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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글로벌화의 하녀: <미씽: 사라진 여자> 이언희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글로벌화의 하녀: <미씽: 사라진 여자> 이언희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1.11.11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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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씽: 사라진 여자>: 여성 스릴러 영화

이언희 감독이 만든 <미씽: 사라진 여자>(2016)는 워킹맘과 입주육아도우미이자 이혼녀와 결혼이주여성인 두 아줌마, 한매(공효진)와 지선(엄지원)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이다. 두 여자의 처절하면서도 애절한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가 선택한 장르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남성적인 장르로 분류되는 추적 스릴러 영화이다. 이 영화는 취업 이주로 남한에 와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밀입국한 난민, 조선족 구남의 이야기를 다룬 <황해>(나홍진, 2010)와 같이 긴장, 불안, 공포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섬뜩하기 짝이 없는 스릴러 장르를 선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선택한 장르는 신자유주의시대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난민이 야기시키는 불안을 투사한 폭력적이고 잔혹한 식민화된 하층 남성의 몸의 비체화를 다룬 <황해>와 같은 ‘남자’ 영화의 유행을 일으킨 필름누아르, 스릴러 액션 영화 장르이다.

이언희 감독이 “여자들의 감성이 우선이었으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장르에 충실한”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고 밝혔듯이, 감독의 의도는 남성영화 장르인 스릴러를 전유하여 이주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여성 스릴러 영화’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파이란>(송해성, 2001)과 <마이 라띠마>(유지태, 2013)와 같은 이주여성이 등장하는 다른 영화들이 여성영화 멜로드라마를 전유하여 만든 남성영화 장르인 조폭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이 영화는 남성영화 스릴러를 전유하여 만든 여성 스릴러 장르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두드러진다. 물론 이 영화가 <황해>와 같은 남성영화 장르를 전유한 목적은 다분히 전복적인 페미니스트 정치성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주여성: “글로벌화의 하녀”

 

사실 이 영화는 1960년대 <하녀>(1960)를 필두로 한국 근대화가 탄생시킨 타자 하녀를 다룬 일련의 하녀 영화를 만든 김기영 감독이 창조한 한국적 자연주의 영화로서의 여성 스릴러 영화의 전통을 21세기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서 재창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이주의 여성화” (부양가족으로서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는 주체적인 취업 이주가 많아진 현상) 시대를 맞아 한국의 글로벌화는 새로운 젠더화된 하위계층을 탄생시켰다. 즉 이제 이주여성들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근대화의 하녀를 대체하여 “글로벌화의 하녀”(R. S. Parreñas의 “글로벌화의 하인들”(Servants of Globalization)을 젠더화한 용어)로 등장하고 있다.

이 영화는 딸의 양육권을 두고 의사인 남편 석호와 소송 중인 이혼녀 워킹맘 지선의 가정, 법원, 직장에서의 고군분투로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매의 등장은 지선에게는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힘든 자신을 돕기 위해 어디선가 나타난 고마운 착한 요정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글로벌 돌봄 사슬”이 맺어준 관계이다. 지선과 한매는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성역할 기대와 압력에 저항한 대가로 일과 돌봄을 혼자서 감당하게 된 “국민여성”과 한국 사회의 저출산 위기나 돌봄 노동의 부족을 해결할 대체인력, “이주여성”의 관계로 만난 것이다.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생존회로”의 말단에 처한 “조선족 이모”와 지선의 관계는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고착되고 있는 국민여성과 이주여성 사이의 위계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 두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 영화는 이러한 위계적 관계를 벗어나 국민여성과 이주여성이 함께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이제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인식하게 만든다.

 

소수영화를 향하여

 

파이란과 마이 라띠마와 같은 이주여성을 제목으로 하여 전경화시킨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주체가 아니라 한국 글로벌화 프로젝트 과정에서 낙오한 남성들(강재와 수영)의 좌절과 절망의 비애감을 감당하는 글로벌화의 하녀로 그들을 위한 서비스를 마친 뒤 사라지기로 된 판타지 대상, 타자, 즉 소수로만 존재한다. “사라진 여자”라는 부제의 이 영화에서도 한매(본명이 아니라 여러 가명들 중 하나)는 결국 사라진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기존 영화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러한 사실, 즉 한매가 사라진 여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은폐하지 않고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이주여성 한매를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그녀가 우리 사회에서 소수로서의 조건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라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밝히는데 주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현대영화가 지향해야할 소수영화의 창조인 것이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사라지기를 강요당한 소수에게 말을 거는 또는 소수가 말하는 소수영화는 일단 소수와 그 또는 그녀를 소수로 존재하게 하는 세계 사이에 단절이 있음을 발견하고 인정해야 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과 인정을 기반으로 하여 마침내 소수영화가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매와 한매가 이주해온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과 불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이 영화는 소수영화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보기가 너무 힘든 영화이다. 메시지 전달에 치중하고 그 과정을 너무 재미없게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실은 그 과정, 지선의 한매 추적 과정이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참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힘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도저히 기존 방식으로는 그 상황에 대한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러한 불가능한 사유를 가능하게 할 새로운 사유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한매의 참을 수 없는 삶의 무게

 

지선이 딸을 유괴한 조선족 이모를 추적하는 과정 속에 조선적 이모 한매, 안마방에서 성매매를 한 목련, 그리고 결혼이주여성으로 불행한 가정생활을 한 김연으로 살았던 한 이주여성의 파편화된 삶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냉동실에 보관된 한매의 죽은 딸 시체를 발견한 지선의 충격처럼, 이 영화는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적 체제에 기반한 비정한 폭력의 누아르 세계에서 이주여성이 겪고 있는 극한의 경험, 들뢰즈가 말하는 “우리의 사유가 참을 수 없는 것”을 포착하는 영화 이미지들로 그녀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예측할 수 없는 참혹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 여성 추적 스릴러 영화의 스릴과 서스펜스가 가중된다.

글로벌화의 하녀 한매는 한국 여자들이 결혼을 거부한 사회적 부적응자, “사회적-경제적 낙오자들”로 분류되는 폭력적인 지적장애자 남편과 결혼한 낯선 이방인으로 어떤 폭력과 괴롭힘도 견디며 살아왔다. 더 나아가 그녀는 선천적으로 병약한 딸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매매와 장기매매까지 하면서 사용된 뒤 폐기될 “비체”(abject)가 된다. 재생산자로서만 그녀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갖게 하고 인간임을 느끼게 해준 것은 유일한 혈육인 그녀의 딸이다. 장기매매까지 하면서 밀린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하지만, 그 병원 의사인 석호가 자기 딸의 병상 확보를 부탁해서 익명의 “노래하는 중국 여자”의 딸 재인은 강제로 퇴원을 당한다. 온갖 희생과 간호에도 불구하고 딸이 죽게 되자,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더 이상 참을 수도 없는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을 철저히 배제시킨 그 세계의 본 모습을 마침내 볼 수 있는 들뢰즈의 “보는 자”(seer)가 된 것이다. 이에 그녀는 사라지는 대신 복수를 위한 귀환을, “억압된 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pressed)을 시도한다.

 

한매의 “글로벌화의 하녀”의 수행성

 

한매가 선택한 복수의 전략은 바로 그녀에게 요구되어온 글로벌화의 하녀로서의 수행성의 전복성이다. 가장이 부재한 그러나 여전히 가부장적 부르주아 가정 구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지선의 집에 조선족 이모로 입주한 그녀는 한국가정에서 그녀에게 요구되는 워킹맘 마님을 대신한 하녀의 수행성을 그 가정을 해체시키는 복수 전략으로 사용한다. 한매의 이러한 글로벌화의 하녀 수행성의 성과는 프로이트의 하녀 도라(Dora)에 관한 식수스(H. Cixous)와 클레망(C. Clément)의 서로 다른 견해처럼 상반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도라가 부르주아 가정을 작동시키는 회로를 깨뜨릴 수 있는 “어떤 힘”을 발휘했다고 본 식수스의 견해처럼, 한매도 글로벌 자본주의 부르주아 가정의 작동 회로를 깨뜨리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오히려 도라로 인해 부르주아 가정의 구조가 더욱 결속되었을 뿐이라는 클레망의 주장처럼, 한매는 마님 지선의 억압된 자아로 그냥 사라질 뿐이지 그 구조를 깨뜨릴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러한 해석의 설득력은 지선이 병원에서 깨어나 햇볕이 가득한 정원에서 딸을 꼭 껴안는 엔딩 장면에 부재했던 지선의 남편이 배경 속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처리된 미장센에서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결국 사라진 여자 한매로 인해 오히려 깨졌던 한국 중산층 가정의 재결합과 결속으로 결말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매의 글로벌화의 하녀의 수행성이 페미니스트 정치성의 “어떤 힘”을 발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의 엔딩은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지선과 다은의 모녀간의 결속 장면을 전경화하고, 석호의 모습을 카메라의 초점에서 비켜나 멀리 배경에 머물게 한 엔딩은 영화의 시작에서 논의된 양육권 분쟁을 비롯하여 부당한 가부장적 가정의 작동 원리를 깨드리는 “어떤 힘”이 지선과 한매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작동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사라진 이주여성의 스토리-텔링

 

이 영화는 소수로서만 존재하는 글로벌화의 하녀인 이주여성 한매의 이야기를 마님 지선의 개입으로 전개한다. 한매가 딸을 유괴하여 사라지자 지선 또한 한매를 추적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선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기존 사회의 습관적 인식들이 구성하는 클리셰를 넘어서서 마침내 그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해, 사라진 한매가 지선을 소수-되기로 유인하여, 그녀를 “보는 자”의 입지에 설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주여성 한매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말걸기 또는 그녀 자신의 말하기에 의한 유기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의 에세이 제목, “하위 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Can Subaltern Speak?)라는 질문이 하위 주체는 억압당하고, 지배당하면서, 그냥 거기에 “익명으로 그리고 말못한”채 존재하는 타자, 소수일 뿐이라는 전제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사하듯이, 이 영화 또한 그러하다. 지선에게도 한매는 자신을 돕기 위해 나타난 선한 요정 같은 판타지 대상(fantasy object)일 뿐, 상호소통의 주체가 아니라서 한국말을 잘못해도 괜찮다. 그러나 지선은 유괴범이 되어 사라진 한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점차 한매의 시선에서 세계를 보는 소수-되기로 진입하게 되고, 주관과 객관의 구분을 넘어서는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 즉 자유간접주체(free indirect subjectivity)의 시각에서 한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이야기 방식이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의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즉 “이야기 꾸미기”의 방식이다.

지선을 비롯하여 여자들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경찰서와 병원 등 공적 제도권이 제공하는 한매의 이야기는 “지배자의 사고와 관점을 대변하는 이미 정해진 진실의 모델”을 따른 내러티브이다. 반면에 지선이 추적 과정에서 만든 한매의 이야기는 이러한 진실의 모델을 해체할 수 있는 이야기 방식, 소수가 가지는 “거짓의 역량”이 발휘되는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전개된다. 지선의 숨 막히는 스릴과 긴장감이 넘치는 추적을 통해 지선과 관객은 일련의 감당하기 어려운 믿을 수 없는 파편적인 사실들을 보게 된다. “소수로서의 삶의 참을 수 없는” 난국에 처해 거짓을 말하고 비인간적인 괴물이 된 한매와의 소수-되기를 통해 지선은 한매와 이 세계 사이에 단절, “분열과 불화”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래서 왜 한매가 사라진 여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깨닫게 됨으로써 마침내 한 이주여성의 스토리-텔링에 참여하게 된다.

 

지선의 손을 뿌리친 한매의 거부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소수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얻게 된 지선과 한매의 연대감과 자매애를 부각시키기 위한 장면으로 영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시퀀스는 그녀를 추적해온 지선과 경찰과 대치를 하며 뱃머리에 선 한매가 다은을 죽은 딸로 생각하면서 마침내 안전하게 넘겨주고 바다 속으로 투신을 하고, 지선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극적인 장면들로 구성된다. 바다 속까지 뛰어들어 한매를 추적하는 지선이 내민 손을 한매의 손이 뿌리치는 장면에서 둘 사이의 자매애와 공감이 감지되기도 하지만, 더욱 강하게 부각되는 것은 지선을 뿌리치는 한매의 단호한 거부이다. 이 영화가 이주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서 소수영화를 지향하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단호한 한매의 거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국민여성과 이주여성, 지선과 한매, 두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이지만, 두 여자 사이의 자매애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두 여자의 연대가 아니라 그 연대가 이제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 되어야 할지를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두 여자 사이의 연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소수영화는 아니지만, 그러한 소수영화를 창조하기 위하여 직시해야할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는, 따라서 소수영화를 지향하는 영화임을 시사하는 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해, 현 단계로서 이주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한매의 단호한 거부와 절연의 몸짓과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진 여자’의 모습, 즉 소수의 조건으로서만 존재하는 소수의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수 권력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아 은폐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성과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젠더와 문화』(11권1호, 2018)에 실린 “한국 영화에서 사라진 이주여성 찾기”(7-39)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수정하여 다시 쓰기를 한 글이다.

 

사진 출처 : ‘미씽: 사라진 여자’, 《구글》, 2021.11.10.

https://www.google.co.kr/search?q=%EB%AF%B8%EC%94%BD+%EC%82%AC%EB%9D%BC%EC%A7%84+%EC%97%AC%EC%9E%90+%EB%8B%A4%EC%8B%9C%EB%B3%B4%EA%B8%B0&sxsrf=AOaemvLBLs8GbfLLNkN16nlxmyPifFVA-g:1636525449909&source=lnms&tbm=isch&sa=X&ved=2ahUKEwiQ6e2wlI30AhWesVYBHXgkBSgQ_AUoAnoECAEQBA&biw=1280&bih=577&dpr=1.5

 

 

저자·정문영
영화각색연구자,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각색과 전유 및 상호매체성과 문화 혼종성의 관점에서 각색영화 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한국의 하녀 영화 읽기 그리고 한국과 서구의 하녀 영화의 상호읽기 또한 주된 연구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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