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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이동’ 또는 움직여 자리를 바꿈 : <관람모드- 있는 방식>
[양근애의 문화톡톡] ‘이동’ 또는 움직여 자리를 바꿈 : <관람모드- 있는 방식>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21.12.30 1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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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set 프로젝트의 <관람모드- 있는 방식>은 설립 36년만에 시설폐지된 향유의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는 것으로 시작한다. 버스 안 좌석 위에는 생수 한 병과 사진엽서 한 장이 놓여 있다. 내가 앉은 자리에 놓여 있던 사진엽서에는 아주 가까이에서 찍은 듯한 물건의 일부가 담겨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때는 미처 알 수가 없었다. 평일 낮,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김포로 가는 길에 평범한 일상의 풍경들이 무심히 지나갔다. 중간 경유지인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도착하자 휠체어 리프트가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향유의집을 나와 자립한 김동림 씨가 비어 있던 버스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이 버스는 일종의 움직이는 극장이다. 휠체어가 놓인 버스의 중앙은 무대, 자신의 목소리와 존재를 드러낸 김동림은 배우, 사진엽서는 초대장 혹은 프로그램북이다. 이룸센터에서 버스로, 버스에서 향유의집으로, 시설에서 탈시설로, 극장에서 현실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 공연의 특징이 드러난다. 

 

[사진1-‘관람모드-있는 방식’ ©정택용]
[사진1-‘관람모드-있는 방식’ ©정택용]

공연은 김동림의 음악방송으로 속도를 냈다. 김동림은 DJ가 되어 공연 예약 때 신청받은 관객들의 신청곡을 들려준다. 버스 앞쪽에 달린 TV에는 수어통역이 있는 영상이 나온다. 마치 여행을 가듯, 창밖의 풍경은 어느새 도심을 벗어나 있고 김동림이 선곡한 음악은 오늘 공연의 주제, 가령 탈시설이나 차별, 보호, 격리, 자립 등과는 무관한 짐짓 가벼운 터치로 이동의 감각을 환기시킨다. 여의도에서 한 시간 남짓 달려와 도착한 곳은 1986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장애인 거주시설로 지난 4월 30일 폐쇄된 향유의집이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사회복지재단인 석암재단에서 운영했는데 2008년 족벌 경영과 장애수당 횡령, 인권유린 등이 폭로되었다. 2009년 8명의 장애인이 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62일간 농성을 벌였고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향유의집으로 바뀌었다. ‘마로니에 8인’ 중 한 사람인 김동림은 다시 시설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역 사회로 돌아온 김동림은 동료들과 탈시설운동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다고 한다.

 

[사진2-‘관람모드-있는 방식’ ©정택용]
[사진2-‘관람모드-있는 방식’ ©정택용]

탈시설운동의 출발이 된 향유의집은 폐쇄되었지만, 시설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역사로 존재한다. 버스에서 내린 관객은 폐쇄된 향유의집 입구의 자물쇠가 열리는 연극적 순간을 신호로 무대를 옮겨간다. 일종의 투어-연극을 취하고 있는 <관람 모드- 있는 방식>은 지금은 없는 장소에서 아직 존재하는 시설의 폭력과 억압을 관객이 각자의 속도와 온도로 감지하도록 한다. 관객은 본관과 별관의 내부, 두 건물을 이어주는 구름다리 등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시설 거주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레터링과 영상을 만난다. 건물 안에는 수용인원이 120명이 넘었을 때는 한 방에 예닐곱 명이 거주했다는 작은 방들이 줄지어 있다. 두 개의 방 사이에는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 문에는 목욕 중입니다”, “관장 중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다. 휴게실은 사망자가 발생하면 한쪽에 병풍을 치고 장례를 치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한다. 영상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사람을 거기다 갖다 놓고 병풍으로 이렇게 가렸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누구야 말 안 들으면 저기, . 휴게실 가서 병풍 쳐라 그러면 진짜 말을 잘 들었어요.“

본관 1층부터 3층까지를 돌아다니면서 만날 수 있는 레터링은 다양했다. 인권기록활동가들이 거주자들의 인터뷰를 한 내용 중에서 발췌한 내용들은 구술에서 문자로 이동하면서 공적 발화로 작동되는 느낌을 준다. 레터링의 위치에 따라 벽에 비스듬히 붙은 글자를 올려다보고 바닥에 붙은 글자를 내려다보는 등 특정 자세를 취하면서 거주자들의 눈높이를 간접 체험할 수도 있다. 

공연은 사생활은커녕 인권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시설에서의 일들을 다큐멘트로 전시하면서도 이를 주장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제는 과거가 된 사실을 전달하는 목소리도 담담하다고 느껴진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반복되면서 무감각해졌을 일들이 먼지처럼 폐쇄된 시설에 가라 앉아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발화된 말들은 문장으로 기록되어 부재를 현존시킨다. 보호라는 이름의 격리가 이루어진 장소에는 생활의 흔적들도 함께 있다. 가구, 이불, 빨래 건조대, 달력, 손때 묻은 벽지와 장판, 액자, 옷걸이 등은 기록이나 메시지에 담기지 않는 고유한 자국으로 남아 있다. 그 자국들은 더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작동하지 않는다.

 
[사진3-‘관람모드-있는 방식’ ©정택용]
[사진3-‘관람모드-있는 방식’ ©정택용]

본관과 별관을 잇는 구름다리에서는 바깥의 풍경을 내다볼 수가 있다. 이동의 편리성과 효율적 관리를 목적으로 지은 이 공간에서 거주자들은 빨래도 널고 놀이도 하고 바깥도 내다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투명도가 낮은 창으로 바라보는 시야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외출을 대신하는 그 내다봄이 안전할지는 몰라도 결코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시설이라도 집단 수용과 격리를 전제로 한 이상 시설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연을 안내하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의 활동가나 시설 거주자였던 김동림(다른 날에는 한규선이 등장한다)은 직접 와보지 않으면 결코 감각할 수 없을 시설의 문제들을 알려주는 안내자이면서, 개인적 감정적 개입 없이 관객과 시설이라는 장소를 매개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당사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내세우거나 필요하다면 정치적 호소를 할 수도 있었을텐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외려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말하는 태도는 인권이 짓밟혔던 개인적 기억보다 탈시설을 둘러싼 구조적 해결에 주목하도록 만들었고, 없어진 시설과 시설에 살았던 사람들을 대상화 하지 않으려는 제작진의 노력 만큼이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관람모드- 있는 방식>에서 본 것은 장애인시설의 역사와 탈시설운동의 발자취, 탈시설지원법의 필요성과 같은 사실들을 넘어선다. 경사로 바닥에는 “2009-117-4-1-1-12-64”와 같은 숫자들로 향유의집의 연혁을 나타낸 레터링이 있다. 년도와 거주인원, 사망, 전원, 원가정복귀, 자립한 인원의 수와 직원수를 표시한 것이다.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강서구에 있었던 시설을 도시 밖으로 밀어내고 장애인을 보이지 않도록 만든 후, 격리는 차별과 배제라는 우리 사회의 존립 방식을 보여주는 정책으로 아주 오래 자행되었다. 공연을 안내하는 글에는 다음과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있는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누군가가 있는사회에 살고 있다. 누군가는 어딘가에 있는, 하지만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있는지 알 수 없는 혹은 알고자 하지 않는 거주시설에서 살고 있다. <관람모드-있는 방식>은 없다고 여겨졌던 사람들, 하지만 분명히 있는 사람들의 말, 기억, 목소리를 따라가며 장애인 거주시설이 있는 방식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것이 곧 우리가 있는 방식에 대해 질문이기도 할 것이기에.”

향유의집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경사로를 지나갈 때, 계단참의 벽에 낡은 매트리스가 세워져 있었다. 장애인시설에 맞지 않는 경사로의 높은 기울기 때문에 다치는 일이 빈번했다는 뜻이다. 붉은 니트로 덮인, 군데군데 찢긴 그 매트리스를 단번에 알아본 까닭은 처음 버스에 탔을 때 내가 앉은 자리에 놓인 사진엽서 속 피사체가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정보도 없이 처음 그 사진엽서를 받아들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억압도 폭력도 아닌 어떤 온기였다. 시설은 폐쇄되었지만 살아내고자 했던 기억은 사라질 수 없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는 기억의 흔적들을 포착하는 다감한 시선 덕분에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긴장 어린 생존과 일상의 존엄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향유의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난 작은 조각의 이미지는 다시 여의도 이룸센터로 오는 버스 안에서 거대한 실체로 다가왔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시선에서 보면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들이 부분에 불과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은 우리 사회의 수준과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체와 다르지 않다. 버스는 왔던 길을 되돌아 왔다. 그러나 온전한 제자리란 없다. '이동'은 "움직여 자리를 바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탈시설의 당사자들은 장애인들이지만 장애인들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살 준비를 해야할 사람들은 비장애인들이다. 타인과의 자리바꿈이 없다면 공존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한 기사

특별취재팀, "우리 같이 살래요" 시설에선 꿈도 못 꿨던 사랑, 한겨례, 2019. 2. 9. 

강혜민 기자, "2021년 4월 30일, '향유의집' 폐쇄되던 날, 비마이너, 2021. 5. 1. 

 

 

글 · 양근애(문화평론가)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극작, 드라마터그, 평론을 병행하며 극 창작에 참여하고 있다. 2016년 방송평론상을 수상했다. 기억과 역사의 길항 및 문화의 정치성 수행성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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