 진정한 리베르티나주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동아시아 근대 주체성을 구현하고 있는 주체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동아시아 근대 여성 주체로서의 뚜펀위의 자아실현 과정을 통해 여성 주체성을 억압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기초한 서구 근대성에 차이를 기입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방식으로 동아시아 근대 주체성 탐구를 시도한 혼종 문화의 산물 한류 각색영화의 선구적인 대표 사례로 선정될 수 있다.

 

 

출처: 『세계문학비교연구』(72호, 2020)에 실린 “<위험한 관계>의 각색과 한국각색영화의 문화 혼종성”(81-112)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수정하여 다시 쓰기를 한 글이다.

 

사진 출처 : ‘위험한 관계’, 《구글》, 2021.11.5.
https://www.google.co.kr/search?q=%EC%9C%84%ED%97%98%ED%95%9C+%EA%B4%80%EA%B3%84&sxsrf=AOaemvKOnX8gi2BYDK327lLcSks9o95u1g:1634991504863&source=lnms&tbm=isch&sa=X&ved=2ahUKEwiHpO7-weDzAhU5xYsBHcQdC44Q_AUoAXoECAEQAw&biw=1920&bih=880&dpr=1

 

 

저자·정문영
영화각색연구자,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각색과 전유 및 상호매체성과 문화 혼종성의 관점에서 각색영화, 특히 서구 텍스트를 각색한 한국각색영화 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독서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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