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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의 문화톡톡] 나의 이해할 수 없는, 친구
[이주라의 문화톡톡] 나의 이해할 수 없는, 친구
  •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21.11.0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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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유담은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핀 캐리(pin carry)」라는 작품으로 등단한 이후, 2020년에는 첫 단편소설집인 『탬버린』(창비, 2020)으로 2020년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21년에는 1월에 경장편 『이완의 자세』(창비, 2021)를 출간하였고, 10월에 단편소설 「안(安)」으로 제1회 김유정작가상을 수상하였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최근 한국문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주목받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김유담의 첫 번째 소설집인 『탬버린』은 김유담 소설 세계의 문제의식이 어디에서 설정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김유담은 생존 경쟁과 능력주의 위계질서가 심화된 현실 사회 속에서 주변부에 머무르는 이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이 주변부의 삶은 서울이 아닌 지방, 서울의 지리적 상징체계 내에서의 변두리와 같은 장소에서의 체험으로 구체화된다. 이렇게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공간적 위계질서로 그려진다는 것이 김유담 소설의 특징이다.

김유담 소설의 인물들은 대개 지방 소도시 출신으로 대학 진학을 통해 서울로 탈출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지방에서의 삶은 도태와 모욕 그리고 절망을 의미하였고, 서울로의 탈출은 새로운 삶의 활력과 희망을 상징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서울 생활 속에서 자신이 서울이라는 장소가 가진 상징체계에 걸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서울의 장소성은 전형적이고 속물적인 성공의 대명사이다. 그런 서울 속에서도 강남, 타워팰리스, 대치동 학원 등의 장소를 체험하고 체화해야만 바로 이 사회가 바라는 성공에 부합하는 서울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가져도 되는」) 그러나 김유담 소설의 인물들은 서울의 장소성에 쉽게 편입되지 못한다. 그들은 서울의 삶이 힘겨워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거나(「공설운동장」), 아픔의 감각을 잃어버리거나(「우리가 이웃하던 시간이 지나고」), 서울의 삶에 편입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가져도 되는」).

이런 인물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이들의 노력 자체가 이미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버렸다는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 최대한 버티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놀 때조차도 최선을 다하라는 팀장의 말, 100점을 맞기 위해 끝까지 노래 부르라는 대표님의 명령 같은 권유를 성실하게 수행한다.(「탬버린」) 나를 둘러싼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회의 명령이 이들에게 내재화 되어 있다.

 

 

탬버린 표지 Ⓒ창비
탬버린 표지 Ⓒ창비

 

2.

김유담 소설집의 표제작인 「탬버린」 또한 생존경쟁 사회 속에서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탬버린」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진행된다. 서술자의 현재를 보여주는 이야기와 과거의 추억, 이렇게 두 가지이다. 서술자의 현재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치열한 경쟁 사회 속 생존과 노력의 문제 그리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을 다루고 있다. 사실 이런 모티프는 최근 한국 문화 창작물들이 대부분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코드라 할 것이다. 그러나 김유담 소설이 이러한 평범한 서사에서 벗어나는 지점은 바로 초점화자가 회상하는 과거의 추억에서 비롯된다.

회사 회식에서 노래방에 가면서 떠오른 서술자의 과거 추억은, 고등학교 때 ‘송’이라는 친구와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던 순간이다. ‘나’는 잠시 머무르던 시골 학교에서 ‘송’이라는 친구를 만났고, 둘은 노래방 단짝이 되어 한 학기 정도의 시간을 신나게 보냈다. 나의 회상에 따르면 ‘송’은 팔딱이는 물고기처럼 탬버린을 신명나게 연주하는 아이였다. ‘송’의 탬버린은 ‘나’의 ‘몸속 깊은 곳 감정 덩어리’를 끌어올려 주었다. 그것을 굳이 따져 보자면, 일단 ‘흥’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송’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어떤 ‘한’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것이 ‘흥’이든, ‘한’이든, 나에게 ‘송’의 탬버린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인생이 재미없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재미없었다는 것”을 알려준, 즉 ‘나’의 삶에 힘을 불어 넣어 준 추억이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생명력 넘치던 과거와 성과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이미 탈진해 버린 현재를 단순히 비교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 소설의 핵심은 서술자의 피로한 일상이 아니라, 서술자가 떠올리는 ‘송’이라는 인물의 알 수 없는 내면이다. 이 소설은 오히려 ‘송’에 대한 ‘나’의 진정한 이해가 가능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핵심으로 내세우고 있다.

한때 ‘송’과 ‘나’는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치며 신나게 놀았지만, 대학입시를 치르고 사회에 진출하면서 연락이 뜸해 졌다. 나는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지만, 재력이 있고 극성스러운 엄마 덕에 대학에 진출하고 어찌저찌 취직을 하면서 보통의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아간다. 심지어는 여고 시절 1등을 도맡아 하며 서울대를 간 반장은 아직도 임용고사 준비로 소위 정상적 사회인이 못 되었는데, ‘나’는 그 앞에 어엿한 사회인의 모습으로 서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다. 이 사회의 기준에서 ‘나’는 대단한 학벌도 능력도 가지지 못한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나마 내가 무기력과 권태에서 빠져 나와 무언가를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힘은 ‘송’과의 노래방 추억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송’과 연락을 이어나가려 한다.

하지만 ‘나’는 ‘송’을 이해할 수 없다. ‘나’의 삶이 약간의 성취를 통해 앞으로 나갈수록 ‘나’는 ‘송’의 삶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송’과 통화를 하면, ‘송’은 언제나 돈을 모아서 대학을 가겠다고 했다가, 장사를 하겠다고 하기도 하고, 네일아트를 배우겠다고 했다가, 미용학원에 등록할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송’은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계속 말을 바꾼다. ‘나’는 “매번 말이 바뀌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심 불편”해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사회의 상식으로 보면 ‘송’의 태도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항상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성실하고 꾸준하게 노력해 가는 삶의 일대기를 완성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와 취업을 거치면서 익숙해지는 자기소개서의 서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의 전공과 하나의 전문적 일자리를 위해 노력해 왔는가를 서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 했다가 쉽게 포기하고, 저거 했다가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선명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삶의 일대기를 완성할 수 없다. 그래서 ‘송’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더 나아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도 ‘나’는 ‘송’의 속사정을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는 친구였다. ‘송’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불판닦기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친구이니, 가정 사정이나 경제 사정이 그렇게 좋지 않았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송’은 불판닦기 아르바이트의 신체적 고통을 탬버린 치기를 통해 승화시킬 정도로 생명력이 넘쳤고, 미술을 하고 싶다는 꿈도 있었으며, 심지어 그림 그리기에 재능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상식적인 경로를 거쳐 꿈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열악한 환경에서도 이것도 해 보고 싶고, 저것도 해 보고 싶다던 ‘송’의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가지고 살아보고자 했던 ‘송’의 가장 소박한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회의 상식적 판단에 익숙한 ‘나’는 ‘송’의 말을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물론 ‘나’는 처음에 ‘송’의 말을 들으며 응원도 해 주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하고 싶은 일을 말하면, 누군가는 옆에서 ‘그래, 너는 할 수 있어’ 라며 응원해 주는 관계는, 얼마나 흔하고 상식적이며 표피적인가. 우리 사회는 ‘무언가를 할 수 없음’에 대해서는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항상 ‘무언가를 하려고 함’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훈련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목표했던 바를 이루었는지, 혹시 실패했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과 교훈을 얻었는지, 그래서 더 나은 성장을 위해 지금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본다. 목표 설정과 노력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성장의 서사만이 발화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무언가를 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내가 지쳤다’ 라고 말해야 한다. 성장을 요구하는 사회적 주류 서사에 저항하는 대안 서사는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거부,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여기서 뭘 더 보여달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무력함, “조금도 신이 나지 않았고 점점 기운이 빠졌다”는 권태를 말해야 한다. 「탬버린」의 표면에 발화되는 서사는 바로 이런 ‘할 수 없음’에 대한 서사이다. 현재 서술자의 삶은 사회의 정상 궤도로 편입하였으나, 특별한 성공을 거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닌, 더 이상 할 수 없음의 상태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삶이다.

 

 

3.

김유담의 「탬버린」은 이 ‘무언가를 할 수 없음’의 서사 밑에 깔려 있는, 더 비참한 삶의 서사를 하나 더 끄집어낸다. 그것은 아예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송’의 서사이다. ‘송’은 생존 경쟁 사회에서 지쳐서 낙오되었다는 인물들을 재현하는 방식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지점을 그려내고 있다. ‘송’의 삶은 사회에서 요구되는 성장의 일대기를 실현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받지 못한 상태였고, 그래서 경쟁 시스템에서 낙오된 채 일회적인 일자리를 전전하며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송’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도, 경쟁 시스템에 적응해서 살아나가고 있는 친구인 ‘나’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경쟁 시스템에 적응한 ‘나’의 시선에서 ‘송’의 발화는 두서없는 횡설수설이다.

‘송’은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다. 그런데 그 외면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정한 사회 시스템, 모든 것을 가진 기득권, 시스템에서 승리한 자들, 혹은 승리를 위해 혈안이 된 냉혈한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송’의 소외는 가장 평범하다고, 그래서 자신은 별 볼 일 없다고, 나도 지쳤다고 말하는, 이 사회의 대다수의 일반인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의도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이 시스템 속에서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나’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이지만 ‘나’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나’는 ‘나’에게 편하게 주어진 것들을 남들의 성공에 비해 대단치 않다고 받아들이면서, 그리고 이렇게 개인의 노력을 착취하는 사회가 가혹하다고 여기면서 불평하지만, 어느 순간 사회의 성공 지상주의 및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재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 이데롤로기가 요구하는 문법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송’과 같은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고 쉽게 재단한다. 어쩌면, 저러니 성공을 못하는 것이라고 잔인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나’는 ‘송’과의 과거를 ‘아름다운 추억’이라 낭만적으로 회상한다.

과연 ‘송’은 내가 보낸 카톡에 답장을 보낼까? 「탬버린」은 현재의 ‘나’가 ‘송’에게 다시 연락을 시도하는 순간에서 끝을 맺는다. ‘송’은 ‘나’의 메시지를 읽었다. 하지만 아직 답은 보내지 않는다. ‘나’에게는 ‘송’과의 과거가 그래도 뭐라도 해보려고 하는 삶의 에너지를 충전시켜준 순간이었다. 그때 무기력에 빠져 있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이 삶의 태도에 대한 변화였을 뿐이다. ‘나’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끌어줄 가정과 경제력이 있었다. 그러나 삶의 에너지가 충만했던 ‘송’에게는 경제력이 없었다. 삶의 에너지만으로는 고단한 현실을 원하는 대로 살아나갈 수 없었던 ‘송’에게, 탬버린을 추던 과거의 추억은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송’에게 탬버린은 터키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며 춤을 추는 것처럼 고단한 과거의 한 페이지였을 수 있다.

「탬버린」은 바로 평범한 우리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생존 경쟁 사회에서 성취한 것이 전혀 없다고 여기는 우리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며 힘들어 한다. 이러한 힘든 우리의 분노는 시스템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리의 우울은 어쩔 수 없는 우리 처지에 대한 공감과 위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우리의 노력이 실제로는 저항과 성장 혹은 실패와 위로라는 어떤 목적지향적인 서사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탬버린」은 보여준다. 삶에 목표조차 제대로 세울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주어진 논리에 맞춰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숨어 있지 않다. 우리의 이해할 수 없는 친구로 바로 옆에서 항상 살아가고 있다. 「탬버린」은, 이 횡설수설하고 오락가락하여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을 우리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소외시키고 있는지 그 잔인함을 그려내고 있다.

 

 

글 · 이주라(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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